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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스쿨 윤정현 Sep 10. 2022

인간은 인식할 때만 행복하다!

옳고 그름을 보는 관점 ; 비교

■ 알아차림의 증거 ; 아! 그렇구나!

인식한다는 것은 알아차린다는 말이다.
이 알아차림은 단순한 지식의 저장으로 나오는 정보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지식이 재해석된 이해를 통해 만들어낸 결과가 알아차림이다.
사람은 알아차림이 일어나면 '아! 그렇구나!'라는 감탄과 이해의 과정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알아차림의 과정은 자의적이거나 또는 타의적으로 만들어진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 오감으로 들어오는 감정의 느낌으로 감각되며, 이것을 이성적 영역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 이해함으로 새로운 관점을 알아차린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기존의 고착화된 고정관념이 새로운 지적 정보를 받아들여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때 사람은 변화를 일으킨다.


■ 세계를 보는 눈 ; 세계관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를 보는 눈이다.
인간은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느냐 보면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문화와 교육, 종교와 정치, 인종과 민족적으로 형성된 지식을 세뇌적, 주입적으로 받아들임으로 형성된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전통과 문화에서 태어나고, 이슬람은 이슬람의 전통과 문화로 태어난다. 또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그것만이 전부요 그것만이 옳다.

태어나서 보니 기독교요 이슬람이요 유대교요 불교였다.
정치적 이념이나 민주주의, 공산주의 이념 또한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는다.
인종 차별을 보라!
자신이 백인이면 흑인을 차별하고, 동양인을 차별한다.
흑인은 또 동양인을 차별한다. 동양인은 동양인의 국가별로 또 차별이 일어난다.
국가적 대립이나 갈등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나라의 역사 관점으로 다른 나라를 재단한다.
올바른 세계관을 통하여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조건 옳고, 타인이나 타국, 타 종교, 다른 이념적 사고관은 무조건 틀렸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가진 세계관이다. 세계를 보는 눈이 성현들이 말하는 올바른 진리의 관점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엽적인 문화에서 만들어진 것을 교육적 세뇌로 주입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공산주의 세뇌나 사이비 종교의 세뇌는 태어나서 보니 그것만이 배운 교육의 전부였다. 다른 것을 비교할 수 있는 지적 판단의 대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태어나서 보고 들은 것을 비판 없이 옳은 것으로 수용한다.
그런데 이런 공산주의나 사이비 종교 이외에도 일어나는 차별들이 모두 이와 같다. 자신이 배운 지역적, 문화적, 국가적, 종교적 지식 이외에 다른 것은 무조건 틀린 것으로 인식하는 잣대가 저절로 형성된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고착된 관념이나 세계관은 특별한 사건이나 문제 또는 패턴의 전환점이 일어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절대적 진리가 되어 거의 바뀌지 않는다.


■ 새로운 세계관의 확장 ; 질문과 공존의 세계관

그럼 이렇게 고착된 세계관을 넘어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렇게 세뇌되거나 저항 없이 주입된 지식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나아간 사람들이 누구일까?
그들이 바로 철학자요 진리의 탐구자들이며, 올바른 역사를 개척하는 시대정신의 선구자들이다. 이들은 자연스레 습득된 청소년기 지식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질문하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아 더 깊고 넓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떠난다.
타인이 주입한 지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의문을 품고, 스스로 지적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더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다양한 책을 읽고, 다른 종교나 강의를 두루 섭렵하며, 스스로 비교할 수 있는 의식의 영역을 넓힌다. 그리고 주입된 지식만이 아닌 자신의 개념으로 정립된 지식, 곧 지혜를 터득해 나간다.

무엇이 옳은가?
왜 인간은 같은 종족인데 싸우는가?
왜 땅을 갈라서 너와 내가 다르다고 하는가?
빗금을 넘어서면 기독교요 이슬람이요 유대교요 불교인데 그 작은 땅에 선을 그어서 종교가 달라지고, 그 조금의 땅 차이로 생명을 죽이는 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누가 정하는가?
왜 기독교만 옳아야 하는가?
왜 이슬람은 다른 민족과 다른 종교를 죽이려고 하는가?
내가 이슬람에 태어났으면 이슬람이 옳은가?
아니 내가 기독교에 태어났다고 기독교가 옳은가?
선택하지 않은 곳에서 태어남으로 그는 악마가 되는가?
선택하지 않은 곳에서 태어남으로 그는 천사가 되는가?
이것이 무지다.

인간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어졌다.
주어져서 태어난 곳이 무조건 옳을 확률은 통계학적으로 극히 미약하다. 모두 자기가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모두가 틀렸다는 증거다. 모두 옳다면 싸우거나 갈등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진리만이 옳다. '다른 것, 다른 문화가 옳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인간은 통계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올바른 지식의 습득을 위해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내기까지 진리의 여행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주어진 곳에서 옳음을 찾아가는 선택을 자유 의지로 행사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세계관이란 인류애이며, 인류가 공존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 무지한 관점의 전환 ; 비교의 경험

너는 틀렸고, 나만 옳으니, 너는 죽어야 하고, 나는 나와 다른 모든 민족과 나라와 종교를 말살하여 살아남아야 하는 그런 이기적인 것이 진리일 수 없다.
그런데 지구상에는 시대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들이 끊임없이 있었다.
나치의 히틀러가 그랬고, 일본의 제국주의가 그랬으며,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은 인도와 아일랜드를 말살하려 했으며, 미국의 인디언 말살이 그랬다.
지금도 중국 공산주의는 그런 무지의 선택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시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가?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가?
이것이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이다.
다름을 배우고, 더 확장된 의식의 견문을 넓혀서 비교할 수 있는 새로운 지적 정보를 통해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이것과 저것의 비교를 통해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제공해보아야 한다.
'내 것은 무조건 옳고, 타인의 것은 무조건 틀렸다'는 관념으로는 의식이 확장될 수 없다. 거기엔 영원한 갈등과 싸움만 있다.

평화와 행복, 조화와 조율, 타협과 협력, 공존과 인류애는 인류가 더 넓은 관점을 확장성의 여유로 나아갈 때 열린다.
태어난 곳이 깨달은 성현처럼 올바른 선택을 한 장소이기는 드물다.
알아차려서 옳을 수는 있다.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그 선택은 너와 나를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자기만을 위한 선택은 이미 거기에서 틀렸다.
선택은 오직 비교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같은 것은 선택할 필요가 없다.
두 개 이상의 다름이 있을 때 선택권은 주어진다.
하나의 문화권에서만 살아갈 때 그는 비교의 대상이 없으므로 자기 것만 옳은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비교하는 경험을 할 때 그는 그 착각의 눈이 처음으로 열린다.


■ 불행과 행복의 관점 ; 비교를 통한 인식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에서 22번 영혼은 모든 인류의 지식을 더 이상 배울 것이 필요 없는 통달한 영혼이었다.
그런데 그는 정작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무지한 존재였다.
아는 것과 그가 경험을 통하여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22번 영혼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지구로 왔을 때 지칠 수 있는 육체를 처음으로 느꼈고, 그때 먹은 피자의 맛이 얼마나 감칠맛이 있는지를 알았으며, 그것이 육체에 힘을 주는 고마운 음식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단풍나무 씨앗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과 사람들이 길거리를 걷는 분주함 속에서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매 순간이 감사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행과 행복을 나누는 관점은 무엇을 이루었을 때(불꽃)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삶이 행복임을 발견하는데 있다고 알려준다.
이것이 체험을 통한 진정한 지식이요 올바른 지식의 인식이다.

이는 또한 현재 대한민국이 선진국과 비교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코로나 19 팬데믹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알 수 없었을 적나라한 민낯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탈을 쓰고, 그동안 얼마나 갑질을 일삼았는지 알게 되었으며, 포장된 시민의식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한국인은 늘 선진국이 아니라는 의식 속에 살았으며, 안전하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대한민국이 얼마나 안전한 나라인지 알게 되었고, 편리하며 또한 타인을 배려하는 선진 시민의식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비교를 통하여 깨달았다.


■ 서양과 한국의 비교 ; 의식 문화의 차이

이러한 비교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그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비교는 자신을 인식하는 위대한 잣대요 도구다. 인간은 이렇게 무엇을 인식할 때 이것과 저것을 구분 짓는 비교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때만이 인식한다.
우리는 이미 선진국보다 나은 선진국이었으며, 안전한 나라였다.
그런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불행하였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통해 비교가 일어났다. 그때 대한민국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면 없던 행복이 나타났는가? 이미 존재했지만 인식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이미 존재하는 행복이 인식하지 못하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식할 때 나타난다.

스웨덴에서 우울한 삶을 살았던 요아킴이 한국으로 유학 왔을 때 한국 문화에 대하여 놀라운 경험을 한다.
한국인들이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자리에 두고, 주문이나 볼 일을 보고 오는데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문화를 서양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들의 반응이 특이했다.
그들의 관점은 들키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훔치다가 들키면 형량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라고 하나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남의 것을 훔치는 행위는 나쁜 짓'이라는 내적 양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양인과 한국인의 의식 문화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한국인만이 가진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를 길이 보존해야 하며, 전 세계인들이 배워야 하는 문화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에서의 정(情) 문화와 홍익인간 문화와 같은 따뜻함을 통해 우울증이 치료되었고, 이제 한국 문화를 알리는 유튜브 홍보 대사가 되었다.


■ 관점의 전환 ; 아하 경험

그는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만을 배웠을 때 그 문화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삶의 다른 차원, 곧 세계관의 확장성을 경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견문을 넓히려면 여행을 하라고 하였듯, 그는 한국으로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 즐기기 만을 위한 단순 여행을 통해서는 바뀌지는 않는다. '왜 차이가 있을까?'라는 관찰과 사색을 통해 그리고 인식하려는 사고 작용을 통해 의식의 확장성은 일어난다.

이러한 인식은 아르키메데스가 말한 '유레카'와 같은 것으로서
심리학에서는 아하 경험(aha experience, 아하 經驗)이라고 한다. '아하!'하고 깨달았다는 의미다.
사람은 생각지 못하였던 부분을 깨달으면 저절로 감탄이 일어난다.

나 또한 한국인만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러한 차이를 특별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요아킴의 영상을 보고 나서야 그런 명확한 비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알아차림은 이렇게 스스로의 경험이나 타인이 경험한 지적 정보를 이해함으로 인식한다.
앞은 직접 경험이고, 타인을 통해 습득하는 것은 간접 경험이다.
직접 체험이 강렬하지만, 간접 또한 공감이라는 가슴의 의식 작용을 통하여 일어나므로 상당한 깨달음과 변화를 가져온다.
간접 경험의 도구로 책이나 강의, 영화나 드라마, 노래와 그림 같은 시청각 자료들이 있다. 하지만 간접 경험의 도구들은 그동안 지엽적으로 주입되어 타인을 배격한 지적 정보와 똑같다.
그것은 오직 사색이나 관찰을 통해 나만의 것으로 깨닫고, 공감한 지식으로 재해석하여 개념이 정립되어야 한다.


■ 도구의 활용 ; 인식을 위한 재해석

한마디로 간접 경험의 도구는 호미나 삽처럼 밭을 일구는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구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활용하지 않으면 밭을 기경할 수 없다.
그 도구로 밭을 일구는 행위가 사색과 관찰을 통하여 나만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한 인식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 재해석은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관적 재해석이란 스스로 그 진리에 대하여 자신만의 이해로 들어온 해석이며, 객관적이란 그것이 성현들이 말한 진리와 객관적으로 동일한 개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스로 성찰의 검증 과정을 통하여 알아차린다.
이때 지식은 단순한 기억의 영역을 넘어 진정으로 알아차리는 인식의 영역으로 넘어온다.
이때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사랑 또한 진실해지며, 순수와 진실성은 진리의 옳음을 스스로 인식한다.
그리고 인류는 적대적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아닌 함께 공존해야 하는 가족임을 인식한다.


■ 인식의 방법 ; 표현

인식하기 위해서는 찾거나 표현해야 한다.
자신이 옳다고 배운 것을 타인을 향해 따뜻하게 말하고, 행동함으로 진정으로 배려하는 법을 습득해야 한다.
표현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죽은 지식이란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는 쓸모없는 지식이라는 의미다.
산 지식은 오직 표현으로 드러난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그것을 표현할 때 그것이 부족하거나 실수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은 상관없다.
그는 아직 모르는 세 살짜리 아기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없이는 그는 절대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잘못을 통해서 잘못이 아닌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이런 실수와 잘못을 통해 구분이 일어난다. 잘못된 것과 옳은 것의 구분이 바로 스스로 터득한 진리의 개념 정립이다.
이 과정만이 올바른 인식의 과정이요 진정한 깨달음이다.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공허와 허무는 그들의 주위를 맴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드시 자신과 만나 하나 될 때 자유와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식할 때만 행복하다!


"스스로를 신뢰하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된다" - 괴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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