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이 중요하구나!

무엇을 인지한다는 것, 그것은 변화의 시작

by 행복스쿨 윤정현

앎의 시작은 모름의 종착역이다. 모름을 알기 위해 찾는 여행의 끝이 앎의 ‘유레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는 순간 앎은 시작된다. 인지(認知)란 기억에 의한 앎이 아니라 명료하게 이해하여 알아차리는 단계다. 붓다는 이를 ‘위빠사나’라 하였다. ‘통찰력 있게 꿰뚫어 본다’, ‘진실한 모습을 본다’, ‘전체를 본다’는 의미다.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 들어가자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물체의 부피만큼 물이 넘치는 원리를 발견하였다. 이때 외친 말이 ‘유레카’다. 임금의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라고 명령하여 고심하던 중 발견한 원리다. 이를 통하여 왕관과 같은 무게의 순금을 물에 넣어 순금이 아닌 것을 발견하였다.


인지란 이렇게 명확하게 원리와 이치를 이해하는 단계를 말하며,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문해력이나 소통력이 확장된다. 이를 통하여 개념이 정립되고, 나아가 올바른 정체성과 가치관이 형성되는 기초가 된다. 개념이 없거나 진상 또는 무논리적인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인지의 기초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일반 거리나 도로에 있는 한글을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는데 신기해하고, 즐거워한다. 그중에 ‘일방통행’이라는 글자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왜 찍었을까 의미 없게 생각하지만, 외국인들은 이것을 ‘이바토해 2000’이라고 읽는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받침이 없는 영어를 습관적으로 써왔기에 한글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일방통행’이라는 글자는 어려서부터 당연하게 인지되었기 때문에 저렇게 읽을 수가 없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저렇게 이야기하니 그때부터 인지되었다.

일방통행.png 일방통행이 외국인은 ‘이바토해 2000’으로 보임

댓글에 보면,

“와 진짜 평생 몰랐네. 한국인들이야 한글을 아니까, 자음부터 보니까, 아래에 시선이 안 가니까 등잔 밑이 어두웠다.”

“진짜네. 이제야 알았다.”
“평생 저렇게 보인 적이 없었다. 신기해.”


두 줄 글씨로도 보이고, 알려주니 그렇게 보인다고 하면서 이렇게 놀라워하는 댓글이 많았다. ‘산’도 산(山) 같고, ‘집’도 지붕과 굴뚝, 창문으로 이루어진 집과 같다고 한다. ‘옷’도 사람이 옷을 입은 모양 같고, ‘꽃’도 진짜 꽃처럼 보인다고 한다. 우리는 표음문자로 소리나 뜻 위주로 보았다면, 외국인은 처음 배우기 때문에 상형문자처럼 저렇게 보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이것에 대하여 알려주기 전에는 쉽게 ‘인지’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지할 때까지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다. 보고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런 경우다. 누군가 터치를 해주든지 아니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스스로 알아차리든지 해야만 한다. 그때 보이고, 느끼고, 인지할 수 있다.


거울 치료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의나 대화, 책을 통하여서는 가까이 느끼지 못하다가 자신이 곤란하고, 민망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바로 느낀다. 사람들은 손해 볼 때에야 직접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철든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한다. 스스로 철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이 알려줄 때 철드는 사람이 있고, 남이 알려줘도 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인지부조화, 곧 진상이라 한다. 이들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지 모르며,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몽골에서 온 어떤 분이 몽골에 생긴 한국 편의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CU, GS, 이마트 같은 편의점이 처음 몽골에 생겼을 때, 한국에서와 같이 종업원들도 “어서 오세요. CU입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이런 인사를 몽골어로 하는데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어색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몽골에는 그런 문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주 사용하니 어색함도 사라지고, 서로 행복해졌다고 한다.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워졌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면서 “감사합니다.”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좋음은 반복에 의해서 인지되며, 어색함도 반복에 의해서 사라진다. 좋은 걸 알아차리면 나중에는 "왜, 이 좋은 걸 몰랐을까?" 하는 것이 인지가 주는 학습 효과다. 인지는 이렇게 실질적인 원리나 이유, 이치를 스스로 이해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습관이나 삶이 변화되는 것은 이러한 ‘인지적 앎’이 올 때 가능하다.


남매간에 감정적 충돌로 인하여 오랜 시간 사이가 벌어진 사례가 있었다. 누나는 동생에게 여러 번 사과를 하였지만, 동생은 그 사과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 인연을 끊을 상태까지 이르렀다. 개별적으로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을 메일로 보내달라고 하였을 때, 누나는 A4 용지 1/4 분량이었으며, 동생은 3페이지 분량이었다. 1차적으로 누나는 기억나는 것이 일부분이고, 동생은 구구절절이었다. 사람들 가운데 가해자나 갑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나 피해자나 을은 할 말이 너무 많지만 가슴에 묻어둔 경우가 많다. 1차적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2차적, 3차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당사자 간 문제해결이 어려운 것은 서로 입장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말로 사과를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말투에 있다. 감정이 격앙되어 있고, 이해를 하기보다는 싸우자는 말투로 대화하니 어렵다. 두 번째, “사과를 했잖아!” 하는 식의 사과다. 이건 사과가 아니라 강매다. 독재식으로 ‘내 사과를 너는 받아들여!’라는 강요의 사과를 들이밀면 아무리 약자라도 마음으로는 그 사과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세 번째,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상대방이 말하는 중간에 절대 끊고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 말이 끝나거나 아니면 상대방에게 허락을 받고 대화를 해야 한다.


이렇게 건별로 이해를 시키면서 부드러운 말투와 정식으로 사과를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3자 통화 방식으로 통화를 하였다. 그때 동생이 누나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누나 또한 눈물을 글썽였다. 대화를 하다가도 “내가 이제 말해도 될까?”라는 누나의 말투에 서로 웃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서로의 관계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것이 인지, 곧 명료한 이해를 통한 인간관계의 변화다. 어떤 부분이, 어떻게 사용되었고, 그 내면에는 어떤 심리와 의미, 곧 속마음이 내포되어 있는지 ‘인지(認知)’시키는 작업을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니 관계는 쉽게 회복되었다. 악의적인 마음만 아니라면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면 대부분의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그럼 개념(槪念)이란 무엇인가?

대개개, 생각념으로 대부분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관념, 통념이다. 곧 사회적으로나 보편적 또는 통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정립된 관점이나 지식이 개념이다.


1초가 모여 1분이 되고,

1분이 모여 1시간이 된다.

1시간이 모여 하루가 된다.

그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1초가 인지라면, 1분은 개념이요

1시간은 가치관이며, 하루는 삶이다.

삶이라는 인생이 모여 한 인간의 철학이 완성된다.


건축학 개론, 경영학 개론, 국문학 개론, 심리학 개론, 철학 개론처럼 개념은 모든 학문의 기초를 여는 관점이요 기본이다. 그것을 알아야 본론이나 심오한 학문의 깊이로 나아갈 수 있다. 그 개론(槪論)을 이해할 때 그 학문의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그 분야의 가치관이 정립된다. 프롤로그에서도 설명하였지만, 실용학문은 생계로서의 전문가 양성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도록 한다. 인문학은 그 생계의 삶 속에서 더 나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가치관을 정립하는 학문이다.


하나의 사건이나 지적 정보를 통하여 메타적 알아차림이 일어날 때 이를 메타적 인지라 한다. 그냥 인지라고 할 수 있지만, 메타적 인지라 함은 그것에 대하여 깊이 있는 교훈이나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다. 그러한 것들이 모여서 그것에 대한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 더 나은 삶을 향한 기준치가 설정된다. 그것이 그 파트 학문에 대한 개론처럼, 똑같이 그런 사건이나 행동에 대처하는 개념이 설정된다. 각 파트적 개념들이 모여 가치관이 만들어진다.


삶의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넓은 안목이 열린다. 그 가치관이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하고, 부부가 결혼 생활을 하고, 자녀를 어떻게 하면 올바로 키울 수 있는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하는 그런 역량이 거기서 만들어진다. 존경받는 사람들은 그러한 삶의 가치관이 명료하게 정립된 사람들이다.


나 또한 남동생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열등감인지 몰랐다. 그러니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열등감, 그것은 너무나 유치했다. 그것을 어떻게 벗어났는지는 뒤에 다시 한 토막 스토리로 이야기할 생각이다.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 열등감인 줄 알았을 때 벗어나기 시작했다. 열등감을 인지하고, 개념이 잡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치관이 정립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때부터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러면서 열등감도 사라졌다.


무엇에 대하여 올바로 인지한다는 것, 그것은 변화의 시작이다.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달라지는 관점이 거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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