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1편. 국제개발에 대한 기록

떠날 수 있는 용기

by 블라이
케냐, 국제개발현장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모잠비크에서의 삶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나였기에, 케냐에서의 삶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돌아보면, 케냐만큼 다양한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은 없었다. 그만큼 고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많이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케냐에서 했던 일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과 느낀 점들을 나눠보고자 한다.




케냐 소개


케냐는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광활한 사바나와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풍요로운 자연을 자랑한다.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관광업이 발달했으며, 최근에는 기술 분야도 빠르게 성장하여 동아프리카의 경제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경제적 안정성 때문에 나이로비는 '아프리카의 작은 유럽'이라 불릴 만큼 발달했고, 도심 한가운데에는 높은 고층건물들로 현대적인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유엔환경계획(UNEP)과 유엔인간주거계획(UN-Habitat) 같은 주요 국제기구와 코카콜라, 구글 등 글로벌 기업의 아프리카 지역 본부가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로비의 푸르름과 화려함 뒤에는 극심한 빈부 격차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도시 외곽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빈민가 중 하나인 키베라(Kibera)를 포함한 여러 빈민가가 만들어졌다. 이곳들은 빽빽하게 들어선 판잣집과 열악한 위생 환경, 그리고 쓰레기 쌓인 언덕 속에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케냐는 주변국인 남수단,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유입되는 수많은 난민들을 수용한다. 이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난민 캠프 중 하나인 다다브(Dadaab) 난민 캠프와 카쿠마(Kakuma) 난민 캠프가 운영되고 있다. 이 캠프들은 수십 년간 수십만 명의 난민을 보호해 왔다.


또한 케냐는 적도에 걸쳐 있지만 국토의 북부 건조 지대에서는 심각한 물 부족을 겪는다. 장기간 지속된 가뭄과 기후 변화,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 위기가 심화되면서, 난민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들까지 물과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다. 이처럼 케냐는 경제적 성장을 이루는 동시에, 빈부격차, 기후 위기, 난민 문제라는 복잡한 사회적 과제를 안고 있다.


푸르른 들판이 펼쳐진 마사이마라, 그리고 사막화가 진행되는 건조 지대




케냐에서 한 일


나는 한국국제협력단 소속으로 케냐에 파견되어, 한국 정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국제개발사업을 수행하는 NGO, 기업, 국제기구 파트너들의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주요 업무는 사업 제안서를 검토하고, 진행 중인 사업을 모니터링하며, 종료된 사업을 평가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직접 사업을 디자인하거나 관리해 왔다면, 케냐에서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조금 사업을 평가하고 개선점을 찾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케냐 정부, 국제기구, 일반 기업, NGO들과 협업하며 보건, 식수위생, 기후변화, 교육, 기술, 농업, 소득증대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경험했고, 그만큼 국제개발에 대한 지식과 시야도 한층 넓어졌다.


파트너 사업의 모니터링 및 평가를 위해 케냐 나이로비의 슬럼가, 난민촌, 지방 여러 사업지들을 방문했고, UN 운영 비행기와 자동차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많은 것을 본 만큼, 또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고 거기에 압도되기도 했다.


내가 모니터링 및 평가했던 사업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몇 개 있다.


ㅣ케냐 슬럼가 아동 영양개선 사업


나이로비 슬럼가에는 아동 3분의 1이 영양실조를 겪는 심각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아이들이 설사병에 걸리는 경우도 잦았다. 파트너 사업 모니터링을 위해 도심 인근 사업지를 방문했을 때는, 코를 찌르는 쓰레기 냄새와 눈이 시릴 정도의 환경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불과 도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런 현실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시장에는 오래 방치된 듯한 고깃덩어리가 걸려 있었는데 고기 표면 전체를 파리가 뒤덮어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일 정도였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부모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터에 나가야 했기에 데이케어 센터에 맡겨졌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리곤 했다. 데이케어 센터에서 만난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한국 정부가 지원한 국제 NGO의 영양 개선 사업은 큰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일회성 간식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위생적인 건강 간식을 개발해 지역에 납품하며, 부모와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위생 환경 개선 교육까지 이어지는 사업이었다. 아이들이 장기적으로 안전한 먹거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설계한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


이 사업을 통해 슬럼가 아이들이 조금 더 건강하고 밝게 자라나길 소망했다.


l 케냐 난민 캠프 식수위생 사업


업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난민캠프 방문이었다. 케냐는 국경을 넘어온 수많은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카쿠마 난민 정착촌은 1992년 수단 내전으로 시작해, 지금은 남수단·소말리아·우간다 등 22개국에서 온 수십만 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난민 유입이 계속되면서 수용 한계를 넘어섰고, 결국 UNHCR은 난민과 현지 주민이 함께 살 수 있는 ‘칼로베예이 정착촌’을 새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내가 본 아이러니는, 국제사회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는 난민 캠프보다 지역 주민들이 더 가난해 보였다는 점이었다. 캠프 안에는 학교와 보건소, 식수 시설이 있었지만, 바로 그 주변 마을 주민들의 삶은 훨씬 더 열악했다. 마을 출장길에서 메말라 버린 강바닥의 작은 웅덩이에서 물을 긁어내던 한 소녀의 뒷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순간 느낀 먹먹함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정부는 난민뿐 아니라 호스트 커뮤니티 아동들도 안전한 식수와 위생 환경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국의 식수위생 전문 NGO 사업을 지원했다. 학교에 우물과 정수 시설을 설치해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손 씻기 시설과 위생적인 화장실을 확충하여 위생 환경을 개선했다. 이를 통해 전염병을 예방하고 아동들의 건강한 생활을 돕는 데 기여했으며, 위생 교육을 통해 일상 속 건강한 습관을 확산시켰다. 특히 NGO들은 난민과 현지 주민 양쪽을 위한 별도의 사업을 통해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했고, 수혜 주민들이 직접 식수 시설 유지 관리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였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주민들의 신뢰였다. 우물을 파다가 물이 나오지 않으면 포기하는 NGO들도 많지만, 이곳은 끝까지 물이 나올 때까지 시도해 주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사업 평가 방문 시 만난 주민과 학생, 교사 모두가 큰 만족을 표현했고, 그들의 눈빛에서 신뢰가 느껴졌다. 이렇듯 하나의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주민들의 신뢰를 받으며 끝까지 사업을 해나가는 NGO들에 큰 감명을 받았다.





케냐에서 배운 것


모든 사업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도움을 주고자 시작된다. 그러나 모든 사업이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며, 수치상 성과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사업이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그래서 평가는 단순히 수치로만 하는 양적 평가가 아니라, 그 과정과 맥락까지 담아내는 질적 평가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여러 사업을 관찰하며 배운 점은, 사업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성과 중심의 활동가는 목표 달성과 결과에 집중한다. 주민을 동원하고, 기한 내에 수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주력한다. 보고서는 성공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정작 주민들은 단순히 동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활동가는 결과가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보지 않는다.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서 주민을 존중하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주민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그 느린 과정을 통해 주민들과 함께 나아가며 신뢰를 쌓는다.


성과 중심의 활동가는 단기간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과정 중심의 활동가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마을을 세운다. 결국 이는 사업의 궁극적 목적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기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민을 존중하고 그들이 지속가능하게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방식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치적인 성과 보고에만 머물지 않도록 질적인 부분을 함께 보려 노력했다.


다음 편에서는 일 이외에 케냐에서 경험한 것들, 그리고 고민들에 대해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