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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스쿨 윤정현 Jul 30. 2023

몸짓에서 꽃으로

몸부림은 꽃이 되고픈 욕망의 시그널이다.


남들에 대해 관찰하거나

관심을 주는 것은 드물다.

그들은 나와 상관없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사람은

한 번 스치는 몸짓이며

그들이 인연으로 이어지려면

손짓을 하거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우연은 몸짓이다.

인연은 불러줌이다.

운명은 꽃이다.


우리는 그런 운명을

친구라 한다.

또는 연인이 되고

배우자가 되며

동료가 된다.


몸짓은 외로움이다.

방황하는 영혼이다.

길 잃은 양이다.


길을 모르기 때문에

허공을 향해 공허한

몸짓만 반복한다.


채움 받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인연을 만나기까지

쉼을 허락받지 못한다.


그들의 간절함

문을 두드림

무엇을 찾음은

그것을 허락하는 키다.


우연히 어디를 가거나

누구에게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받음 속에 고마움을 표현함은

그들에게 인연을 허락받는 기회다.


우연은 무관심이다.

인연은 관심의 시작이다.

그리고 관찰이 시작된다.

자신과 맞는 관계인지 점검하는 과정이다.


인연은 모름에서

이제 앎으로 확장된 상태다.

이름을 알고

그의 취향을 알아가고

그의 마음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다시 관찰에서 관심을 보이는 단계다.


관찰(觀察)은 호기심이다.

누구든, 무엇이든 관찰의 대상이 되지만

관심(關心)은 오직 좋아하는 대상에게만 준다.

관(觀)은 단순히 본다는 의미다.

찰(察)은 살피는 단계다.

심(心)은 마음을 주는 단계다.


관심을 주고

관심을 받기 위해

서로를 위한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이

상대를 위해 마음이 있음을 증명한다.


맛있는 것을 먹고

재밌는 것을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심을 보여준다.


그렇게 관계는

좋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서로의 노력으로

오랜 시간 지속된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좋았던 것들의 반복은 당연함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당연함이 되면 시시해진다.

더 위의 단계

더 많은 것들

더 고급진 것들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의 투자를 요구한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그러한 욕망 속에는

이미 좋아함이나 행복한 감정은 없다.


시시함과 무료함은

이제 재미없음을 낳으면서 냉랭해진다.

뜨거웠던 관계는 차갑게 식으면서

관심을 주었던 상태는 무관심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이제 남는 것은

이별이나 별거, 이혼이다.

아니면 비즈니스 계약 관계로만 남는다.

부부도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자녀, 친인척 또는 주변의 시선이나

재정적 여건 때문에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우연으로 만난 몸짓이

이름을 불러주었던 인연에서

꽃으로 연결된 운명이 되었다.


그 운명은 다시

남남이었던 몸짓만 남는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무관심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관심을 주었던 마음이 깡그리 식어버렸는데

거기 어디 좋아함이나 사랑이 남아 있을까?

재미도 없다.

쳐다보는 것도 싫다.

그런데 어떻게 같이 있겠는가?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하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초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만났으며

좋아하였기 때문에 친구가 되었고

연인이 되었으며 배우자가 되었다.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운명이 되었던

그 단계를 다시 밟으면 된다.

무관심에서 다시 관찰을 시작하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 된다.


왜 그들이 식어버렸느냐?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일 뿐이다.

사람의 심리는 멀었던 관계가 가까워지고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좋아함의 강도는 약해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좋아함이 증명될수록 안심하기 때문이다.

안심은 좋은 것 같지만 서로의 틈을 만들면서 노력을 줄인다.

시간과 비용,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 안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증폭되면서

나중에는 아예 손을 놔버린다.

이제는 서로 믿으니까

'나를 좋아하니까'라는 믿음으로

서로를 위한 관심을 주지 않는다.

어제 했던 일들의 무한 반복이다.

의미 없는 일의 반복은 무료함과 공허감을 준다.

정체성의 혼란이 온 것이다.


위기는 결혼하고 신혼의 행복이 지나면서 나타난다.

관심이 사라진 곳의 무관심의 증폭은

결국 자신이 왜 사는지 모를 정체성의 의문을 낳는다.

아내는 무한 살림살이를 반복하는 식모가 된 기분이다.

남편은 돈만 벌어주는 기계가 된 느낌이다.

자식들은 공부하는 기계다.

거기 따뜻함이나 위로, 지지와 칭찬, 고마움을 느낄 수 없다.

모든 인간관계가 모양과 형태만 다를 뿐 비슷하다.


그래서 다시 신뢰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게 먼저 관찰이다.

저 사람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살핀다.

왜 그 일을 하며

어떤 수고로움이 스며 있고

어려울 때, 힘들 때, 아플 때, 좋았을 때를 회상하며

말없이 묵묵히 지켜온 손길을 따라간다.

바로 관찰 일기다.


그 관찰 일기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관심 일기다.

그렇게 수고로움을 아낌없이 쏟은 상대를 위해

관심을 표현한다.

마음을 준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는 마음으로 표현한다.

보이는 마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간과 돈이요.

따뜻하고 편안한 말과 행동들이다.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이 중요하다.

강의를 듣거나 설교를 들은 감동은 하루 간다.

결심은 3일 간다.

스스로 찾아 공부하는 사람은 조금 오래 가지만

혼돈과 방황을 거듭한다.

그래서 전문가가 필요하다.

코치와 멘토를 통한 상담과 코칭은 맞춤형이라 지속된다.

프로에게도 코치가 있는 이유다.


피를 깎는 노력으로는 스스로도 가능하다.

예술계의 장인이나 프로들

스포츠 선수들이나 금메달리스트

이들은 최소한 그 분야에서

10년 이상의 피땀눈물을 쏟아낸 프로다.

하지만 그들도 대부분 스승의 지도를 통해

그 디테일한 노하우를 전수받았기에 가능하다.


기능장이나 재능의 달인도 이토록 어렵다.

하물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는가?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연애를 어떻게 할 때 서로 존중받고 예쁜 사랑을 하는지

그리고 결혼하여 평생 아름다운 사랑을 어떻게 유지하는지

자녀는 어떻게 양육하며

그 아이가 행복하면서도 올바르게 자라나는 것은 어떻게 하는지

이것에 대하여 제대로 배우는가?

그런 공적 교육이 있는가?

커리큘럼이라도 있는가?

아니 그것에 대하여 배움의 필요성이라도 느끼는가?


누구도 배우지 않는다.

가뭄에 콩 나듯 꼭 필요성을 느끼는 일부가 찾아 배우고

책과 인문학 강의를 통해 목마름을 해결하고 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도 될까 말까 하는 과정을

주변에서 주워들은 정보를 가지고 겨우 연명한다.

그렇게 배운 지식으로 무대에서 프로로 성공한 사람이 있는가?

될 수도 없는 일을 삶에 철학에서 적용하려 한다.

가능하기나 할 이야기인가?

그러므로 누구도 인생에서 빛난 삶,

정말 행복과 기쁨, 희열과 사랑이 넘쳐나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스스로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들이 나타나듯

인생의 행복한 삶을 완성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도 드물게는 있다.


이제 전문가에게 배워라!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재능을 배우듯 인생도 배워야 한다.

좋은 친구를 올바르게 사귀는 방법

아름다운 연애를 하는 방법

결혼 생활을 지속적으로 존중과 배려 속에서 하는 방법

자녀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키우는 방법

인간관계를 속박되거나 지배하는 갑을 관계가 아니라

자유롭고 동등한 관계로 살아가는 방법


전문가에게 배우기 싫다면 스스로 노력하라!

단순 주입이나 기억 학습이 아닌

'아하! 그렇구나!' 하는 인지의 단계에 도달하여야 하며

그것은 관찰과 관심의 단계를 지나

가슴이 공감하는 영역의 학습으로 고차원화 되어야 한다.

그 후 언어와 행동으로 반복연습이 지속되고

그 지속됨이 성찰이나 재해석 및 코칭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검증은 자신이 인지한 타인의 지식이

올바르게 이해되

그것이 말과 행동으로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지

성현들의 책이나 멘토를 통해 비교 분석하는 단계다.


이는 이미 내면에 있는 무의식을 통해 내재된 정보다.

하지만 워낙 외적 화려함에 분산된 의식이 잘 감지하지 못하므로

초기에는 외적인 것들을 통해 검증하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검증해 가면서 인지하게 된다.

괴테가 "스스로를 신뢰하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된다."라고

말하였듯 내면의 센서(양심이나 직관)는 섬세해진다.


옳지 않은 일을 선택할 때

그 센서는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하지 말라는 신호다.

옳은 일을 선택할 때

그 센서는 기분이 매우 흡족함을 보내준다.

그것은 옳은 일이니 하라는 신호다.

이러한 정보는 오직 느낌을 통하여 전달된다.

무의식은 언어를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검증이 하나하나 이루어져 간다.

그것이 조각 진리요 파트적인 깨달음이다.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하고

결혼 생활을 하고

자녀를 키우고

인간관계와 수많은 일들을 부딪히면서 이루어지는

그 순간순간의 선택 속에서 가부를 알려준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검증하면서

가치관을 설정해 가는 것이다.

기존 타인의 지식에서 자신의 지식으로 넘어온다.


검증은 수많은 지혜의 선배들이 먼저 걸어간 길이다.

그것은 철학자와 심리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이 기록해 놓았다.

성현들이 먼저 고민하였고

수 만 번의 고통과 번뇌 속에서 수련과 단련을 통하여 깨달은 진리들이

뒤따라오는 후배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아니 반드시 그들도 혼돈을 거치기에 찾아내라고

자신들이 걸어갔고, 찾아내었고, 검증한 것들을 전수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검증한다.

이것이 맞나 아닌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하나에서 만난다.

검증을 거치고 거치면 결국 진리는 하나임을 안다.

모든 사람을 대함은 하나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에서 나와 둘이 되었고

둘이 셋을 낳아 만물이 되었다는 진리.

결국 나 자신을 위해 너를 사랑하는 것이 진실이 될 때

모든 진리는 완성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대가 없이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리를 완성할 때

인류는 하나의 가족 공동체로 인류애를 실현한다.

홍익인간이란 아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할 때 실현된다.

이것이 진리의 마지막 단계 체화다.

몸 안에 내재화되는 단계다.

이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완성되었다.

이성적 판단이 이루어지기 전 단계인

내재된 영혼이 진리를 수렴하여 몸이 먼저 행동한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였다는 것은 진리와 일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이제 인간은 타인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능적, 재능적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적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일이관지(一以貫之)가 완성되는 것이며

괴테가 이야기한 자기 신뢰를 통한 삶의 명확성을 스스로 선택하여 살아간다.


이제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

진리를 실현하는 삶

이타애와 인류애로 살아가는 삶

너와 내가 아닌 우리 모두 하나인 삶

누구에 의해서 또는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보든 안 보든 스스로 올바름을 선택하여 사는 삶

바로 문자적 진리가 몸으로 현신한 상태다.



윤 정 현


관찰은 관심으로 나아갈 때 진리와 가까워진다.

몸부림은 꽃이 되고픈 욕망의 시그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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