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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랑 Apr 11. 2022

어쩌면 이런 벚꽃은 올해가 마지막 일지도 몰라.

하루 만에 피어나, 하루 만에 지는 벚꽃을 보며



나무는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이유 없이.

사실 이유가 없진 않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자연을 좋아하는 것이 생명체의 본질이라고 했다. 윌슨은 이러한 성질을 생명과 사랑을 합해 ‘바이오필리아biophilia’라고 이름 붙였다. 정확하게는 생명, 그리고 생명과 유사한 과정에 가치를 두는 타고난 경향이다. 나라서 특별히 식물이나 나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살아 있는 것에 가치를 두고 좋아한다는 것이다. 몇몇 인류학자는 우리의 먼 조상들이 수백만 년 전 나무에서 내려와 대초원으로 나오면서 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에, 인간에겐 푸른 녹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수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원초적인 마음이 내 심층 깊이 자리하는지 알 순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바쁘게 살아가는 중에도 나무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사계절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도 나무는 사계절을 잊지 않는다.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엔 푸른 잎들로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면 잎을 물들이고 겨울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지만, 봄이 오면 다시 싹을 틔운다. 시간 속에서 지치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속도를 지켜내는 것이 놀랍다. (79-80, 사소한 기쁨, 최현미, 현암사, 2022)



나무를 좋아한다. 아니, 자연을 좋아한다. 자연의 변화를 좋아한다. 십대 시절, 내 안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잠재우는 방법은 음악을 들으며 바깥은 걷는 일이었다. 또 하나는 책읽기. 책도 읽지 못하는 날이면 마이마이에 queen이나 led zeppelin의 테이프를 꽂아 넣고, 강가를 걷곤 했다. 먹구름이 몰려오면 어김없이 밖으로 나갔다. 물기를 머금은 습한 바람이 불어오고, 저 멀리서 시꺼먼 먹구름이 우릉우릉 뭉칠 때, 공기 중에 뭔가 찌릿찌릿함이 들어찼을 때, 보폭을 넓게 해서 성큼 성큼 걷는 걸 좋아했다. 비가 들어있는 바람과 진한 회색빛 구름이 좋았다. 나는 예민하게 자연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계절의 변화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그 경이에 기뻐한다. 눈물을 흘린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찰나의 공기의 변화와 조금이나마 길어진 해 같은 것. 산수유와 생강나무가 언제 피었는지, 개나리와 진달래는, 벚꽃은 또 언제 피는지, 조그만 라일락 꽃봉오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자리를 잡는 사실도 안다. 올해는, 모든 것이 다르다. 작년과도 다르고 그 어느 해와도 다르다.


봄이 왔지만, 추웠다.

강원도에 살고 있어서 더디게 봄이 온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더 늦었다. 낮 기온은 평년과 비슷했지만, 아침 기온은 도저히 오르질 않았다. 3월이 지나 4월초가 되어서도 아침 기온은 0도를 밑돌았다. 일교차가 15도 이상 넘어가는 날이 계속되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벚꽃 소식도 덩달아 늦어졌다. 그러더니, 불과 일주일 전에는 아침에 쌀쌀하다고 자동차 히터를 틀었는데, 지난 주말부터 낮 기온이 26도를 넘어섰다. 벚나무는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아침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꽃망울이 저녁 퇴근 길에 조금 피더니,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거의 다 핀 모습을 봤다. 밤에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올해 알았다. 26도를 넘나들었던 주말, 토요일에는 결국 모든 벚나무가 꽃을 피웠다. 분명,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해도 활짝 피진 않았는데, 반나절만에 만개.


벚꽃이 피면 공기 자체가 빛을 내는 느낌이다. 환하다. 조명을 켠 듯하다. 아름답다. 그렇지만, 이건 뭔가 잘못됐다. 주말을 지나 월요일 퇴근길에 보니,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한 벚나무들이 급격히 오른 기온에 서둘러 새 잎부터 올려보냈다. 꽃은 얼마 피우지도 못하고 벌써 무성하게 새 잎을 드러낸 벚나무를 보며, 어쩌면 다음해에는 조명을 켠 듯이 환하고 탐스러운 벚꽃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해의 기온도 갑자기 26도를 넘나들면, 벚꽃은 꽃을 피울새도 없이 새 잎부터 올려보내겠지. 라일락, 낙엽송, 참나무, 온갖 나무들이 서둘러 새 잎을 피워냈다. 하룻밤 사이에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온 세상이 연두색으로 덮였다. 아름답지만, 서글프다. 기후 위기에 행동하라는 시위에 나선 과학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나는 날마다 영화 ‘돈 룩 업’의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1.5도 기온 상승은 거짓이라고. 지금 당장 화석연료 사용을 중지해야 한다’고. 과학자는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는데,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한다는 호소에는 어린 아들이 살아갈 앞날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내게도 마음놓고 살아 갈 앞날을 데려다주고 싶은 조카가 있다. 어찌해야 하는 걸까. 나는. 절망스러운 생각에 빠진다. 한숨을 내쉬다가 결국 돌아오는 생각은, 그러니까, 지금을 살자, 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기. 설령 그게 ‘돈 룩 업’에 나오는 우매한 민중과 같은 행동이라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뿐이다. 그래도 벚꽃이 이렇게나 빨리 지는 것은 서글픈, 그런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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