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최근 기획 일을 하면서 뭔가 잘 안 되는 느낌을 받았다. 전보다 더 많은 지식을 익혔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성장했다고 느낀 만큼 내게 더 높은 수준의 기획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정작 기획을 시작하자 생각만큼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PPT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오히려 더 난잡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난잡함은 기획서를 완성한 뒤에 조금 수정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 그리고 스스로 80% 정도 완성되었다고 느꼈을 때, 잠시 숨을 고르고 되돌아본 내 기획은 형편없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첫 번째 문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PPT 한 장에 두 개 이상의 메시지가 들어가 있어 이 말, 저 말을 왔다 갔다 했고 근거 자료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PPT 구성에 여백이 너무 많아 허술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데이터를 마구 구겨 넣었다. 거북할 정도로 'Too Much'였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듣는 이를 설득시킬 스토리라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흐름이 왔다갔다 했고 결론까지 도달하는 데에 직진이 아니라 빙빙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결론이 중간에 여러 번 등장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졸작이었다.
오히려 학생 때 만들었던 기획들이 이것보다 훨씬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경험했는데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었다. 이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보다 지금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오만함에 생각하는 시간은 줄이고 자료 작성에만 더 신경썼기 때문이다.
잠깐 고민하고 쓴 기획서가 명작이 되리라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기획자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지만 난 자료 만드는 사람이었다. 정작 기획의 핵심인 스토리라인 구성과 논리, 근거의 연결은 신경도 쓰지 않고 얕은 지식과 경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해 자료를 만들었다. 한 마디로 주객전도였다.
업계의 지식과 관련 경험이 쌓이면서 기획해야 하는 일의 주제를 들으면 대충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졌다. 대충 어떤 자료들이 필요하고 어떤 주장을 하면 될 지가 눈에 보였다. 대충 생각이 들면 바로 자료 작성에 들어갔다. '생각(2) : 자료작성(8)'이 된 것이다. 그 결과, 듣는 이들은 설득되지 않았고 내 논리들은 중구난방이 되었다. 곧바로 졸작 기획서로 이어졌다.
엣지있는 기획을 하려면 스토리라인을 고민하고 논리와 근거들을 어떻게 배열해야 청자들을 더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자료 작성은 나중에 해도 그만이다. 메시지가 임팩트 있고 논리가 확실하다면 자료는 더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라인이 정해져 있고 핵심 메시지들이 정해져 있으면 필요한 근거 데이터들을 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데이터들 속에서 메시지와 논리를 찾으려면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 정작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몰라 의미없이 데이터를 보는 시간만 길어진다. 일을 하는 순서가 뒤집힌 것인데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많은 기획자들이 이렇게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초심을 찾고 다시 원래 기획자가 일하던 방식으로 말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기획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자 툴을 소개한다.
(1) Why what how
(2) 스토리라인 표만들기
(1) Why What How, 골든 서클 이론
유튜브에 골든 서클 이론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TED 강연이 있다. 그 강연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기획서에서 수단과 방법이 아닌 목적, 이유가 먼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기획서의 목적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그 목적을 수행할 것인지 순서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청자가 더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스토리라인을 잡으면 매우 유용하다. 청자를 설득하기 용이한 스토리라인의 뼈대가 마련된 셈이다. 이제 이 뼈대에 논리와 주장들을 붙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 작업을 할 때는 다음과 같은 Tool을 이용하면 좋을 것이다.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툴이다.
(2) 표만들기
아래의 표의 빈칸을 채워가다 보면 스토리라인의 가닥이 잡힐 것이다. 그 가닥을 시작으로 순서도 바꿔보고 내용도 바꿔보면서 고민하다 보면 매끄러운 스토리라인과 논리 전개가 완성될 것이다.
주제는 스토리라인을 이어가는 큰 주제를 말한다. 그 큰 주제 안에서 핵심 메시지들을 뽑아내고 그 메시지 1개를 하나의 장표로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 장표에 들어갈 아이디어들, 백데이터를들 조합하면 기획서가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예상 질문들을 뽑아 놓고 스토리라인부터 각 장표에 들어갈 내용까지 되돌아 보면서 빼먹은 것이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빈틈없는 기획서가 완성된다.
이 표는 특별한 것이 별로 없다. 다만 기획자들이 흔히 하는 고민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고 그 고민을 기록할 수 있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기록해 정리하고 눈으로 다시 보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획의 방법과 툴은 정말 기본이다. 하지만 그 기본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장표들을 만들기 시작했던 결과 끝에가서 기획서를 뒤엎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 스케치 없이 색부터 칠하려던 결과이다. 명확한 스토리라인과 메시지, 근거(스케치)들을 미리 계획하고 움직인다면 수정 사항은 뼈대인 스케치가 아닌 작은 부분인 색, 표현 방법 등등일 것이다. 또한 스토리가 명확하다면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지 명확해 데이터를 찾아 가공하는 시간도 더 적게 걸릴 것이다. 일을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얘기지만 또 기본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효율적인 기획, 더 엣지있는 기획은 기본에서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