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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우 Jun 28. 2020

무연고 도시에 산다는 것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것, 다들 그렇게 살아온 것

"주말에 논산 이모네서 외가 식구 모이는데 너도 올래?"


여수에 온 뒤로 엄마와 전화가 잦아졌다. 같이 살 때보다 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전화를 하다 엄마가 논산에서 보자는 제안을 했다. 엄마가 있는 경기도 구리와 내가 있는 전라남도 여수의 중간지점으로 논산이 된 것이다. 물론 논산은 엄마의 고향이고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둘째 이모가 할머니를 모실 겸 논산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모가 꾸려놓은 콘테이너식 별장이 있어 그곳에 친척들이 모이기로 했다.

   

여수에 온 지 2주가 지났다. 첫 번째 주말은 여수에서 온전하게 보내기로 했고 두 번째 맡는 주말은 딱히 계획이 없었다. 서울은 당분간 가지 않겠다는 괜한 고집으로 서울은 가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가 제안한 논산은 괜찮은 선택지였다. 주말 동안 여수에서 할 게 없었다. 거기다 여수엑스포역에서 전라선 기차를 타면 논산역까지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거리상으로도 그렇게 부담되는 곳은 아니었다. 취업도 했겠다 외가 친척들에게 취업 인사라도 할 겸 논산으로 가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 간단하게 짐을 싸고 여수엑스포역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전라선은 고속화가 안돼 전주까지는 ktx나 무궁화호나 시간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 논산까지는 ktx를 타면 2시간, 무궁화호를 타면 2시간 20분이 걸렸다. 반면에 가격은 무궁화호가 ktx의 절반이었다. 더 저렴한 무궁화호를 끊고 논산역으로 향했다. 논산으로 가는 기차 안은 따듯한 애정을 주는 가족들과 논산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마주하러 가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논산에서의 추억


논산역은 오랜만이었다. 군생활을 논산에서 했다. 휴가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논산역을 거쳐 집으로 향했다. 돌아올 때는 물론 최악의 공간이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논산역을 찍어 군대 동기였던 화림이에게 보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논산역을 구경하다가 마중 나온 이모부 차를 타고 이모 댁의 컨테이너집 텃밭으로 갔다. 


가족들이 반갑게 반겨줬다. 여수로 간 지 고작 2주일밖에 안됐는데 엄마와는 몇 달이라도 못 본 사람처럼 극적인 상봉을 했다. 


"밥은 잘 먹고 있니."

"먹고 싶은 건 없니."

"회사 생활은 할만하니."


엄마는 아직도 둘째 아들이 걱정이었나 보다. 힘든 게 있어도 엄마한테는 힘들다고 할 수가 없다 항상. 군대 생활에서도 그랬고 그냥 언제나 그랬다. 실제로 못 참을 정도로 힘든 건 없었으니까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엄마와의 극적 상봉을 마치고 취업하고 처음 보는 이모들과 할머니에게 축하의 인사를 받았다. 외갓집에서 제일 먼저 취업하고 하고 싶은 직업을 찾아갔으니 대견하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엄마는 그걸 받고 한술 더 떠서 아들 자랑을 추가했다. 그러면 이모들이 "언니만 아들 있냐! 우리 아들도 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항상 반복되는 레퍼토리 중에 하나였다. 



오랜만에 시골에서 여유를 느꼈다. 취준생 때는 논산에 올 엄두도 못 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시골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모네 텃밭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흙냄새를 맡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잡다한 생각 없이 채소를 뽑고 흙을 털었다. 당장 눈앞의 해야 할 일들만 생각하니 그동안 쌓아뒀던 고민들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딱 하루 정도는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시골은 해가 빨리 졌다. 5시도 안됐는데 벌써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사그라들어갔다. 컨테이너 마당에 숯불을 피웠다. 불의 기세가 잦아들고 잔잔한 온기를 내뿜을 때 고기를 올렸다. 고기는 천천히 숯불향을 입으며 익어갔다. 사람이 많으니 고기도 많았다. 연기를 피해 가며 잠시 고개를 들으면 청량한 시골 하늘이 보였다. 잠시 하늘을 보며 멍을 때리다 다시 고기를 구웠다. 고기를 굽다가 주워 먹다가 맥주를 먹다가 소주를 먹다가, 숯불을 피우면 약간 정신은 없어지는 게 있다. 그러다가 피곤해서 술을 조금 마시다 일찍 잤다. 



연고가 주는 안정감

다음 날 느지감치 일어나 이모네 강아지와 동네를 산책했다. 논산 시골 모습은 어디나 비슷했다. 할머니 집 근처나 이곳이나 온통 논밭이었다. 논산은 나에게 시골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어렸을 때부터 두어 달에 한 번은 논산에 갔으니 나에게 고향과도 같은 곳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논산 육군훈련소에 가서도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됐다. 행군을 하며 보는 풍경이 어려서부터 보던 논산의 농촌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혼자 와있지만 그럼에도 이곳 논산은 가족들과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그런 기억들이 스쳐가면 많이 외롭지는 않았다. 혹시나 행군하다가 할머니를 볼 수 있을까 주위를 열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머니 집이랑은 너무 멀어서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다. 논산에 자대 배치를 받아 2년 동안 생활할 때도 논산이라서 적응하기 더 수월했다. 외박을 나갈 때도 대전에 있던 둘째, 셋째 이모집에서 잘 수 있어서 편했다. 성인이 돼서 겪는 가장 낯선 환경인 군대이지만 논산에 대한 기억과 주변 친척들 덕분에 별 탈 없이 지나올 수 있었다. 연고에 대한 애착 혹은 지역에 대한 애정이라는 게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무연고 도시에 산다는 것

돌아갈 시간이 돼 친척동생과 논산역에 갔다.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생은 호남선인 광주행 itx를, 여수로 가는 나는 전라선인 무궁화호를 타야 했다. 다행히 논산은 두 노선이 모두 지나갔다. 광주행 기차가 먼저 도착해 동생을 배웅했다. 언제 광주에 한 번 가겠다고 말하며 작별을 했다. 잠시 후 여수행 기차가 왔다. 다시 무궁화호의 적응 안 되는 진동에 올라탔다. 좌우로 흔들리며 논산을 벗어났다. 


나는 어쩌다 여수에 왔을까.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낯설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나는 왜 있는 걸까. 여수에 살게 된 것은 물론 꿈을 쫓아온 나의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여수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의 기분은 공허함이었다. 나를 반겨주는 것이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반겨주는 게 꼭 사람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익숙한 공간, 기온, 생활패턴 등 나를 안정감 있게 지탱하는 기반이 없었다. 아직 여수에 산 지 2주밖에 되지 않아서 익숙한 것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연고는 어떻게 생길까

'뿌리를 내린다'라는 표현이 있다. 어딘가에 정착할 때 쓰는 표현이다. '뿌리'는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에서 경험한 다양한 기억들이 사람을 도시에 단단하게 지탱할 수 있게 해 준다. '기억'을 도시 곳곳에 뿌리는 것이다. 내 고향 구리에, 대학을 다니던 서울에, 부모님의 고향인 논산과 부산에는 주변을 둘러보면 밟히는 기억들이 있다. 그런 기억들이 내가 이 도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과거의 기억들이 지금의 연고를 만드는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든 부모가 경험하고 말해준 경험이든 도시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들이 도시에 애착을 느끼게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연고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것, 다들 그렇게 살아온 것

구리에서 살다가 대전으로 이사 간 친척동생은 재수를 하고 광주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동생은 구리를 떠났을 때부터 서울에 대한 갈망이 강했다. 대전에서 구리에 있는 우리 집으로 놀러 와 혼자 서울로 잘 돌아다녔다. 서울에서 뭐를 했냐고 물어보면 싱거운 답변이 돌아왔다. 


"강남 엔제리너스에서 사람 구경했어."


연고가 있던 서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친천동생에게는 꽤 오래 지속됐던 것 같다. 그러니 서울에서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나가는 사람만 봐도 괜찮았던 것이다. 그런 동생이 이제는 대전을 거쳐 광주에서 살고 있다. 이제 동생에게 대전은 고향이다. 광주는 낯설었지만 조금은 익숙해진 도시다. 동생은 여러 도시를 거치며 무연고도시에서의 경험을 했고 이제는 낯선 환경에서 잘 적응하는 사람이 됐다. 언젠가 '뿌리'를 내릴 거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메마른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거친다. 현대 사회에서는 고향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을 사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 부모님, 친척들 모두 고향과 다른 곳에 살고 있다. 무연고 도시에 정착하는 과정은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일인 것이다. 언젠가는 뿌리를 내릴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천천히 무연고 도시에서 기억들을 만들어간다.


PS.

부산 사람인 아빠는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다 논산 훈련소에 왔다. 너무 힘들어서 논산 방향으로는 처다도 안 보겠다고 했는데 논산 사람인 엄마와 결혼해 다달이 논산에 오게 됐다. 심지어 두 아들 모두 논산에서 군생활을 해서 면회와 외박도 논산으로 왔다. 이제 아빠는 논산 정도는 네비를 안키고도 잘 다닌다. 바다사람이 논농사도 제법 한다. 논산 사람이 다 됐다. 그렇게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논산은 아빠에게 연고가 있는 곳이 됐다. 그렇지만 아빠와 논산의 너무도 기구한 관계는 '연고'라기보다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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