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쓴 글을 다 지워버렸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잘 쓰고 싶어서 유명한 작가가 쓴 글쓰기에 대한 책은 닥치는대로 다 읽어 보았습니다. 그 중 스티븐킹, 유시민, 장강명 작가의 책이 기억납니다.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쓸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스티븐킹이 될 수 없는 것 또한 명백하고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깊이 파면 깊이 팔수록 재능의 결핍을 느낍니다. 산을 등반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하는데요, 고지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누구나 갈 수 없는 에베레스트 정상처럼 말이죠. 저는 등산을 좋아하지만, 에베레스트 등반은 엄두도 못 냅니다. 관악산 입구도 밟아보지 못했는 걸요. 대신 저는 집 앞에 있는 국사봉을 좋아합니다. 국사산이라 부르지 않고, 국사봉이라 부릅니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그 높이가 높지 않고, 규모도 작으니까요. 그래서 봉우리라고 합니다. 저는 그 봉우리에 자주 오릅니다. 그곳에 가면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의 색깔, 날씨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흙의 수분감을 느낄 수 있어요. 그까짓 뒷동산 오르내리면서 감히 산을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냐는 소리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냥 내가 좋아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글 앞에서는 늘 부족함을 느끼고, 아니, 극단적으로는 작가 소개에 에세이스트라고 쓴 걸 지워야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네요. 글을 못 쓴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요. 책이 잘 안 팔렸습니다. 단순히 글을 쓰는 것과 대중의 사랑을 받는 글을 쓰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글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저는 한 때 소설가를 꿈꿨고, 글로 먹고 사는 자신을 늘 상상했어요. 하지만 그 꿈은 고이 접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쉽습니다. 국사봉도 충분한데 말이죠. 왜 스스로 에베레스트 정상만 고지로 인정하면서 자신을 다그치고 있는 걸까요. 국사봉 꼭대기에 있는 운동 기구에 올라타 다리를 앞 뒤로 휘저으며 생각합니다. 국사봉 정상에 오르니 참 좋네. 가볍게 다리를 풀 수 있는 기구까지 있으니 더 좋네. 에베레스트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허리돌리기, 공중 걷기, 거꾸리 같은 기구가 국사봉 정상에는 넘치도록 많습니다.
저는 국사봉 같은 글을 씁니다. 국사봉은 높이가 높지 않고 규모가 작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부담없이 오르내리며 가볍게 운동을 즐길 수 있고, 어린 아이들도 즐거이 와서 숲 체험을 합니다. 우리 가족 모두 국사봉으로 꽃 구경, 나무 구경을 하러 가벼운 운동화 차림을 하고 집을 나서요. 저는 그런 작가입니다. 아무 부담없이 후루룩 펴서 후루룩 덮을 수 있는 책, 그런 글을 쓰는 사람. 고어텍스가 아니라 아무 티셔츠나 걸쳐 입고 가도 언제나 오름직한. 편한.
국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