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소리를 듣는 방법
인지부조화 ; 이성의 잘못된 선택
인지부조화 이론(認知不調和理論)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와 행동 등이 서로 모순되어 양립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가 되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지를 변화시켜 조화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주장의 이론이다.
쉽게 해석하자면,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 양심이 주는 괴로운 감정을 없애기 위해 자기 최면(합리화)을 걸어 '내가 하는 행동은 무엇 무엇을 위해서 한 좋은 일이야!'라고 양심과 이성의 불균형 상태를 없애려는 이성의 선택이다.
양심의 시그널 ; 느낌
양심(良心)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한다. 다만 양심은 인간에게 느낌으로만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이 옳은지 알려주는 긍정적인 느낌과 그것이 그른 것인지 알려주는 부정적인 느낌이다.
무엇을 하려고 할 때 또는 하고 나서 찜찜하거나 기분 나쁜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당신이 하는 것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알려주는 부정적인 신호의 느낌이다.
반대로 흐뭇하거나 기분 좋은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하는 것에 대하여 올바르다고 알려주는 긍정적인 신호의 느낌이다.
양심의 작용 형태 ; 인정, 방어, 거부
양심의 기능은 그 신호를 받아들인 인간에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인정이다. 이들은 사과와 같이 잘못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둘째는 방어다. 이들은 방어기제와 같이 변형시킨다.
셋째는 거부다. 이들은 시간에 의해 인지부조화로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로 나타난다.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내면의 존재가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양심을 찌른다.
인정 ; 성숙한 인격자
첫 번째, 인정은 양심이 알려주는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감정의 고통을 이성적인 생각이 올바른 판단을 내려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도록 생각이 내리는 올바른 선택이다.
그때 지혜롭거나 인지하는 사람은 즉시 올바른 선택을 한다. 아니면 나중에 인정하거나 사과한다.
그렇게 인정을 하면 말이나 행동을 통해 사과를 하거나 피해를 보상한다. 이러한 인정은 불편해서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리적, 철학적 또는 정신적 성숙을 통해 이러한 과정을 의식적으로 인지하여 처리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무의식적인 사람은 그러한 행동이 옳다는 사고방식이 습관으로 형성되어 나타나지만, 논리적이거나 이론적으로 인지하여 의식적으로 명료하게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삶은 올바르게 살 수는 있지만, 타인을 논리적, 체계적으로 자신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이끌어주는 멘토가 되기 어렵다.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사람은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자기 주도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는 성숙함으로 고차원의 인격으로 인생철학이 형성되는 사람이다.
이러한 개념을 형성하는 사람은 체계적인 구조화를 통해 논리적, 이론적 학문과 철학으로 타인을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스승이 된다.
방어 ; 무지(無知)한 범인(凡人)
두 번째, 방어는 양심이 알려주는 불편한 감정을 변형시켜 다른 모습으로 합리화한다. 이는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는데,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상대방에게 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이성이 자존심을 보호하고, 자신을 우위에 놓으려는 거짓되고, 위선적인 선택이다.
무지(無知), 곧 이러한 원리의 지식을 모르는 사람은 분명히 양심이 괴롭기는 한데, 왜 그런지는 모르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감정적으로는 짜증이 나거나 스트레스 압박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방어, 처리, 해소하려는 심리 교란 기술이 방어기제다.
방어기제는 부정, 억압, 합리화, 투사, 승화, 동일시, 퇴행, 치환 등 다양하다. 남 탓을 하는 것은 투사하는 현상이며, 거짓말이나 왜곡도 자기를 합리화시켜 보호하려는 방어기제다. 어떻게 보면 잘못한 것을 합리화시키는 자세는 자기에게 하는 거짓말이요 정신 승리다.
방어기제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재해석하여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들이다. 자신에게 무언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로 일어났는지 모르는데, 불안감이나 죄책감이 든다. 그 압박된 감정을 해소하려는 다양한 방식의 감정 처리, 해소 방법이다. 그렇게라도 대체해야 살겠다는 '감정이 느끼는 고통'의 시그널이다.
방어기제란 한마디로 자기가 잘못해 놓고, 엉뚱한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내는 현상이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내면에서 알려주는 기능이 양심이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에게 손해를 보면서도 양심 고백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양심이 괴롭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죄수들까지도 양심 고백이나 자백을 한다. 그것이 양심의 소리가 가진 기능이다.
양심의 기능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그것이 작동하면 인간은 그것을 처리, 수행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다만 처리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거부 ; 양심에 털 난 인간들
세 번째, 거부는 시간에 의해 인지부조화로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로 나타난다.
양심을 거부하거나 억누르려는 사람은 양심의 기능이 점점 무디어져서 인지하기 어려워지다가 나중에 그 감각을 상실한다. 이들을 가리켜 인지부조화라 한다.
이들도 양심이 알려주는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불편한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이 많다. 부와 권력, 명예와 같은 기득권이 강하든지 아니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강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이 가진 생각이나 선택이 잘못되었어도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파렴치범으로 몰락하는 수치심, 모욕과 치욕을 견디어낼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남들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하고, 또 스스로도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들도 양심이 주는 고통은 동일하다. 그래서 그것을 치환하는 대체재가 있어야 한다. 감정이 주는 고통을 이성이 다른 형태로 바꾸는 선택을 한다. 그래야 감정이 주는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못된 선택을 하는 전형적인 나쁜 유형의 인간이다. 그래서 양심에 털 났다거나 양심을 팔아먹었다고 한다.
'내가 친일파가 된 것은 조국과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방어, 보호해주려고 했던 것일 뿐이야!'
민주주의 투쟁을 하면서 운동권 친구를 고자질하여 팔아먹고, 권력의 시녀가 된 인간이 '내가 독재자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국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이런 식으로 자신이 잘못하고도 그 잘못을 타인에게 상습적으로 뒤집어 씌우는 사람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유형이다.
한마디로 인지부조화란
양심이 알려주는 선행을, 이성(생각)이 왜곡시킨 선행으로 동일화시켜 행동이 가져온 악행을 덮으려는 개수작이다. 그런 왜곡이 반복되면 스스로도 인지할 수 없는 오류를 잘못이 아니라고 빠지는 상태에 빠진다. 그것이 잘못을 인지할 수 없는 부조화의 상태, 곧 인지부조화다.
이런 자기 합리화라든지 타인의 심리를 조작하는 가스라이팅이 인지부조화다. 자기 방어기제의 합리화와 조금 다른 것은 이들은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신념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어기제의 위험성은 그들이 습관적으로 오랜 시간 그런 왜곡을 하므로 무디어지는 데 있다. 그러면 그들 또한 양심의 기능이 떨어져 인지부조화의 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잘못된 신념 VS 메타 인지
그래서 잘못된 신념을 가진 사람들 만큼 무서운 사람은 없다고 했다. 이들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기에 타인을 해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은 옳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나 극편향된 의식을 가진 신념의 사람들이 모두 인지부조화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과 가족은 물론 국가와 인류를 망치는 종족이다.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올바로 아는 것, 이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알고 있는 상태 이것이 진정한 리더요 참된 지식인이며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성자다.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다. 자기도 모르게 인지부조화 상태로 빠지기 쉽다.
성현들은 그래서 하나 같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앎은 훌륭하다고 했다. 그는 그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있으므로 그 모름을 앎으로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그 모름에 대하여 관심이 없으므로 절대 알아갈 수 없다.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였기 때문이다.
'앎은 행의 시작이요 행은 앎의 이루어짐이다'라고 성현은 말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음은 그는 모른다는 것이며,
그 모름을 인지하고, 행으로 실천할 때 그때만이 진정한 앎으로 승화된다.
이러한 앎으로의 승화는 지식을 반드시 재해석하여 피드백하는 과정을 반복할 때 올바른 인지의 단계로 확장되어 나아간다. 이것이 '나'라는 자아에서 확장성을 갖는 '우리'라는 공동체 존재의 개념으로 세계관이 바뀌는 메타 인지다.
이때만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른 차원의 삶으로 승화되어 자신과 타인을 진정으로 이롭게 하는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