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기
여름에 물난리가 나면 회자되는 사진이 있죠. 1970~80년대 사진으로 기억하는데, 서울에 물난리가 나서 성인 남자 가슴 높이까지 물이 들어찬 도로를 헤치고 가는 사람들을 찍은 것 말입니다. 남녀 할 것 없이 이미 몸은 물속에서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머리 위로는 서류가방 혹은 책가방이 잠기지 않도록 높이 들고서 가는 풍경이죠. 폭우나 폭설, 어떠한 천재지변이 닥쳤을 때 '그래도 출근은 해야지' 혹은 'K-출근' 같은 밈으로 종종 쓰이는 짤인데, 요즘의 저도 마찬가지 심정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록 출근 길이 물에 잠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출근은 해야지 하는 생각은 같았을 겁니다. 고지대에 있는 사무실로 가기 위해 등산화를 챙겨 신고서 오후의 눈소식에 우산을 챙겨 나와 조금이라도 빨리 버스를 타야 덜 붐비기 때문에 뛰다가 미끄러지기도 하고 결국 신발끈이 풀려 사무실에 와서야 다시 묶었던 것처럼요.
요즘 회사들은 재택근무의 비중도 늘었고, 주 4일 근무를 도입하는 회사들도 는다지만 공공은 달랐습니다. 정시 출근이 필수죠. 우스갯소리로 회사에서는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공공에서는 열심히 일하면서 야근하고 다음날 지각하는 직원보다, 근무시간에 일은 안 하지만 정시에 출근하는 직원이 더 인사고과가 좋더라. 이렇게 종종 습관처럼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면 현실을 자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처럼 큰 혼동이 와요. 돈을 벌어서 어떤 소비를 하거나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돈이 있는 것이고 돈이라는 것을 방 한 구석에 켜켜이 쌓아놓으려고 돈을 버는 게 아니듯, 회사에 다닌다는 기록을 남기며 출근과 퇴근 도장을 찍기 위해 회사에 다니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죠.
난 왜 이렇게 사력을 다해서 출근을 해야 할까? 더 나아가서 난 원래 무엇을 하기 위해 회사에 온 것인가?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왔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레저형이 아닌 생계형 직장인으로서 근로소득으로 1인가구를 오롯이 부양하고 있거든요. 한편으로는 지금의 직장이 저의 선택지 중에서는 꽤나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문화예술직종에 있으면서, 작지만 안정적으로 급여가 나오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공무원은 아니지만 쉽게 잘리지도 않죠. 엄청나게 좋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최악이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돈 벌겠다고 10년을 넘게 일할 수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버텨낸 이유는 뭘까? 난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거지?라는 물음에 스스로 처음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저의 처음을 함께 해주었던 많은 분들이 생각났어요.
늘 팔리지도 않는 LP판을 매일 같이 들고 나와서 물건은 팔지도 않고서 나랑 수다만 떨었던 대흥동 김 씨 아저씨, 설치해 두었던 텐트가 태풍에 부러져 내가 크게 다쳤을 때 내 손을 잡고 병원에 데려간 그 김 씨 아저씨. 한 겨울에 정원을 꾸미겠다고 혼자서 끙끙거릴 때 몇 달간 밤늦도록 정원을 함께 꾸며준 작가님, 추운 날 감기 걸린다면서 팔아야 하는 목도리를 둘러주신 파키스탄에서 오신 아주머니, 복날에 장터 한가운데 솥을 걸고 닭죽을 함께 끓여서 같이 먹자고 초대했던 염리동의 할머니들. 10년도 넘은 일이라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도 없는 풍경과 사람들이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그 사람들은 콧날이 시큰할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이 사람들한테 잘해야겠다, 이런 자리를 더 많이 만들고, 더 좋은 자리들 만들어서 다 같이 잘 지내고, 같이 재미나게 놀 수 있는 걸 기획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네요. 그래서 매일같이 장을 여는 곳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런 욕심이나 열정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작은 불씨라도 되살려서 앞으로 어떤 일이 될 지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일기들로 기록이라도 남겨서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많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