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따기
해마다 감을 보내주는 걸 받아만 먹다가 처음으로 감을 따러 갔다. 내가 초등학교 3, 4학년 때 쯤인지, 더 어렸을 때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고모네 집에 감을 따러 간 적이 있었다. 거의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고모네 집이 굉장히 산골이었고, 거기서 감을 땄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때는 아마도 감을 따러 갔다기보다, 고모네 집에 놀러가서 홍시를 몇 개 땄던 것 같다. 고모부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고, 점잖은 성격으로 우리 삼남매를 많이 예뻐해주셨다. 이번에도 사과대추를 따서 먹어보라고 손에 꼭 쥐어주셨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다정할 수 있는 사이.
그 옛날에 평창 시골에서 주문진 시골로 시집을 간 고모는, 할아버지 생신에만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할머니 생신은 음력으로 2월인데, 설이랑 겹치는 때가 잦아서, 고모는 오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올 때마다 꼭 문어와 오징어회를 잔뜩 가져 왔다. 때로는 양미리, 꽁치, 고등어 같은 해산물이기도 했다. 지금도 회를 썩 좋아하지 않지만, 어릴 때는 입에도 안 댔는데, 돌이켜보면 무척 아쉽다. 지금은 문어가 없어서 못 먹기 때문이다. 고모도 친정에 오고 싶었겠지. 왜 안 오고 싶었겠어. 살다보니 올 수 없었던 게지. 그래도 자식 다 키우시고, 여유가 생기면서 더 자주 고향에 찾아오신다.
4월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부모님은 2주에 한 번은 꼭 할머니를 뵈러 시골에 간다. 작은 아버지, 어머니가 곁에 사시지만, 할머니에게 큰아들인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반가운 사람이니까. 할머니를 모시고 정말 오랜만에 고모네 집으로 가는 길. 대관령 나무들이 그제서야 물들어가는 걸 보며 주문진으로 달렸다. 늦게 찾아 온 가을날. 햇빛은 따뜻하고 나뭇잎은 물들었다. 알고보니 고모네 동네가 그 유명한 삼교리다. 막국수로 이름 난 곳인데, 어릴 때 한 번 갔던 터라 이름을 몰랐다.
주문진 읍내에 사는 집이 있고, 옛날 살던 집이 삼교리 꼬두배기에 남아 있어서, 농사도 짓고, 감나무도 밭 가생이에 쫄로리 심었다. 대봉시, 단감, 침을 들여 먹는 떫은감이 나무마다 주렁 주렁 열렸다. 고모는 "나는 평생 감은 안 따봤어." 하시며, 감 따는 장대를 들고 척척 감을 땄다. 감 따는 일은 고모부 차지란 뜻이다. 고모부가 아침에 와서 잘 익은 홍시를 우리 먹으라고 몇 개 따 두었다. 나무에서 익은 홍시를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 본 건 처음이었는데, 와, 정말 달고 시원했다. 보통 홍시가 단맛만 있는데 나무에서 바로 따서 그런지 물기가 어찌나 많은지, 배를 먹는 줄 알았다.
감 따러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나,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조카까지 일곱이 나섰다. 12월에 만으로 네 살에 들어서는 조카는 키가 자라는 곳에 달린 단감을 "돌려, 돌려." 노래를 불러가며 땄다. 햇살은 따뜻하고, 좋아하는 어른들도 잔뜩이고, 새롭게 해 보는 일이라 신이 났다. 그러나 워낙에 달리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라 (자전거가 있어도 그저 뛰어다니는 아이다.) 곧 밭 여기 저기로 돌아다니느라 바빴다. 동생이 송장 메뚜기를 잡아서 보여주었더니 자기 손바닥 위에 놓으라는 조카. 나와 동생은 "안 돼. 손바닥에 놓는 순간 날아갈거야." 했고 조카는 끈질기게 손바닥에 놓으라고 했다. "그래, 그럼 날아가도 후회하지 않는거야." 단단한 말투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미리 다짐을 받아두고 내려놓았는데?! 메뚜기가 가만히 앉아있었다. 동생과 나, 둘이 동시에 "어?" 하는 목소리와 "안 날아가네." 하는 쨍쨍한 조카의 목소리가 동영상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볼 때마다 동생과 내 목소리에 웃음이 난다.)
할머니는 고모집에 남아서 고추 따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고모, 고모부 두 분 다 너무 바빠서, 삼교리 집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단다. 정말 시골집이 그대로 남아서 부엌 아궁이랑, 부엌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미닫이 문(상을 들였다 내는 문)까지 있었다. 대추나무, 모과나무에 주렁주렁 열매가 가득하고, 잘 안은 배추와 두 줄 심은 고추밭. 집 바로 옆에 작은 계곡이 있어서 여름에 물놀이하기도 좋고, 대문 바로 밑으로는 제법 큰 계곡이 있는데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이란다. 천렵을 좋아하는 동생은 벌써부터 족대질을 할 생각에 들떴고, 고모에게 집을 수리해서 에어비앤비로 빌려주자는 말까지 했다. 깊은 산골에서 캠핑처럼 하룻밤 잘 수 있는 곳으로 이만한 곳이 없겠다. 할머니는 고추 따느라 손주들 얼굴은 보지도 않으시고 ㅋㅋㅋ 부모님 차를 타고 다니시니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주문진 수산시장에 가서 고모가 사 준 회를 배부르게 먹었다. 수온 변화로 오징어가 안 잡힌다는데, 이날은 오징어가 잡혀서 '금징어회'를 먹을 수 있었다. 사실 고모가 오징어가 잘 안 잡힌다고 한 지는 꽤 예전이다. 거의 10년 전부터도 오징어가 안 잡힌다고 하셨는데, 온실 가스로 인한 기후변화가 하루 아침에 뚝딱이 아니니까. 문어도 한 마리 삶고, 회에 매운탕까지 배를 땅땅 두드리며 나섰다.
어머니는 큰며느리로 몇 번이나 고모에 대한 서운함을 비치셨다. 딸인데, 왜 그렇게 자기 어머니, 아버지에게 무관심하냐고. 어쩌면 이렇게 안 찾아오냐고. 내가 봐도 한동안은 무심한 듯 했다. 고모도 자기 삶이 팍팍했겠지. 아니면 딸이라 그동안 서운했던 일이 일었다거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더 자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번에는 우리가 찾아가서 고모를 뵙고 오니, 왜 우리가 놀러올 생각은 안 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아버지도 자기 재미만 쫓아 사는 사람이라, 고모나 형제들과 놀러간다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팔순 때 제주도에 간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의 서운함을 알기라도 하듯이, 이번에 감이며, 점심 대접이며, 김장하라고 고춧가루까지 다 빻아서 챙겨주고, 귀한 송이까지 찔러 넣어준 고모. (고모부가 송이를 아주 많이 따신다.)
마흔이 넘었지만 고모에게는 여전히 조카.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라고 챙겨주신다. 그런 나는 내 조카를 챙긴다.
역시. 사랑은 내리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