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차원의 문을 열어주는 재해석
브런치 작가로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소제목을 작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소제목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려웠다. ‘아니 이미 제목이 있는데, 왜 또 제목을 만들라는 거야?’ 하며 피곤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기록하는 칸이 있으니깐 머리를 쥐어짜 내면서 제목을 완성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오랫동안 해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글의 핵심을 읽어내는 능력이 강화되었고, 전체를 보는 안목이 넓어졌다. 전체를 읽으면 핵심 키워드가 무엇 무엇이고, 글쓴이가 무엇을 주장하려는지 그 핵심적 방향이나 목적, 주제를 파악하기 쉬워졌다. 글을 줄이고 늘리는 필력이 늘어났다. 하나의 글을 읽으면 나만의 재해석을 제목이나 주제로 도출하기가 쉬워졌다. 이는 작가들이 쓴 책에 대한 이해력이 깊어졌고, 문해력의 확장성을 가져오면서 지식의 광대한 세계로 깊이 스며드는 행복을 맛보았다.
이러한 것을 알면서 한 권의 책을 이해하는 확장성이 늘어났다. 책 한 권의 핵심은 책 제목이다. 보완적으로 이해할 내용은 부제목이다. 세 번째 확장된 제목은 각 챕터의 제목이다. 챕터의 제목을 통하여 작가는 하고자 하는 요점을 적어놨다. 그것도 서론, 본론, 결론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챕터 아래에 소제목들이 있다. 그것은 그 챕터에 대한 해석적 요약이다. 그 소제목에 따른 내용을 함축하여 제목을 뽑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목차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집약체다. 이렇게 하면서 글을 책으로 만드는 일이 쉬워졌다.
그러므로 핵심 키워드를 알면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 단어 하나에 들어간 의미를 확장시키면, 그것이 소제목이 된다. 물론 거기에는 그 단어나 소제목을 선정한 배경, 논리, 사건, 예화, 경험 그리고 교훈이나 느낌, 결론이 내포되어야 한다. 결국 단어 하나를 늘리면 책 한 권의 내용이고, 줄이면 목차이며, 더 줄이면 제목이다. 소제목을 쓰게 만든 경험은 이러한 글쓰기의 줄이고, 늘리는 필력을 강화시켰다.
심리학이나 철학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아니 탄생할 수밖에 없는 지식의 깊이와 오묘함을 즐기는 단계로 나아갔다. 언어란 아름다운 조각을 완성하기 위해 조각가의 손에 쥐어진 조각칼이었다. 글은 마음에 담긴 아름다움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도구요 그가 가진 아름다운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사상의 현현이었다. 그렇다면 문자나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의미가 핵심이며, 그 의미 또한 ‘진리를 담은 향기’여야 한다. 그리고 그 향기는 의도가 그렇다는 주장이 아닌 ‘현실로 구현된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진정한 언어로서 가치가 있었다.
‘진리를 담은 향기’가 바로 심리학이며 철학이요 종교의 경전들이다. 언어의 정수를 체계적 시스템에 의해 구조화시킨 논리학이다. 그러므로 그 언어들은 모두 다르다. 시대, 언어, 문화, 종교, 민족 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언어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니 당연히 같은 문자 구조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언어 속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며, 그 의미 위에 언어의 정수인 ‘진리를 담은 향기’를 추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걸 추출하지 못하면, 그 문자의 다름으로 인하여 갈등과 분쟁, 살인과 전쟁까지 구사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다.
구교, 신교의 종교전쟁이나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전쟁, 유대인과 이슬람의 민족분쟁, 보수와 진보, 극우와 극좌의 분열 그리고 혐오와 차별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언어의 해석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많다. 문자 기호의 다름을, 의미의 틀림으로 해석해서 싸우는 문제의 확장성이다. 결국 의미의 재해석을 들여다볼 수 있는 확장성에서는 모두 같다.
기독교는 사랑을, 불교는 자비를, 유교는 인(仁)을 주 사상으로 내세운다. 이슬람은 신(알라)의 뜻인 선행(아흐산)을 행함으로 주어지는 평화다. 힌두교는 만유는 일체(一體), 곧 ‘하나됨’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핵심 종교들의 가르침은 같지 않은가? 인간은 모두 동등한 존재이며,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을 할 때 세상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초기에 글을 쓰는 것은 기억의 언어다. 기억의 언어는 모방의 언어다. 자신만의 요리를 할 수 없다. 레시피를 따라서만 하는 요리다. 그러나 재해석의 단계에 오면 자신만의 언어를 조각할 줄 안다. 그때 살아있는 언어가 된다. 따라 하는 기억의 언어에는 최고의 기법이 들어갈 수 있지만 그건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자신만의 언어를 조탁하고, 조각하여 감성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언어가 들어가야 한다. 그때 스스로 정신적 사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이 파트적 인지(알아차림)다. 나는 이를 ‘조각 진리’라 부른다. 상황별, 사건별, 대상별, 환경별 등등에 맞게 그리고 올바르면서 따뜻하게 하나하나 배워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정성 있는 언어의 요리를 할 때 타인도 그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위선이나 가식, 거짓의 포장된 요리는 화려하나 오래가지 않는다. 진정성 있고, 진실과 순수의 아름다움만이 그 어떤 어둠도 뚫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언어로 인한 전이가 타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브런치에 글을 완성할 때는 키워드를 3개를 선택하는 곳이 있다. 이것 또한 너무 좋았다. ‘내가 작성한 글에 핵심 키워드가 무엇이지?’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글을 되새겨 보게 하고, 거기에서 핵심 키워드를 찾아내는 묘미도 있었다.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명쾌함도 소제목을 만들어 가면서 배웠다. 소재는 주제를 더 빛나게 하면서 이해를 명료하게 이끌어 준다. 주제만을 전달하고자 하면 글이 딱딱해진다. 그 딱딱함을 소재를 끌어와 감성을 높여준다. 그리고 비유의 역할을 통하여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는 확장성을 선물한다. 상담을 하면서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 그때마다 의뢰자가 이해하는 폭이 쉽고 넓어지기 때문이다. 글에 예시나 예화를 넣은 이유도 그렇다. 경험치는 감성과 함께 공감을 일으키며, 글에 부드러운 조미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미혼인 30대 직장인이 부모님과 함께 사는데 집에서 엄마가 이것저것 자꾸 시킨다는 것이다. 그게 짜증 나서 가끔은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몇 번 부르면 그때 천천히 대답하고, 시켜도 느릿느릿한다고 한다. 이런 것이 스트레스여서 상담을 요청하였다. 그때 이런 예화를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왜 결혼 전에도 자취를 하고, 혼자 원룸 생활을 하는지 아세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모른다고 한다. “이놈의 집구석!” 하고 나가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가지 않는 사람은 왜 나가지 않는지 아세요?”라고 했다. 역시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나가서 생활해 보면 수많은 생활비, 주부식비, 공과금, 월세 등으로 최소한 월 150~200만 원이 사라진다.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면 그 돈을 적금 부어도 큰돈인데, 나가서 생활하면 매월 공중 분해되는 돈이다. 그래서 나가서 생활해 본 사람은 나가지 않는다. 부모님을 조금만 도와드리면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데, 작은 이기심 때문에 서로 불행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하고 싶은 욕망을 갖는 것이 잘못이에요?”라고 묻는다. “하고 싶은 것은 언제든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욕망이 타인을 희생시키는 욕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부모님 집에서 월 150~200만 원 혜택의 권리는 누리지 않느냐? 그런데 그 혜택에 걸맞은 의무는 행하지 않고 있다. 그 의무를 행하기 싫다면 그 집구석을 나가면 된다.” 이렇게 말하니 단번에 이해를 했다. “아, 내가 집구석은 나가기 싫으면서 혜택은 누리려는 이기적인 심보를 가졌구나!”라고 이해하면서 웃는다. 욕망이 잘못은 아니다. 욕심이 화를 부른다.
사람이 변화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안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 더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다만 그 원리를 모른다. 기억된 언어, 기억된 지식은 안다. 그러나 그걸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된 언어는 모른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기억은 누구나 있다. 그것은 해야만 한다는 방법의 지식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는 심도 있게 모른다. 그 원리가 자신의 행복이다. 타인을 해롭게 해서는 자신의 행복을 순간적으로만 얻는다. 마치 마약과 같다. 그러나 타인을 이롭게 해서 얻는 행복은 친환경 농산물이다.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놈의 집구석!”이라는 단어의 재해석과 비유를 통하여 단번에 이해하였다.
언어란 이렇게 이론으로 인지한 해석을, 체험을 통하여 몸으로 체득한 경험이 자신의 것으로 재해석될 때, 언행일치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게 지혜다. 성경은 이러한 과정을 ‘되새김질’이라고 하였다. 맥락이 있는 언어를 ‘사유(思惟)’의 언어라고 한다. 둘 다 같은 의미다. 재해석은 ‘사유(思惟)’를 할 때 만들어진다. 소제목을 만드는 것은 본문의 내용을 여러 번 거듭 읽는 과정을 통하여 핵심을 찾아내는 시간이다.
이렇게 소재는 상담을 낳고, 상담은 주제를 낳는다. 주제는 글을 낳고, 글은 책을 만든다. 그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영혼의 언어다. 그 영혼의 언어들이 모여 인류는 문명을 개척한다. 더 나은 미래로.
조나단 갈매기는 그 문명을 찾아 더 나은 세상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