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의 여행 이야기
아주 어릴 때였다. 바로 옆 아파트라도 가려면 한참이나 걸어야 했던 6살. 그 짧은 다리로 모험을 떠났다. "원앙아파트 놀이터에 4명이서 타는 자전거 기구가 있대." 아파트 단지 두 개를 지나 4차선 도로를 건너고 다시 아파트 두 개를 가야 하는 거리. 지나가다 얼핏 들은 한 마디에 동네 친구들을 모았다. 마치 반지원정대처럼.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다. 낯선 아파트가 주는 풍경은 생경했다. 처음 보는 주민들 다른 옷을 입은 경비아저씨. 항상 보던 친근한 것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최대한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인 척 놀이터에 진입했다. 4명이서 타는 자전거가 있었다. 우리 아파트에선 볼 수 없는 근사한 놀이기구였다. 놀이기구를 타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엄마한테 꾸중들을 생각에 돌아가는 길에 똥줄이 탔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것은 짜릿한 일이었다. 내 힘으로 세상을 넓혀나갈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 스타크래프트에서 초반에 일꾼으로 정찰을 가며 지도를 밝히는 것처럼 어두웠던 세상에 발길이 닿자 서서히 밝아졌다. 그곳에선 다양한 것들이 튀어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 특이한 건물, 근사한 공원. 랜덤박스에서 어떤 게 나올지 모르는 기대처럼 새로운 곳에는 기대와 우려로 묘한 긴장이 있었다. 이 세상엔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이 있을 거란 기대는 그후로 날 설레게 했다.
세상 모든 곳에 발자국을 남기겠다는 야망으로 돌아다녔다. 시작은 살고 있는 구리시를 중심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10km 거리의 강변역을, 다음에는 소풍으로 가는 대학로, 그다음 소풍이었던 삼성역, 재미로 의정부까지. 닿을 수 있는 거리는 모두 자전거로 내 자취를 남기고 싶었다. 아니 내 눈에 지나치는 모든 풍경을 담고 싶었다.
모르던 것들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강변역으로 향하던 길에 있던 비포장도로의 울퉁불퉁함, 삼성역 가는 길에 무모하게 건넜던 반포대교, 잡초가 인도를 모두 침범해버린 의정부 가던 길의 인도. 그런 풍경들은 태어나서 처음 접해보는 새로운 것들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의 발견이었다.
여행은 항상 고단했다. 터미널부터 시작해 시장, 주택 골목길까지. 중국 싹쓸이 어선처럼 밑바닥부터 천천히 지역의 모든 것을 훑었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로.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야 지역의 특성을 조금이나 알 수 있었고 첫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걷기 혹은 자전거. 몇 시간을 걸어 겨우 관광지 한 개만 방문했을 뿐이다. 그렇게 날이 어둑해지면 숙소로 들어갔다. 시장, 골목, 길거리, 주민들. 언어로 표현하면 별 거 없어 보이는 여행이다.
선을 그리는 마음으로 여행한다. 듬성듬성 끊어진 점선이 아니라 곧은 선이 이어진 실선으로. 유명한 관광 포인트를 찍고 차에 올라타고 다시 포인트를 찍고 또다시 차에 올라타는 게 보통의 여행 방식일 거다. 이렇게 여행을 한다면 관광하는 장소의 연속성이 사라져 여행이 점선으로 기억될 것이다. 대신 여행은 그 장소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길과 건물 그리고 사람들이 종합적으로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 같다. 그런 종합적인 이해 위에서 관광 포인트의 의미도 풍부해진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자주 가는 장소조차 듬성듬성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와 회사는 그저 버스 몇 번과 지하철 몇 정거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여정 동안 우리는 무엇을 지나치는 걸까. 매일 지나치는 학동역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 매일 2번씩 들으면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지만 과연 그곳은 어떤 곳일까? 지나쳐오는 거리에 대한 정보가 없는 끊어진 세계는 우리 삶의 연속성을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학교와 집, 회사와 집을 오가는 단순한 삶을 산다. 끊어진 공간을 이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지금처럼 단조롭지는 않을 거다. 물론 문제는 시간이다.
여행의 목적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일 테다. 새로운 장소를 보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새로운 것을 접하는 방법으로 나는 실선 같은 여행이 더 큰 의미를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명한 장소와 음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오는 게 여행의 목적은 아닐 거다. 똑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천천히 지역을 돌아보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그 장소를 느낀 후 먹는다면 그 음식의 깊이는 다를 것이다. 선을 그어간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걸어나가는 것, 그럴 때 비로소 장소는 생생하게 살아난다. 길에서 더 많은 여행자를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