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은 끝이 아니라 시작
퇴원 일주일 뒤 최종 조직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을 다시 찾았다. 교수는 말했다.
“수술 후 떼어낸 조직에서 전이성 암이 발견돼서 제자리암이 아니네요. 0기가 아니라 1기예요. 그래서 항암치료, 표적치료, 호르몬치료 3가지 치료를 3년간 해야 됩니다.”
가슴 한쪽을 다 떼어내고도 꽤 긍정적으로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항암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런데 그 희망마저 뺏기고 나니 난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었다.
이 암이란 놈의 장난질에 무너졌고,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결승점이 코앞인 줄 알고 마지막 전력 질주로 온 힘을 다 써버렸는데 아직 100m가 더 남았다고 하는 상황 같았다. 고작 100m만 더 가면 되는데 왜 그걸 못 하냐고 하겠지만 나는 단 1m도 움직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희망 탑이 완전히 붕괴돼 버렸다.
웃으면 복이 올 줄 알았는데 감히 암 앞에서 웃은 게 잘못이었나 보다. 그렇다고 암을 우습게 본 건 아니었는데…
어안이 벙벙해진 채 최종 검사지에 대한 질문 하나 하지 못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온통 영어로 쓰여 있는 조직검사지 속 단어들을 검색했다. 의사 말이 당최 무슨 말인지 계속 찾아보았다. 내 암은 미세침윤 0.4cm, 호르몬수용체 양성, HER-2양성인 삼중양성으로 흔한 아형이 아니었다.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하루 종일 암만 검색했다. 내 유튜브 목록은 온통 암과 항암 관련 영상으로 가득 찼다. 그러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1cm 미만인 전이성 암, 과연 항암을 해야 할까?’라는 영상으로 날 이끌었다. 영상 속 의사는 1cm 미만 전이성 암의 항암치료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었다.
그렇게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을 들으러 그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검사지를 보며 역시나 항암치료와 표적치료는 회의적이었지만 호르몬치료는 하면 좋겠다는 소견을 주었다. 그리고 한 번 더 S병원 종양내과 진료를 받을 수 있게 진료의뢰서를 써주었다. S병원 종양내과 진료실 앞에서 얼마나 덜덜 떨었는지 모르겠다.
항암 전문가인 종양내과 교수도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고 하면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빡빡 민 머리에 두건을 쓴 환자들을 쳐다보며 내 미래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들의 벗겨진 머리, 힘없는 어깨, 거무스름한 피부, 깨진 손톱을 보며 눈물을 참아냈다. 어떤 말을 들어도 좌절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더 이상 실망하는 게 이골이 나서 차라리 최악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기대를 버리고 결국 항암치료를 하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 저렇게 모자를 쓰고 다니는 유방암 환자의 모습 말이다.
교수는 나의 의뢰서와 검사지를 보며 유튜버 의사와 비슷한 말을 해주었다. 표준치료는 삼중양성에 경우 호르몬치료, 표적치료, 항암치료 세 가지 치료 모두 다 시행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1cm 미만 암에는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된다고 했다. “그냥 항암을 했을 때와 안 했을 때의 재발률을 확률로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1기에 경우 항암 시 재발 확률 5%, 항암 미시행 시 7% 정도예요.”
나는 또 2%에 희망을 걸었다.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줄 수 있는 의사만 찾아다니고 듣고 싶은 말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의사는 적은 차이에도 사람들이 항암치료를 하는 이유는 이 2%의 확률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재발의 두려움보다 항암치료로 겪게 될 부작용이 더 두려웠다. 항암 치료의 부작용인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톱, 발톱이 깨지고 피부질환이 생기는 수준에 겁을 먹은 것은 아니다.
두상 하나는 기가 막히게 예뻐 머리를 빡빡 민대도 나름 귀여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