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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콕 Oct 29. 2022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에 기회가 있다

창의성

“유령이 나올 것 같네.”          


말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학생 세 명이 학교의 후문을 걸어 나가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둠으로 짙어져 가는 하늘에 석양의 그림자를 품은 구름이 가득했다. 공포영화의 첫 장면에 나올 것 같은 하늘이었다.           


유령교수가 떠올랐다.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 만났던 교수다. 유령교수는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제 내가 그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4층에 도착했다. 405호. 문 옆에는 나의 이름이 있었다. 교수 연구실이라는 글자와 함께. 교수가 된 것을 실감했다. 나는 미묘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라는 기대감도 있었고, 치열한 현장을 떠나 혼자만의 골방으로 숨어 들어간다는 자괴감도 있었다. 젊은 나이에는 교수라는 직업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한 선망은 있었던 것 같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내가 중학생 때 장래 희망에 교수라고 썼다고. 그때는 물리학 교수를 말했던 걸 거다. 그 당시에 나의 꿈은 물리학자였으니까.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전에 회사를 경영할 때 나의 방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달랐다. 익숙한 듯하면서 낯설었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멀리 서울타워가 보였다. 가까운 쪽을 내려다보니 대학교 건물 옆으로 개발되지 않은 옛집들과 개발되어 높이 솟은 아파트가 섞여 있었다. 옛집과 아파트라는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 예술대학교와 묘하게 어울리는 경치라고 생각했다. 유령교수와 긴 대화를 나눴던 작은 카페는 사라졌다. 아파트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에 기회가 있습니다.”          


놀라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틀림없는 유령교수의 목소리였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유령교수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큰 기대는 없었다. 대학원을 다닌다는 것이 학위를 갖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학위가 내 인생에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학원을 오게 되었다. 하필이면 이 바쁜 시간에. 나는 영화를 제작하는 일에 온통 빠져 살고 있었다. 내가 대학원을 다니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영화를 만들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말이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고 봐야 할 시나리오와 영화와 책도 많았다. 


“대학원을 다녀보면 어때?” 아내가 말했다.


“왜? 갑자기?”


“하는 일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도 있고, 혹시 나중에 학위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


“지금은 바쁜데?”


“그러면 영원히 못 다니지.”          


영원히 못 다닌다는 말이 쏙 들어왔다. 이 일을 하면서 한가한 날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상황이 마련되지 않을 때는 저지르고 보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결국 나는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창의세미나. 이 수업도 첫 시간에 와서 교수님께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다. 수업에 좀 빠지더라도 이해해 주기를 부탁해야 했다.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회사 일이 바빠지게 되었다. 일하며 대학원을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결국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대학원을 들어올 때 절대 휴학은 하지 않고 졸업논문까지 연이어 끝내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강의실 호수를 확인했다. 여기가 맞다. 뒷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옛날 버릇이 나와서 피식 웃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난 뒷자리에 앉는 것이 좋았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매달 1일에 자리를 바꾸는데 학생들이 원하는 자리에 앉게 했다. 성적순으로 학생에게 자리를 고르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방법이다. 3학년 때 제일 뒷자리 중에 짝이 없는 자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늘 나의 자리였다. 처음에 거기를 앉다 보니 우리 반 아이들도 원래 그 자리가 내 자리라고 생각하고 비워두었다. 그게 아직도 내게 익숙하다니.      


“강의 들으시는 분이시죠?”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검정 앞치마를 두른 젊은 남자가 내게 다시 물었다.          


“강의 들으시는 분, 맞죠?”


“네.”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그 남자는 손짓을 하더니 걸어 나갔다.          


무슨 이유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그 남자는 가버렸다. 나는 가방을 둘러메고 따라 나갔다. 그 남자의 발걸음은 몹시 빨라서 따라잡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후문을 지나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낡은 집들 사이로 난 작은 골목 사이로 따라갔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주변을 살필 틈도 없이 그 남자를 쫓아가기 바빴다. 골목 옆 화단에 작은 고양이가 있었다. 아주 귀여웠다. 나를 가만히 보더니 휙 하고 화단 사이로 사라졌다. 아쉬워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골목에 나밖에 없었다. 내가 귀신에게 홀렸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소리가 들렸다.  


“이쪽입니다.”          


그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작은 카페가 있었다. 간판도 없고 문에 적혀있는 ‘우쥬’라는 글자만이 가정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반면에 호기심도 생겼다.     

    

카페를 들어갔다. 희미한 불빛으로 보이는 내부는 매우 작았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데리고 온 남자는 이미 카운터 안쪽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저기요.”           


나의 목소리에 그 남자가 나를 보았다. 그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나를 보고는 말없이 카페의 구석으로 고갯짓했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아까는 왜 보지 못했을까? 검정 재킷과 검정 셔츠를 입고 있어서 순간 눈에 띄지 않은 것일까? 구석의 남자는 머리를 테이블에 거의 닿을 듯이 숙이고는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교수님?” 젊은 남자가 구석의 남자를 불렀다.          


교수라는 말에 나는 놀랐다. 구석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굉장히 하얘서 또 놀랐다. 그가 입고 있는 검정 옷이 흰 얼굴을 더 하얗게 보이게 만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하얀 얼굴만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유령 같았다.           


교수는 학점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수업 마지막 날에 스스로 받으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학점을 얘기해주면 그대로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교수는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짓고는 맥주를 마셨다. 잔이 빈 것을 보고 내가 술을 따르려고 맥주병을 들었다.


“각자 편하게 마십시다.”           


교수는 땅콩을 집어 먹고 난 뒤에 자신의 잔에 맥주를 부었다. 나도 내 앞의 빈 술잔을 채웠다. 교수가 말했다.          


"창의세미나는 창의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간단하게 얘기 나눠도 좋습니까?" 


"네. 좋아요."


“창의세미나에는 첫 번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질문이죠?”


“창의적 사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게 그 질문입니다. 혹시 이 질문에 대표님은 답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영화제작사의 대표라고 밝힌 뒤부터 교수는 꼬박꼬박 대표님이라고 나를 불렀다. 늘 불리는 호칭이지만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교수가 그렇게 부르니 약간 부담스럽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창의적 사고를 위해서는 경계에 서야 합니다.” 


“경계요? 이쪽저쪽의 가운데 경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에 기회가 있습니다.”


“알 듯하면서도 잘 모르겠어요.”


“다음에 오실 때까지 생각해 보세요. 다음 주든 그다음 주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늘 여기 있겠습니다.”           


교수는 나를 보며 미소 짓더니 술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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