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는 짧게 말한다
PPT로 기획서를 만들다 보면 글이 너무 많아 힘들 때가 있다. 그렇다고 글을 줄이자니 혹여 내가 말하려는 의도가 잘못 전달되지는 않을지, 글이 너무 없어 내용이 없어 보이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그래서 결국은 글이 많아지고 PPT 장표의 대부분을 글 또는 글의 근거 역할을 하는 그림이나 그래프로 가득 채우게 된다. 여백은 어느 정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장표에 빈틈이 없다. 숨이 턱턱 막힌다.
그렇다고 글과 콘텐츠들을 드러내고 나면 스토리가 뜨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비어 보여 자칫 열심히 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받을까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최종본으로 나가는 것에는 글이 좀 많다. 그게 보통 기획자들이 만드는 기획서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한 번은 필자가 기획서 초안이라고 선배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말은 초안이었지만 실제로는 최종본에 가까웠다. 사실 필자는 거기서 더 이상 고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초안이자 최종본을 본 소감으로 "내용은 좋은데 글만 좀 요약하면 되겠다. 안 써도 되는 말이 많네."라고 했다.
"안 써도 되는 말?" 이미 몇 번이고 고친 터라 다듬을 곳이 없다고 생각한 기획안에 안 써도 되는 말이 많다니... 처음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획서를 처음부터 두 번 더 읽자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직관적으로 만든 PPT 장표임에도 구구절절 설명이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전에 고치면서 수도 없이 봤던 장표인데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타인의 피드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모두가 이미 알고 있을 법한 내용을 설명하는 데에 너무 많은 공간을 할애했던 것이다. 난 곧바로 2~3 문장이나 되던 글상자를 3개의 단어로 줄여버렸다. 그럼에도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한참을 줄인 뒤에 다시 선배에게 가져가자 선배가 말했다. "훨씬 이해하기 쉬워졌네. 쓱 봐도 머리에 꽂혀." 설명을 줄였는데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니. 이번 경험을 통해 한 번 더 심플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Simple is the best!
덜어내는 것은 써내려 가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써 내려가는 동안에는 내 생각을 빈틈없이 만들어 갈 수 있다. 독자가 행간의 이해를 할 필요도 없이,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못할 만큼 치밀하게 기획서를 쌓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기획서를 만들 경우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줄 수밖에 없다. 또는 일종의 위압감을 주기도 한다. 독자는 이런 기획서를 읽으면서 절대 편할 수 없다. 오히려 불편하고 좀이 쑤신다. 집중도 되지 않고 일정 시점에서는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기획안들이 클라이언트들 손에서 그렇게 떠나간다.
이런 답답함과 위압감을 주는, 마치 창문 하나 없는 콘크리트 건물 같은 기획서에 창을 내고, 인테리어와 외관 공사를 하고, 최종적으로 사람들을 맞이 하는 작업을 해야 기획서가 완성되는 것이다. 즉 빼곡히 적어 내린 글들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걷어내는 작업을 작업은 혼자서는 쉽지 않다. 본인이 만든 기획서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처음 수정할 때 이미 다 걷어냈을 것이다. 1차 수정을 마쳤다면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며 의견을 구하라. 특히 복잡한 부분에 대해서 물어라. 자신의 기획서를 처음 본 사람의 의견에서 의외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이 복잡하다고, 불필요하다고 말한 부분은 덜어낼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반대로 너무 내용이 없어 이해가 힘들다는 부분은 역으로 채워줘야 하는 부분이다.
피드백을 받은 뒤에는 기획안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읽어보아라. 이때 팁이 있다면 필자의 경우 PPT 4장이 한 페이지에 나오도록 인쇄를 해 읽거나 파워포인트의 여러 장 보기 기능을 통해 다시 되돌아본다. 이럴 경우 전체적인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어 필요 없는 장표들을 덜어낼 수 있다. 여기에 주변인들에게 받은 피드백을 반영해 수정하다 보면 몰라보게 글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고수의 기획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고민하고 수정해서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그럼에도 안의 내용만큼은 풍성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불필요한 글들과 콘텐츠를 삭제함으로써 오히려 정말 중요한 내용들이 돋보이는 그런 기획서가 좋은 기획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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