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시 짓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깬 제자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물었습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집에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방이 하나 있다. 문패조차 달지 못한 그 방의 이름은 '아이'다.
새벽녘, 문득 나와 미래의 남편을 반반씩 닮은 아이를 상상해 본다. 그의 눈매와 나의 입술을 가진, 사랑의 결실. 하지만 그 상상은 10달 동안 내 배 아파 아이를 품는 만삭의 경이로움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난다.
단순히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생물학적 사실을 넘어, 이것은 내 유전자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한다는 실존적 허무함이다. 내 핏줄을 이어받은 생명을 단 한 번도 안아볼 수 없다는 것. 이 명백한 불가능성 앞에서 나는 자주 비통해졌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설계도가 주어졌을까. 왜 나는 남들과 다른 몸을 입고 태어나, 평범한 행복조차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남겨둬야 하는가. 원망은 깊고, 슬픔은 끈질겼다.
그러나 입양을 생각하면 또 다른 현실적 고민이 고개를 든다. "엄마, 나는 왜 엄마랑 다르게 생겼어?"라는 질문에 나는 의연하게 답할 수 있을까. 입양 사실을 알게 된 아이가 겪을 혼란과 상처를 내가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남편에게 평생 짊어지게 할 죄책감은 또 어찌할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들이 그 빈 방을 불안으로 채운다.
한참을 울고 난 뒤, 다시 냉정한 건축가의 눈으로 현실을 본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며, 이미 시공된 기초를 들어낼 수는 없다. 지나간 과거와 바꿀 수 없는 신체적 한계에 매달리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집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방의 용도를 바꾸거나 새로운 가구를 들여야 한다.
나에겐 아직 선택지가 남아 있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를 입양해 사랑으로 키우거나, 훗날 법률이 개정된다면 대리모를 통해 남편의 아이라도 품에 안아보는 것.
내 마음의 '빈 방'은 지금은 텅 비어 있고 가끔은 시리도록 춥다. 하지만 언젠가 이 방도 누군가의 온기로, 혹은 전혀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채워질 날이 올 것이다. 비록 그 꿈이 내가 처음에 꾸었던 '달콤한 꿈'과는 조금 다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