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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야! 넌 정체가 뭐니?

모호한 정체성의 경계

by 진인사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다. 멀티 페르소나라고 하는데 요즘엔 '부캐'라고 부른다.


집에서는 딸에겐 아빠, 아내에겐 남편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회사에서는 팀장, PL, 설계자, 개발자 등등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부여되는 역할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사람이다. 최근에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다 하려면 죽도 밥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지만 한 가지 역할만으로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 어렵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길 원했다. 내가 원하는 읽고 쓰는 삶을 위해서 결국은 또 다른 역할 추가가 필요하다. 멀티태스킹이 안된다면 어쩔 수 없이 빠르게 태세전환을 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몇 년 전 개와 새를 합성한 이미지가 '개새'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비속어로 들리는 이 단어를 제목으로 클릭을 유도하면 개와 새를 합성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식이었다. 유명세에 힘입어 한 스타트업에서 3D프린트 기술을 이용해서 개새 피규어를 클라우드 펀딩으로 판매해서 대박이 났다. 어쨌거나 개도 아니고 새도 아니거나 개이기도 하고 새이기도 한 정체불명의 존재가 탄생했다.


소장하고 싶게 만드는 귀엽고 창의적인 외관에 유명세를 더하여 네 마리를 분양받았었다.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와서 바라보면 이 녀석들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자신을 개라고 생각하는 녀석과 새라고 생각하는 녀석이 있을 것이다. 개도 새도 아닌 개새라는 별도의 독립적인 개체라고 생각하는 녀석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따라 개도 되고 새도 되는 유연한 생각을 하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은 누군가로부터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정의하는 대로 각자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모호한 정체성의 경계에 서있을 때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를 정의하고 정체성을 찾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가 될지 새가 될지 개새가 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될지 결정만 남았다.



2016년 텀블벅을 통해서 분양받은 네 마리의 개새들을 소개한다. 왼쪽부터 시베리안 허새, 퍽새, 팽견, 리트리버-드라고 부른다. 개와 새의 합성사진은 그 이전부터 인터넷 짤로 사용되었는데 실물로 영접할 수 있다는 소식에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네 종류 외에도 다양한 종의 개새들이 추가로 만들어졌고 몇 차례에 걸친 클라우드 펀딩으로 수많은 개새들이 분양되었다고 한다.

리트리버-드는 장난기 많은 눈빛과 귀여운 얼굴을 이용해 상대방의 전투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가장 아끼는 개새 캐릭터다.

시베리안 허세는 초점 없는 눈빛과 알 수 없는 사명감을 가진 듯한 인상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얼굴만 보면 잘생김이 묻어있다.

퍽새는 비록 작지만 미간의 주름을 통해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잘못 건드렸다간 오늘 하루가 피곤할지도 모른다.

팽견은 차분하고 점잖은 신사의 풍채를 보여준다. 웬만해서 날갯짓은 하지 않을 만큼 여유 만만한 성격의 소유자다.

개새 사총사는 오늘도 거실 책장 한편에 나란히 서서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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