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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스쿨 윤정현 Jun 01. 2024

감정과 사고가 작동하는 절대량의 법칙

감정은 배, 사고는 선장이다!


“이것을 읽으시면 이것을 배웁니다. 이렇게는 저는 말할 수 없지만, 저는 그냥 묵묵히 절대량을 채웠을 때, 이 지식의 정보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결합하면서 제 머릿속에서 저도 모르는 것들을 새롭게 만드는 걸 많이 경험을 했습니다.”


기획의 정석에서 박신영 작가는 위와 같이 말했다. 무엇이든 '절대량'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럼 감정과 사고는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상호 작용하면서 그것 또한 절대량이 채워졌을 때 어떻게 작동하는가 알아보겠다.



1. 감정의 작용


감정은 대부분 조건에 의해 수동적, 수용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현상을 느끼는 기분/~올라오는 감정


감정이란 대부분 어떤 조건에 의해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기분 나쁜 말을 들으면 미움이나 시기, 질투, 짜증, 분노, 화, 욕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난다. 또 기분 좋은 말을 들으면 기쁨이나 미소, 즐거움, 사랑, 행복, 편안함 등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일어난다.


감정의 형태는 부정이냐 긍정이냐의 에너지만 존재한다. 이름만 다르게 호칭한 뿐 내재되어 흐르는 에너지는 두 가지 형태뿐이다.


기분이 나쁜 것 같아!

느낌이 별로야!

짜증이 올라와!

행복하고 즐거운 느낌이야!

미소가 절로 나와!


느끼는, 올라오는, 일어나는, 나타나는, 부딪치는 등의 언어들은 모두 외적인 동인에 의해 내적인 감각적 반응이 감정의 종류별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감정은 무엇으로 인해 어떤 종류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흘러가는 배와 같다. 가만히 놔두면 제멋대로 간다. 다양한 바람을 맞이하며, 폭풍 속을 나아갈 때도 있고, 잔잔한 바람 한 점 없는 바다를 항해할 때도 있다. 또 수많은 물고기와 암초, 빙산을 만나 좌초될 수도 있는 망망한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감정은 수많은 외부 환경과 조건에 마주하도록 내어놓은 망아지와 같다. 선장이 없으면 배는 길 잃은 영혼이다. 하지만 배가 없으면 선장은 그 수많은 희로애락을 경험할 수 없다.



2. 사고의 작용


사고는 대부분 필요에 의해 주도적, 능동적으로 일으키는 현상

생각하고 헤아리는 이성 작용/~하는 생각


사고란 대부분 필요에 의해 주도적, 능동적으로 일으키는 현상이다. 곧 감정이 흔들리는 조건이 주어지면, 마음은 감각을 통해 그 감정이 어떠한지 수용적으로 느끼고, 사고는 그것을 캐취하여 그 감정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능동적으로 생각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네가 뭔데 나한데 그런 말을 해!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꺼져!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그런 말을 하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아!

음,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근거가 있네.

아! 그건 내가 실수한 것 같아! 미안해!

나는 네가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어.

너를 사랑해!


하는, 하냐, 하느냐고, ~해, 했어 등과 같이 의지를 행사하여, 의사 전달을 위해 액션을 취하기 전 단계까지 사고의 과정을 능동적으로 하는 생각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사고는 배를 원하는 곳으로 조종하는 선장과 같다. 선장이 없다면 배는 제멋대로 갈 것이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선장은 다양한 위험이 도사리는 암초와 폭풍우를 뚫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키를 잡고, 의지를 행사한다. 잘못된 곳으로 가지 않도록 제어하며, 올바른 곳으로 나아가도록 승객과 선원, 화물을 안전하게 지키며 신경을 바짝 세우며 항해한다.


목적지를 향한 안전한 항해는 신경을 바짝 세우며 생각을 많이 하여야 되듯, 마찬가지로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사고의 기능은 생각을 깊이 할 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생각 좀 하고 말해!'라는 말에는 생각 없이 말하므로, 말실수를 일으키는 사람에게 주는 주의다. 이처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분노하게 되면,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행동하게 되므로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는 선장 잃은 배와 같다. 선장은 옳은 방향, 곧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도록 노력하지만, 선장이 잠들거나 한눈을 파는 사이 언제 잘못된 곳으로 튈지 모른다.


사고는 들어온 정보를 해석하는 작용도 하지만, 상대방이나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나 나쁜 감정 또는 원하는 것이 일어나도록 능동적으로 개념, 구성, 유추, 추리, 해석, 판단하는 기능도 한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하려고, 여러 방식의 생각 회로를 동원한다. 그것도 순간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자기 객관화가 어렵고, 자기 내면의 흐름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스스로를 속이려고 하거나 옳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외면하기 때문이다. 양심의 작용이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손가락질하기 때문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감추려 한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것 같아,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라는 노래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려고 하기에 만들어진 자신의 욕심, 이기심, 시기, 질투, 미움과 같은 안 좋은 모습이 선한 양심, 곧 배려, 존중, 착함, 사랑, 나눔, 친구에게 도움받음과 같은 마음들이 그런 나쁜 마음을 밀어내기 때문에 만들어진 자아의 여러 모습일 뿐이다. 그걸 거르지 않고, 수시로 허용하므로 부정적 감정들이 자신을 정복하였기 때문이다. 그걸 명백하게 보고, 올바르지 않은 것은 밀어내고, 올바른 것은 더 예쁘게 성장시킨다면 그런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순수하고, 진실하면서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과 대면한다.


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천지 신지 아지 여지 하위무지)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모른다고 하는가?


"작은 정성이니 받아 주십시오. 한밤중이라 아무도 이 일을 모르니 받아 두어도 괜찮습니다."라는 왕밀의 제안을 양진은 위와 같이 말하며  뇌물을 거절하였다. 중국 후한 시기 일이다.


여기서 양진은 '내가 안다'고 했다. 뇌물을 받는 사람은 자신을 몰라서 받는가? 여기서 '내가 안다'는 의미는 '자신은 어떠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명료한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저 위의 노래에서는 자신 안에 너무나 많은 형태로 존재하는 긍정적 생각과 부딪치는 부정적 생각들로 인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인격을 수양하고, 내면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사람은 저렇게 자신을 지키는 사고의 기능, 곧 의식이 깨어 있다. 이런 사람이 되면 자신의 신념이 투철하면서 진실하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겸손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물욕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은 '이게 웬 떡인가!' 하며 그걸 덥석 문다. 자기 무덤을 파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3. 사고가 언어를 선택하는 과정


사고는 감정보다 더 복잡한 회로를 통하여 형성된다.

'미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는 느낌의 언어를 구사하였다고 하였을 때 사고의 반응은 복잡하게 나타난다.


네가 나를 미워하는 말을 하였으니 나도 너를 미워하는 말을 할 거야!

네가 나를 미워하는 말을 하였으니 나는 너에게 미친놈이라고 욕할 거야!

네가 나를 미워하는 말을 하였으니 나는 너를 다시는 보지 않을 거야!

네가 나를 미워하는 말을 하였으나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을 거야!

네가 나를 미워하는 말을 하였으나 나는 너와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싶어!

네가 나를 미워하는 말을 하였으나 나에게 사과의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이 외에도 선택지는 엄청나게 많다. 내가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또는 저것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을 추가할 것인가 저것을 제외할 것인가 등등 선택의 변수는 스스로의 의식 수준과 사고의 깊이, 관계의 효율성, 장소와 시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이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였지만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 즉 스스로 선택한 것을 거절할 권한도 스스로에게 있다.


이와 같이 사고의 유형에 따라 변수를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어들의 형태를 살펴보자.


'자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자랑의 말을 하면 좋아할까 싫어할까, 자랑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잘난 척을 하면 친구들이 싫어하겠지, 좀 자제를 할까 말까?


'고통'스런 일을 당했다, 1억짜리 인테리어 공사를 외주 받아 시공했는데, 업체가 부도나서 돈을 못 받았다. 재판을 해서 승소 판결을 받았는데, 재산이 없다. 나도 영세업체라 너무 힘들어서 죽이고 싶도록 밉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는 수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자책하거나 자학해서 술만 마신다. 상대방을 끝까지 쫓아다니며 괴롭힌다. 깨끗이 잊고 새로 시작한다. 주변에 온갖 비방을 하고 다니면서 일한다.


위와 같은 일은 어쩌면 불행한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불행일 수 있지만, 불행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의 수도 가지고 있다. 불행은 실체가 아니고, 언어 상자 안에 포장된 사과와 같다. 불행이라는 사건의 상자가 내 앞에 있지만, 그 상자를 열어 사과를 먹을 것이냐 먹지 않을 것이냐는 나의 선택이다. 이처럼 사고를 통하여 가져 오는 언어 상자들은 그 상자를 열어 내가 먹을 것이냐 먹지 않을 것이냐로 그 언어의 현실화가 결정된다.

그 불행의 사과를 먹으면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것이고, 그 사과를 먹지 않으면 그냥 그 사건은 입 한 번 쓱 닦고 지나간다.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이렇게 무엇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우리의 사고의 영역에서 선택하는 생각 작용의 결과다. 이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사고 영역은 불가능이다. 그러나 위에서 절대량의 법칙을 이야기하였듯이 그 경험치가 절대량을 넘을 때 불가능은 가능의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온다.


다음은 '지겨움'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어떤 일이 하기 싫거나 지루해서 지겨울 때가 있다.  '때가 있다'는 말은 없을 때도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무엇이 있다는 것은 없는 경우의 수도 존재한다. 나 혼자만의 경우의 수는 한정적이다. 하지만 지구 80억 인구의 경험 그리고 그 이전 수수만년 인간의 경험은 무한히 많다. 그러므로 내가 규정지은 지겨움이라는 단어는 내가 규정지은 경계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또 다른 사람들이 그 경계 밖에서 지겨움을 넘어서 즐거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내 경우의 수를 확장하는 경험을 해볼 것이냐 아니냐는 순전히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처럼 사고는 다양한 사색과 관찰을 통해 확장성을 가지고 생각해 볼 여지를 줄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그것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의 한계, 사고의 한계에 갇힐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다.


'성공'과 '행복'이라는 단어를 보자.

성공을 하면 행복하다? 무엇이 성공이지? 그 성공의 개념은 모두 다르다. 또 자신이 생각하는 그 상태에 이른다고 그것이 과연 성공인가? 또 그 상태가 행복인가?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돈을 100억을 가졌다고 행복한가?

갖지 않아 불행하는가 하면, 가져서 불행하기도 하다. 또 누군가는 갖지 않아서 행복하는가 하면, 누구는 가져서 행복한 사람도 있다.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인 개념 중에 더 추상적이면서 주관적인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념을 생각해 보면 있고 없고, 갖고 갖지 않고의 개념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는 소유의 개념보다는 사고의 선택적 개념이 그러한 상태를 좌우한다는 의미다.



4. 습관화의 두 가지 법칙


길들임과 절대량의 법칙


이를 보면 부정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의 틀에 갇히기 쉽다. 반대로 긍정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찡그리고, 짜증과 분노로 가득 차면 스트레스를 받기 쉽다. 그러나 칭찬과 격려, 기쁨과 미소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늘 삶을 즐기는 자세로 살아가기가 쉬워진다.


이렇게 부정 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상태에

오랫동안 길들여져서다.

곧 절대량을 채워가는 삶을 향해

선장이 키를 쥐고 자신을 길들이면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몸과 마음이

길들여지는 습관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길들임의 법칙이다.

부정적인 언어를 자주 사용하거나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안 하려고 해도 부정적 감정이나 사고에

지배당하여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진다.


긍정적인 것도 에너지만 다를 뿐

흐름의 과정은 같다.


두 번째 절대량의 법칙이다.

모든 것은 채워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채워지고 나면 점점 쉽다.

이때가 지나면 저절로 된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요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가 평소 어떠한 사고의 습관이 지배하도록

놔두고 있느냐이다.

그 습관 된 사고의 허용치에 따라 결과는 따라온다.



5. 사고의 현실화 과정


인정 / 방어 / 거부의 3가지 형태


사람이 어떤 사건을 받아들임에는 보통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전제 조건은 말하는 사람이 올바른 말을 했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인정, 방어, 거부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는 인정이다.

그것이 그렇다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의 말이 옳고, 논리적이면서 합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 여기면 사람들은 보통 마음으로 승복하고 받아들인다. 이는 자신의 이해의 영역에서 맞다고 스스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소통의 가장 합리적인 수준이며, 대화를 풀어나가는데 가장 기분 좋은 단계다.


인정하는 사람은 잘못이나 실수에 대한 인정도 빠르다. 그리고 변명이나 돌려 까기 식의 말로 사과하지 않는다. 깔끔하게 사과할 줄 안다. 이런 사람과 대화하는 사람은 그냥 그 만남 자체로 행복하다. 인정을 잘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나 존중 또한 높고 뛰어나기에 상대를 위한 호응, 리액션, 지지와 높은 수준의 대화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의 지적 수준이나 연령대 또는 직업과 상관없이 그들의 눈높이로 대화할 줄 알며, 그것도 존중하면서 대화하는 법을 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나 상대방이 부족하거나 약자 또는 '을'의 위치에 있더라도 절대로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신뢰와 존중, 순수함과 진실한 마음으로 대화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방어다.

방어의 형태는 대략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속으로는 맞는데,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는 것

속으로는 틀린데, 겉으로는 맞다고 하는 것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오해 또는 잘못 해석하는 것

틀렸다고 생각하는 형태의 방어다.


먼저 속으로는 맞는데, 겉으로는 아니라고 방어하는 것은 자존심이나 열등감이 많이 작동한다. 상대방의 말이 맞지만 그것을 수용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아니라고 합리화시킨다. 이러한 상태는 지금 현재의 그의 말보다는 그동안 상대방과의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거기에 감정이 개입되어 나타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방어하는 것은 내 말이 틀려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인 감정이 누적되어 거부하는 것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제는 말하는 사람이 옳다고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런 불화가 일어나는 것은 말하는 사람 자체가 착각, 오해, 왜곡에 의해 확증편향에 있을 수 있다. '왜곡된 옳다는 생각'의 착각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감정적, 강요적 고문이 된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강력하게 반항하거나 부모와 관계를 끊어버리는 형태가 이런 것이다. 약자일 때는 부모에 의한 공부의 강요나 진로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여도 자신이 '을'의 입장이기에 어쩔 수 없이 수용한다. 하지만 스스로 삶을 살아갈 정체성이나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되면 그런 잘못된 속박이나 구속에서 벗어나 버린다. 이와 같이 스스로 옳다고 착각했던 사람은 나중에 잘못된 결과를 거두게 된다.


반대로 속으로는 틀린데, 겉으로는 옳다고 인정하는 방어기제다. 이는 진정한 인정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대체재로서 받아들이는 전형적인 '을'의 생존 전략이다. 상대방이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자신이 손해를 입게 되므로 수용하는 형태다. 직장에서 부당한 업무 지시를 수용하거나 부모의 폭언이나 폭행, 강압과 같은 지시나 강요, 배우자의 경제력이나 힘에 의한 정신적 지배하에서는 상대방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강요된 인정을 하게 된다.

이는 지배받던 사람이 힘의 균형이 바뀔 때 반드시 보복을 한다. 그의 힘의 지배에서 벗어나거나 아니면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되돌려준다.


다음으로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형태는 대화나 언어의 지적 수준이 다르거나 인지의 상태가 다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알고 있는 상식의 수준이 다르면 이는 동문서답이 될 확률이 높다. 유치원생과 대학생이 의미 있는 토론을 하기 어렵듯 상식이 통하지 않거나 기본적 개념이 없으면 소통 자체가 어렵다. 더구나 이해하려거나 수용하려는 의지도 없다면 불통은 당연하다. 나이는 먹었는데, 의식 수준은 철없는 아이 수준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이런 경우 상대방의 말을 오해하기 쉽고, 잘못 해석하기 쉽다. 이런 경우 상대방을 '너는 그것도 모르냐?'고 코너로 몰아버리면 더 큰 화를 불러온다. 이는 성숙한 사람이 문제를 풀어내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그만한 의식 수준으로 올라와야 한다.

그러므로 '상식이 없다'라거나 '개념이 없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다. 서로가 보편적인 수준에서 상생하려면 기준선이라는 것을 지키고, 보호, 양보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자기밖에 모른다면 누가 그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향한 깊은 배려나 존중은 못할지라도 상식은 지킬 줄 아는 매너나 센스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형태는 확증편향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형태다. 이러한 사람은 대부분 자기만이 옳다는 닫힌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설득하거나 대화하기 어렵다. '꼰대'라든지 '의처증'이라든지 영화 '올가미'에서 비뚤어진 모성애로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가족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형태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자기의 생각이 100% 맞다는 확증을 한쪽으로만 가져버리기에 상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틀렸다는 집착에 빠진다.

사이비 종교나 불법 다단계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가족인데도 재산까지 바치면서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의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그렇게 갈등하고, 싸우고,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의심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이러한 형태의 비이성적 꼰대, 의처증, 집착은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저들의 고정관념은 99.9%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0.1%의 여지는 어떤 계기를 통해 스스로 바뀌어야겠다는 의지를 발휘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상대방은 고문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살아남으려면 오직 저런 형태의 사람에게서 도망하는 자유 밖에 없다.


세 번째는 거부다.

거부와 방어의 틀림이 다른 것은 내적 상태가 다르다.

틀림은 이미 자신이 옳다는 잘못된 신념이 고착화된 사람이다. 그러나 거부는 내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거나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거부하는 이중적인 형태다. 그래서 이 형태는 이중인격자나 위선자들이 많다. 자존심 때문에 방어하기 위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자체가 싫거나 스스로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거부하는 형태다.

이는 감정적 영향보다는 관계적, 욕망적 영향이다. 종교적 신념이 다르거나 정치적 이념이 다르거나 지역적 연고 또는 혈연적, 학연적, 비즈니스적 욕망으로 인하여 상대방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형태다.

이는 옳고 그름이 중요한 잣대가 아니다. 그냥 상대방이 나와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거부하고, 반대하는 형태다. '난 무조건 네가 싫어!' 또는 '난 이유 없이 네가 싫어!'와 같이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그룹의 울타리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의 방향성

거부는 마음이 못 된 형태의 사람이다.

방어는 감정이나 착각의 형태다.

인정은 올바른 사람의 유형이다.


갈등은 서로의 견해 차이인데, 갈등의 끝은 반복적인 싸움, 폭언, 폭력, 무시, 별거, 이별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결국 싸움 아니면 무대응(무시), 이별의 3가지 형태다. 그렇다면  좋은 인간관계를 지속하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충분히 조율할 수 있다. 5:5의 조율이 아니더라도 이번에 조금 양보하면서 다음에 조금 양보받으면 되기에 논리적, 합리적 대화를 할 수 있는 관계라면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한쪽이 확증편향으로 갇혀있다면 대화 자체가 왜곡, 오해, 착각하고 있기에 조율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 이는 조율보다는 감정적 대립에서 벗어날 의향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방어기제를 강하게 행사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인지의 노력이 없다면 상대방과 소통이 불가능하다.


거부하는 사람은 소통이나 대화 자체를 할 수 없다.

감정적인 사람은 지금 일어난 분노가 더 중요하다. 내일이 없다. 그냥 폭발함으로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려 하기에 위험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감정은 쉬이 사그라든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이 후회한다. 후회하는 사람은 미래가 없다. 또다시 반복하기 때문이다. 오직 반성을 할 때 성찰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

착각의 형태는 성숙이 필요하다. 지적 성숙이나 다름을 이해하려는 열린 마인드가 있어야 공존할 수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배우려는 자세가 없다면 영원히 철없는 상태에 머무른다.

인정하는 사람만이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다.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하였을지라도 그는 고쳐나가려 하고, 더 나은 삶을 선택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더 나은 관계를 지향한다면 내가 옳고 네가 그름의 차원보다는 어떻게 하면 서로가 더 나은 방법적 접근을 통하여 합의 가능한 조율을 할 수 있느냐는 접근법이다. 그래야 너도 행복할 수 있고, 나도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의사소통력이며 문제해결력이다. 이 상태가 아니라면 인간은 더 나은 상태로 절대로 나아갈 수 없다. 갈등만 증폭될 뿐이다.


6. 결과는 말과 행동의 선택


현실화 전 상태의 흐름도 ;

현상, 사건, 일 > 감각 인식 > 감정 포착(느낌, 기분) > 사고 포착 > 생각 판단 > 내면 선택(인정 & 방어 & 거부)


현실화 상태의 흐름도 ;

최종 선택(인정 & 방어 & 거부) > 말 & 행동화 반응


'말은 한 번 밖으로 나오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고 했다. 행동 또한 같다. 그와 같이 말이나 행동이 현실로 나오기까지는 실제로 다양한 단계를 거친다. 이러한 감각적, 사고적 흐름을 거치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바로 각성이요 자각이다. 이를 알아차림 또는 되새김, 재해석이라 한다. 이런 단계를 거칠 때 그의 삶은 혁신적 변화를 한다. 의식이 전환된 것이다.


'저 사람 지적이다!'라는 말에는 이런 사고와 의식 체계의 흐름을 지적 학문의 깊이를 통해 인격적 성숙을 이룬 사람을 말한다. 단순히 지식만 많이 기억하는 상태가 아니라 삶의 성숙도를 갖춘 사람이다.

그러므로 학문적 성숙을 이룰 때 사람은 품격이 높아진다. 특히 그러한 학문을 인문학적 소양이라 한다. 배움이 얕은 사람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지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런 식으로 자기에게 말을 하면 화를 벌컥 낸다. 이것은 언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언어란 서로가 동등한 상태에서 존중받는 형식으로 소통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를 모르고 자기 방식으로만 생각 없이 쏟아내기에 갈등과 불화가 발생한다. 말이 밖으로 나오기 전, 위와 같은 흐름도를 안다면 사람들은 훨씬 품격 있고 행복한 상태의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사고 체계를 통하여 해석하고, 어떻게 말을 할지 판단을 내린다. 그 판단을 하였을지라도 현실화 전에 바꿀 수 있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 아니면 저런 식으로 말을 해야 좋을까?' 이렇게 그 상황이나 대상에 맞게 조율하는 과정의 내재적 선택을 거쳐 최종 선택한다.



7. 사랑은 사량(思量)이다!


그러므로 감정에 즉각적인 반응이 아닌 사색하고, 고민하고, 고뇌하는 과정을 거치면 훨씬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사랑의 고어는 사량(思量)이다. 생각 사, 헤아릴 량, 곧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많이 생각하는 자세를 가질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의미다.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 자체가 사랑이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말을 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짝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할까, 무엇을 잘해줄까, 어떻게 해야 나를 좋아할까 등 수만 가지 생각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런데 결혼하고 10년이 지나면 무관심으로 바뀐다. 사랑의 크기가 달라졌다. 그런데 어떻게 좋은 감정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생각 없이 말이 툭툭 튀어나와 상대방을 상처 주고 있는데...


이제 말을 하기 전에 3초를 멈추라!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을 고르는 과정을 가지라!

그 후 그나마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한 말을 선택하라!

지금보다 10배는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가장 좋은 방식은 아래와 같다.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이 생각의 과정을 한 번 거치고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이 사고의 과정을 거치면,

저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들어할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저렇게 뜸을 들일까?

마음속에 담아 둔 속마음은 무엇일까?

무엇을 가장 싫어할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가장 존중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이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말하고자 하는 핵심 맥락은 무엇이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지?

무슨 영화를 좋아하지?

취미는?


이와 같은 것을 다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중에 하나만이라도 관심을 보여준다면, 상대방은 나에게 호감을 가질 것이다. 단 한 번의 표현으로 바뀔 수는 없다. 진정성은 그러한 마인드를 일정 기간 지속해야 신뢰를 가질 수 있기에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긍정적 인정 ; 난 그런 사람임 > 자신감, 자아효능감 > 자존감 UP > 존재감

긍정적 방어 ; 난 그런 사람 아님 > 위로, 배려 차원  > 자존감 UP > 존재감

긍정적 거부 ; 난 그런 사람 아님 > 신념, 정의 분노  > 자존감 UP > 존재감


부정적 인정 ; 난 그런 사람임 > 자괴감, 자책감 > 자존감 DOWN > 존재감 상실

부정적 방어 ; 난 그런 사람 아님 > 분노, 고집, 착각  > 자존심 UP > 존재감 없음

부정적 거부 ; 난 그런 사람 아님 > 차별, 분리 > 자존감 DOWN  > 위선자, 독재자


앞에서 에너지는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뿐이라고 했다. 감각 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인 에너지는 사고의 형태에 따라 인정과 방어와 거부의 형태로 현실화되지만, 그 내재적 에너지 형태는 역시 두 가지뿐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목적, 의도, 동기, 원인, 이유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수많은 수단을 통하여 그것을 감추고 대화하지만 그 내재된 에너지가 부정적이면 부정적 결과를 거둔다. 그 에너지가 긍정적이면 긍정적 결과를 거둔다. 모든 우주적 원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감출 필요가 없다. 본디 인간이 가진 존재적 가치는 선함이다. 그 선함이 삶의 혼탁함으로 생존을 위해 자신만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아다. 자아의 형태는 오로지 자신만의 이기적 안위와 생존만을 집착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프레임이 자신을 스스로의 감옥으로 가두어 버린다.

그 탈출은 본래의 심성을 찾아 올바른 선택을 하는 삶이다. 그 삶이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절대량을 넘을 때 인간은 그 존재의 가치를 발견한다.



8. 중요한 것은 의식적인 선택이다!


마시고 토함은 선택이다.

불행이나 행복도 선택이다.

삶이란 선택이지 운명이 아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선택이다.


보이는 물질적 입자의 세계는 가상이다. 인간이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의식이 실체이고, 물질적 세계의 삶은 옷을 입고 벗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원효가 해골물을 맛있게 먹고, 토함은 같은 것에 대한 선택의 다름이다. 이 옷을 입을 수도 저 옷을 입을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런 선택이나 저런 선택을 할 자유가 있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하는 자의 실체가 본질이지 어떤 것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지나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음식은 건강을 위한 에너지일 뿐, 그것이 에너지를 공급하고 나가는 배설물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똑같은 사건, 똑같은 대상, 똑같은 일을 마주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반응은 여러 형태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오직 두 가지로만 갈라진다. 옷은 여러 형태지만 모두 하나의 옷이다.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이냐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이냐 뿐이다.

같은 현상에 어떤 사람은 짜증을 내고, 어떤 사람은 웃는다. 어떤 사람은 분노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할 수 있고, 저것은 할 수 없는 차원이 아니라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으며, 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저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 의지에 의해 선택의 영역에 속한다는 의미다.

삶의 모든 부분이 그렇다. 항상 불행한 생각만 하고, 짜증을 내고, 부정적인 성향의 사람이면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생각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망상이다. 항상 행복한 생각만 하고, 배려의 말과 미소, 긍정적인 성향의 삶을 사는 사람은 불행하게 될래야 될 수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실화할 때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면서 하느냐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느냐의 차이다.


부정적인 성향을 선택하면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내부의 저항, 곧 양심의 저항을 거부하면서 지속하는 사람은 결국 인지부조화 상태에 이른다. 인지부조화란 올바름을 인지하는 기능이 완전히 망가져 조화를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데도 양심의 가책이나 타인의 아픔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들은 철저히 이기적이거나 위선적인 자들이다. 결국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같은 존재가 된다.


부정적인 성향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선택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는 자들이다. 이들은 무지해서 그렇다. 환경이 그런 곳에서 태어나서 그런 것만 보고, 듣고, 생활했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에서 태어나 그런 생활만 보고, 듣고 살았거나 북한과 같은 독재 사회에서 폐쇄적인 세뇌 교육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또 '모글리 현상'이라고 어렸을 때 버려져 동물과 같이 자란 아이들이 있다. 이런 아이들은 지적 인지 능력이 없어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사고의 판단을 동물적 감각 이상으로 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듯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영역의 한계에 갇히면 그 밖의 세상은 인지하지 못한다.


물론 의식하지 않고도 긍정적인 생각이나 언행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그것이 선한 것이라 생각하거나 좋은 가정환경이 어려서부터 습관화되어 몸에 밴 결과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은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타인에게 체계적인 코칭을 하지는 못한다. 변화의 과정을 이론적, 논리적으로 알지 못하지 때문이다.


그러므로 멘토나 코치, 전문 상담사들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 존재다.


매 순간 삶 속에서 의식을 하면서 시작과 중간 과정 그리고 결과에 이르는 전체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인지하여 더 나은 선택을 할 때 주도적이 되면서 타인을 그렇게 이끄는 리더가 된다. 수학의 답만 아는 것으로는 풀이를 할 수 없고, 또 타인에게 그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도 없다. 그와 같이 의식하는 사람만 그 결과에 따라 더 나은 의식의 성장을 선택할 수 있다.


인간에게 외부적 조건으로 발생하는 감정과 사고의 전체적인 흐름 체계를 통하여 내부적으로 어떤 선택, 어떤 과정의 흐름을 통하여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지 살펴보았다.


핵심은 그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감정적으로 욱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3초 동안 심호흡을 한 후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가운데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서로가 더 나은 행복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더욱 따뜻하고, 행복이 넘치는 곳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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