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은인 선생님

고2 영어 담임 선생님

by 행복스쿨 윤정현

항상 그늘진 곳 그래서 주눅 들어 있던 마음에 따뜻한 빛을 비춰주신 분이 계신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학교는 나와 먼 거리에 있었다. 마음으로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때까지 친구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학교에서는 존재감이 없었다. 초등, 중등 동창회에 갔더니 “네가 우리 반이었는지 몰랐다.”고 하였고, 수학여행 가서 찍은 사진 보고 알았다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도 사귀기 어려워 멀고 먼 존재였는데, 선생님의 존재는 더욱 어려웠다. 어릴 적 초등학교 등교할 때 기억이 난다. 누나 뒤에 숨어서 교실에 들어갔던 아련한 기억이. 친구들도 사귀기 어려워하던 나는 선생님은 더 무서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때는 회초리와 손바닥으로 때리는 선생님도 많았다. 그래서 더 무서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선생님에 대한 존재를 깨뜨려주신 분이 고2 영어 담임 이시다. 학기 초 반장을 뽑는데 각자 추천하라고 하신다. 몇 명을 선출하였는데, 생활기록부를 펼쳐보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직접 추천하셨다. 깜짝 놀랐다. 아마 성적이 상위권이라서 추천했던 것 같다. 그때 가슴은 콩닥콩탁 뛰기 시작했다. 반장은커녕 임원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추천해 주신 것은 감사했지만 불안감만 커졌다. 각자 앞으로 나와서 소견을 발표하라고 하였다. 그 후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나의 발표 시간이었다.


“이렇게 반장 후보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능력이 부족해서 반장의 역할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기 다른 후보를 투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후보에서 사퇴했다. 결국 다른 친구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는 나도 모르는 따뜻한 빛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무서워만 했던 선생님이라는 존재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마음이 존재감을 충족시켜 주었던 것 같다. 그 후부터 선생님은 가끔 교무실에 부르기도 하였고, 이것저것 심부름도 시켰다. 그런 심부름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있을까?”


사기(史記)에 보면,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아름다워 지려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다는 것, 사람은 아마도 그런 존재감의 행복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인연은 고3이 되어 다른 반으로 갔어도 계속되었다. 선생님을 통해 다른 반 공부 잘하는 친구하고도 같이 만났다. 선생님께서 수유동에 사셨는데, 우리를 집에 초대하여 맛있는 요리도 해주셨다. 그때 만난 친구하고는 지금도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둘이 만나면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영어 담임 선생님 이야기를 한다.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고, 참 고맙고 훌륭한 선생님이셨다고.


한 번은 수업시간에 영어를 안 가르치시고, 인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칠판에 아래의 영어 문장을 쓰셨다. 또 인생에 대한 20여 가지 질문을 적어 놓으시고, 그것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부분이요, 전체의 일부이다.”


시인 존 던의 명상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너희는 뚝 떨어진 홀로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함께 어울려 돕고, 나누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No man is an island” 이 구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느 누구도 섬처럼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섬처럼 살았던 것이 일맥상통한 느낌이라서 더 다가왔고, 기억에 뿌리 깊이 남았던 것 같다.


질문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직업을 갖고 싶으냐, 결혼은 어떤 사람과 하고 싶으냐, 자녀는 몇 명을 낳을 것이냐, 어떤 집에서 살고 싶으냐, 어떤 나라에 여행을 가고 싶으냐, 너의 미래에 실현시키고 싶은 꿈은 무엇이냐 등등 자신의 미래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주신 것 같다. 그때의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수업시간 인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은 그 옛날 수업 방식에서는 만나볼 수 없었다. 그분은 내게 진정한 스승이셨고, 멘토와 같은 분이셨다.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이 주신 향기에 걸맞은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가끔 되새겨 본다. 그때 기록했던 노트는 그 후로도 10년 이상을 간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사를 다니면서 분실하였다.


선생님께서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인정해 주셨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주변에서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한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꺼져가는 등불에 불을 밝히는 기름이 될 수 있으니깐. 이런 깊은 향기를 느끼지 못했던 시절은 몰랐다. 선생님께서 주신 기억을 되새길수록 그분께서 주신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었는지 지금은 안다. 그래서 상담을 하거나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는 법을 알았다. 예전에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많이 지배했었다. 그러나 그 작은 향기가 얼마나 커다란 나비의 날갯짓인지 지금은 안다. 한 사람을 향한 따뜻함이 얼마나 위대한 삶이라는 것을...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하는 자이다.” (쉰들러 리스트)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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