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 영성의 진화

‘없음’에서 시작되는 진실한 힘에 대하여

by 행복스쿨 윤정현

서문 : 존재의 전환, 수행의 초월


의식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이상 ‘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무엇을 얻거나 성취하기 위한 탐색은 서서히 그 의미를 잃는다.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은 단지 ‘있음’의 고요한 감각, 모든 갈망을 넘은 자리에 드러나는 존재의 본질이다. 이는 어떤 종교적 신념이나 수행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의식의 장(場)으로 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존재의 진화 현상이다.


존재의 전환이란 인간이 단지 육체적 만족만을 위한 존재가 아님을 인식하는 단계다. 그때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생존과 생계 이외에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과 질문을 자문하는 단계다. 이때부터 무의미한 만남이나 대화에서 공허함을 느끼고 멀어진다. 가치 추구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영혼이 추구하는 채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 진심과 진실, 순수의 세계를 맛본다. 그리고 단지 ‘있음’에서 맛볼 수 없었던 ‘없음’이 주는 존재의 ‘있음’ 세계로 여행을 시작한다.


본론 : 자아의 있음에서 무위의 없음으로의 진화


1. 없음의 자리: 존재의 맨살

존재가 깊어질수록, 인간은 본질적으로 ‘없음’에 도달하게 된다. 이 ‘없음’은 공허나 무의미함이 아니라, 모든 외적 동일화에서 벗어난 순수한 의식의 장이다. 이 자리에는 갈망, 되고자 함, 주장, 설득이 모두 사라진다. 존재는 그 자체로 충만하며, 시간과 행위, 목적은 무의미해진다. 노자의 무위(無爲)는 이 지점에서 실현된다.


무위(無爲)란 하지 않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함’ 속에 ‘자아’가 사라진 상태다. 많은 사람들이 선을 행함에 있어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 자아의 우상화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구역질 나게 한다. 겉으로 보이는 선(善)의 민낯을 들여다보면 위선과 가식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맨살이란 그 상태가 사라진 없음의 자리, 곧 무위(無爲)다. 그때 받는 자와 함께 주는 자도 내면이 충족된 상태, 곧 진정한 행복의 채움을 받는다. 그게 순수다. 예수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어라.’ 말씀하신 것처럼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동심의 순수함으로 삶을 살아가는 위치로 진화된다.


2. 의식의 침묵화와 실천의 무위화


‘없음’의 자리에 이른 존재는 점차 언어 이전의 이해와 행위의 실천으로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갈등이 언어에서 오기 때문이다. 언어 이전의 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내면의 의도, 곧 속마음을 읽어내는 배려로 사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어!”라는 것처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먼저 알아주고 이해하려는 태도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말이 줄고, 그로 인해 순간을 면피하려는 잔머리를 쓸 일이 없어 피곤도 줄어든다.


이성적 사고는 여전히 작동하지만, 더 이상 중심이 되지 않으며, 분별은 존재하되 갈등은 줄어든다. 행위는 의도를 따르지 않고, 흐름 속에서 저절로 나타난다. 이는 어떤 초월적 능력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본래적 작동 방식이 드러난 결과다.


3. 자연스러운 영향력과 비개입의 인도


진정한 존재는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으며, 설득하지 않고도 주변에 자연스러운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존재는 능동적 겸손의 자세로 살아가며, 등대처럼 그 자리에 머무름으로써 준비된 이들을 이끈다. 말과 행동, 심지어 침묵조차 치유로 작용한다. 이는 외부를 통제하거나 조작함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작용하는 영적 영향력의 양상이다.


문제의 발생이나 갈등은 개입으로 나타난다. 의도적인 개입, 이는 자아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려는 의도의 발로다. 개입을 줄이는 것만 해도 문제는 많이 줄어들고, 해결된다. 말을 끊는 것이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끼어드는 것은 모두 개입이다. 잔소리와 간섭도 똑같다.


왜 선한 영향력이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까? 그건 비개입적인 개입이기 때문이다. 비개입이란 곧 자연스러운 영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활동을 말한다. 손흥민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성인이나 스포츠인들을 떠나 어린아이에게도 사랑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가장 잘난 위치에 있으나 자신을 드러냄이 없다. 그의 영향력으로 자신의 손길이 닿는 한 겸손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때문이다. 손흥민은 아래에서 위로 섬기는 겸손이 그의 선한 눈이나 행동에 배어 있다. 그게 상대방을 차분하게 하면서도 행복하게 하는 마력이다.


4. 경계의 해체와 의식의 통합

깊어진 존재는 결국 자기와 타자의 경계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나’라는 개별 주체의 정체성은 옅어지고, 삶은 점차 우주적 장의 일부로 느껴진다.


이러한 의식은 다음의 특성을 갖는다

- 시간과 공간의 비선형적 체험

- 비언어적 느낌과 직관을 통한 인식

- 물리적 거리와 무관한 내면의 연결성

- 나와 네가 아닌 우리로서의 공존지향성


이것은 더 이상 ‘개인의 성장’이 아닌, 존재 전체의 확장이다. 이것이 인류애요 공존이다.


지금의 전쟁은 ‘나’와 ‘너’라는 경계의 구분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국가, 인종, 민족, 종교와 같은 갈등은 지속 확산된다. 이 갈등은 지역이나 성별, 소수자, 장애인, 약자를 넘어 가족 내에서도 하나 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경계를 허무는 것은 너와 내가 하나임을 손흥민과 같이 몸에 배어 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삶이다. 남수단 톤즈 마을에서 그분이 살았던 삶은 예수의 생애였다. 그분은 종교적 사랑을 넘어, 의료를 통한 수많은 생명을 살렸고, 교육을 통한 삶의 질을 바꾸는 위대한 생애를 사셨다. 그 고귀한 삶을 다큐 영화로 나온 것이 ‘울지마 톤즈’였다. 불교의 법륜 스님은 그와 같은 선한 영향력을 또 다른 방향에서 행사하고 계신다.


봉사 활동 다닐 때 교회에 다니냐고 여쭈어본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아니라고 하였다. 예전에는 다녔지만 지금은 종교가 없다. 종교가 있는 사람만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깨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구분이나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계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사는 분들이 계시지만, 경계를 허무는 선한 삶은 진화한 인간의 당연한 의무다. 손흥민이나 방탄소년단, 김연아와 유재석 같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그런 경계를 허물며, 우리 사회에 모델링이 되고 있다.


5. 이름 없는 신성(神性)과 익명성의 힘


진정한 힘은 드러내지 않음에서 발생한다. 이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한 목적이 없기에 모든 목적을 통과시키며, 결과에 집착하지 않기에 모든 결과를 초월한다. 여기서의 신성(Divinity)은 개념이 아닌 에피파니(Epiphany)이며, 설명이 아니라 그대로의 존재 방식이다. 신적 삶, 곧 조건 없는 사랑의 실현이다. 그것은 외형이 아닌, 투명한 삶으로 발현된다. 이 자리에서 영혼은 겸손과 실천, 고요와 자유로 드러난다.


에피파니(Epiphany)란 신의 성품이 어떤 삶인지 현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적 자각이나 진리의 드러남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셨고, 그에 앞서 붓다가 보여준 삶이다. 우리 또한 그분처럼 선한 삶을 살 때 나타나는 현상이 에피파니(Epiphany)다. 우리는 그런 수많은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뛰어드는 삶이다. 일본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 숨진 이수현 씨가 그렇다. 고속도로에서 심정지로 운전자가 쓰러져 중앙분리대를 부딪치면서 가고 있는데, 보조석 창문으로 뛰어들어 생명을 구한 사람도 그렇다. 그분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도 모르게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라고 말한다.


에피파니(Epiphany)란 신의 성품과 같이 아름다운 삶을 살면서도 자아를 드러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곧 익명성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물론 타의나 필요에 의해 그런 선한 영향력은 드러나야 하고, 그때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확장성을 가져온다.


결론 : 하나됨의 자리에서

이러한 존재 상태는 자기 자신을 잊고, 질문 없이 머물며, 의도 없이 살아가되 가장 깊이 세상을 비추는 삶이다. 인류와 우주는 더 이상 나뉘어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더 필요하지 않다. 남는 것은 다만 하나됨의 진실, 그리고 고요한 영향력이다.


우리는 지구에 잠시 여행 온 나그네다. 왜 왔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옳은지를 찾아내고, 그 찾아낸 진리를 바탕으로 구현해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의 존재 명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야!’라고 고증이나 지나간 성현 그리고 종교인들이 아닌 보편적이면서 평범한 사람들로 인해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을 배우기 위해 왔고, 행복이 무엇임을 체험으로 증명하러 왔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사들의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아느냐?”라고. 천사들은 부족함이 없다. 다 가졌다. 영체이기에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 않고, 춥지 않으며, 죽지 않는다. 이별도 없고, 고통도 없다. 그래서 슬픔이나 눈물도 없다. 이는 ‘없음의 상태’를 모른다는 의미다. ‘없음’을 모르면 상대적인 ‘있음’도 모른다. 비교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기쁨이나 나눔의 행복도 모른다. 이별이 있기에 가능한 만남의 축복도 모른다. 미움이나 고통을 모르기에 사랑도 모른다. 상대성의 지구는 양극성, 곧 반대의 것을 통하여 반대의 것을 배우는 성장의 학교다.


우리는 ‘사랑’과 ‘행복’을 배우기 위해 온 존재들이다. 그것이 ‘왜’ 왔는지에 대한 명제다. 그리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하므로 영혼은 채움을 받는다. ‘그것만이 사랑과 행복은 무엇이다.’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제다. 이때 우리는 경계가 없는 ‘하나됨’의 상태에 이른다. 그 무엇으로도 허물 수 없는 경계가 저절로 허물어진다. 우리는 본래 하나의 세계에서 여행 온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존재의 고요한 자리에,

그 안의 신성에,

존경을 담아 고개 숙인다.

신성은 말없이,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

나마스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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