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은 같지만 하는 형식을 달랐던 기획자로서의 2년
작년 말, 대기업으로 직장을 잡게 되었다. 다행히 늘 내가 해오던 '기획' 직무, 그중에서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대기업의 전략기획 직무를 맡게 되었다. 그전까지 필자는 스타트업은 아니지만 스타트업들에 투자를 하는 벤처캐피털 회사에서 잠시 일했다. 일하는 동안 짧게나마 스타트업들의 전략을 고민하고 그들을 위한 마케팅 전략을 고민했었다. 그다음으로 옮긴 직장은 대기업의 신사업 조직이었는데 기업 차원에서 이 조직은 마치 스타트업처럼 운영하자는 방침이 있었다. 그래서 대기업 반, 스타트업 반 정도의 문화를 가진 조직에서 잠시 일도 했었다.
이번 글에서는 필자가 짧고 작은 경험이었지만 스타트업부터 반반 조직, 그리고 완전한 대기업까지 '기획자'로서 일했던 경험에 대해 공유하려 한다. 어디까지나 필자가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모든 스타트업 혹은 대기업의 문화와 기획자의 역할을 대변할 수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기획자'라는 직무를 가지고 대기업과 스타트업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작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시작에 앞서 다시 한번... 필자는 정확히 스타트업에서 기획자로 일한 것은 아니다. 대신 여러 스타트업들에 투자하고 있고 그 스타트업들이 스스로의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했던 벤처캐피털 회사에서 일하면서 종종 있었던 스타트업들의 기획, 마케팅 등의 업무 지원(?)을 바탕으로 느낀 것을 이 챕터에서 다루려고 한다.
스타트업 기획자의 어깨는 매우 무겁다. 자신의 기획이 곧 회사의 전략이 되고 자신의 선택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회사의 명운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은 초기 투자를 받은 상태라 하더라도 안정적인 수익을 거의 얻지 못한다. 이 단계는 앞으로의 수익 모델, 안정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준의 수익 모델을 만들어 가는 단계이다. 여기서 스타트업들의 운명이 보통 정해진다. 안정적인 수익 모델을 만들고 그 수익 모델을 가지고 다른 투자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 스타트업은 성장한다. 하지만 애매한 수익 모델밖에 가지지 못했다면 추가적인 투자를 끌어오지 못해 결국 망하고 만다. 여기서 기획자의 '엣지(Edge)'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인사이트, 자신의 수익 모델을 만들어 내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투자자에게 설득하는 능력이 이 '엣지'에 포함된다. 문제는 어려운 '엣지'를 한 명의 기획자, 혹은 5명도 되지 않는 작은 기획자 그룹이 해내야 하는 것이다. 혹여나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을 때, 왜곡된 고객 반응을 맹신하고 있을 때 자신을 바로 잡아 줄 사람이 없다. 오롯이 혼자 수익 모델을 짜고 검증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깨는 무겁고 머리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스타트업 특성상 한 번 큰 실수를 저지르고 나면 복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당장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획자의 오판이 스타트업 식구들을 한 방에 실업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중요한 전략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스타트업의 기획자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소수의 기획자로 일하는 장점도 있다. 오롯이 자신의 생각대로, 혹은 소수의 팀원들 생각대로 회사의 전략을 유연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기획자로서 하나부터 열까지, 큰 주제에서부터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본인이 직접 기획할 수 있다는 것은 힘들기는 하겠지만 기획자로서 성장하는 데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대기업 기획자는 보통 자신의 분야 하나에 특화되어 기획할 가능성이 높다. 워낙 다루는 기획의 스케일이 크다 보니 자신의 작은 부분 하나도 케어하기 벅차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의 전체 프로세스를 경험하기보다는 그 일부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한 분야의 전문가는 되기 쉬우나 기획 전반, 수익 모델을 처음부터 끝까지 짜보는 훈련은 쉽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스타트업에서 성장한 기획자는 기획의 전반적인 과정을 다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큰 시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에 비해 스타트업은 신경 쓸 것이 적다. 먼저 고객 층이 대기업만큼 다양하고 크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작고 깊은 기획으로 고객들의 욕구를 자극하는 전략을 기획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신경 쓸 것은 주 타깃으로 하는 고객과 회사의 역량 수준 정도일 것이다. 이것만으로 벅찬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처럼 사업의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반면 대기업의 경우 신경 쓸 것이 매우 많다. 거시경제는 물론이고 국내외, 사내외 정치적인 상황까지 고려해야 하며 의사결정 한번으로 실직할 사람들의 수 등등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그 결과 대기업에서 기획자로 일하는 동안에 오롯이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전략만을 고민하기는 쉽지 않다.
대기업에서 약 1년 동안 기획자로 일하면서 느낀 것은 그 규모가 커도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스타트업 혹은 반반 기업에서 일할 때와는 달리 대기업에서 조 단위 사업을 기획하게 되자 신경 쓸 것이 너무도 많았다. 예를 들어 환율이 조금만 변해도 흑자 사업이라고 생각했던 사업이 갑자기 적자 국면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 또 미중 무역 전쟁의 향후 진행 상황에 따라 투자의 내용이 완전히 바뀌는 상황도 매일 같이 발생한다. 거시경제의 흐름이 사업에 직결되고 기획자는 그 모든 것을 고려해 회사의 전략을 짜야한다. 스타트업의 기획자로 일할 때는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대기업의 기획에서는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또한 고객층도 대기업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 복잡한 것을 심플하게 가져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례로 필자 생각에는 '왜 저런 적자 제품을 아직도 생산하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전략을 고민할 때 그 제품을 과감히 없애자는 전략을 제안했다. 그러나 선배들에게 그 제품의 내막을 들으니 쉽게 없애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먼저 그 제품은 거래하는 회사에서 특별히 요구하는 것이었고 그 회사는 우리의 흑자 제품을 제법 많이 사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적자 제품을 단방에 없애면 그 거래처와의 관계가 애매해질 수 있었다. 또한 그 제품을 없애면 그 제품과 관련해서 일했던 직원들의 거취도 문제가 된다. 물론 큰 기업인 만큼 다른 곳에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겠으나 그들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내 펜 끝에서 나온 글자 몇 개로 자신이 일하던 곳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나니 생각해야 할 것이 이미 뇌의 용량을 넘어서 버렸다. 스타트업에서 일할 때에는 그래도 칠판에 정리해 가면서 팀원들과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의 고민들이었다면 대기업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사업의 감을 키우기 위해서는 스타트업에서 기획자로 일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업 기획의 전반적인 프로세스를 경험하고 그 요소 하나하나에 자신의 고민과 결정들이 들어가고 그것에 따라 고객과 회사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게 된다면 기획자로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분야의 전문적인 기획자가 되기에는 다소 부족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제품 기획 쪽을 전문적으로 파고 싶은 기획자인데 자신이 집중하고 싶은 분야에 쏟는 시간보다 다른 일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소수의 기획자가 모든 사업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전문성을 쌓기 어려울 수 있다.
반면 대기업 기획자는 너무도 큰 기획을 하는 나머지 자신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길을 잃을 때가 많다. 가끔 몇 가지 결과들을 보고 기획의 방향을 찾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스타트업 기획자와는 달리 사업의 '일부' 프로세스만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업의 일부만을 심도 있게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쌓기 더 용이하다. 예를 들어 중국 쪽 거래선들의 전략만을 심도 있게 분석하는 작업을 담당할 경우 추후에는 중국 거래선 전문가로 성장할 여지도 있다. 이는 자격증은 없지만 분명 자신만의 영역, 자신만의 전문성이 쌓이는 것이다. 사업의 전반적인 프로세스에는 다소 둔감할 수 있으나 한 분야에서 만큼은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다. 또한 직급이 올라갈 경우에는 점점 더 큰 단위에서 사업 기획을 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마치 스타트업의 기획자처럼 사업의 전반적인 프로세스에 대해 고민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대기업 기획자의 장점인 것 같다. 회사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몇 십년을 유지해온 시스템 속에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기획자에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둘 중의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성장하는 방향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스타트업 기획자는 좀 더 오밀조밀하게 사업 전반의 프로세스를 다룬다면 대기업 기획자는 큰 규모의 사업과 수많은 경제, 정치적 변수들을 바탕으로 큰 전략의 일부분을 다룬다. 다시 말하면 스타트업 기획자는 큰 틀에서 시작해 작은 부분으로 들어가는 기획을 배운다면 대기업 기획자는 작은 부분에서 시작해 큰 틀을 기획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스타트업 기획자는 사업 기획 프로세스의 틀을 먼저 배우고 대기업 기획자는 세부적인 기획 및 분석법을 먼저 배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스타트업에서 먼저 일한 뒤에 대기업으로 가서 일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그런 케이스이다. 필자처럼 스타트업에서 사업 전반 프로세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대기업 기획자로 일 했을 때 장점은 앞서 말한 대기업 기획자로서 가끔 길을 잃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잊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전반적인 사업 프로세스를 경험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지금 어디쯤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구나 감을 잡기도 비교적 편했고 만약 내가 의사결정권자였다면 어떤 판단을 했을까 고민해 보는 것 역시 스타트업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다. 마치 큰 게임을 하기 전에 튜토리얼을 통해 작은 단위 게임에서 먼저 게임 전반적인 것을 배우고 큰 게임에 들어간 느낌이라고 할까?
마지막으로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적 사견이므로 다른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의 시각 역시 맞을 것이다. 이 글은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정보라도 제공하고 싶은 취지의 글인 만큼 '아, 이렇게 느끼면서 일하는 기획자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진로 고민에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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