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2편. 상실과 회복

돌아가지 않을 용기

by 블라이


해외 살이 10년 차, 해외에서 맞이한 상실


해외에서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은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일 것이다. 네덜란드 석사생으로서 케냐에서 출장 중이다 맞이한 아버지의 부고는 한동안 나를 무너뜨렸다.


아버지의 부고


갑작스러운 소식을 남동생을 통해 들은 나는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코로나 시기였기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나갈 수 없었고,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후 음성 판정을 기다려야 했다. 공항에서 울고 있던 나를 안쓰럽게 여겨주셨는지, 검사 결과는 안내받은 시간보다 훨씬 빨리 나왔다.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뛰어오던 직원분의 모습은 아직도 감사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소중한 고향 친구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나를 마중 나와 주었다. 덕분에 발인 전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장례식장은 조용했고, 방문객도 최소화되었다. 아버지는 원래 몸이 불편하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새로 구입한 산으로 향하던 길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흐르는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십여 년 넘게 연락하지 않고 지냈음에도, 아버지라는 존재의 영원한 상실은 실로 큰 슬픔이었다.



ㅣ 아버지에 대하여


아버지는 나를 포함한 삼 남매의 교육비나 생활비를 지원한 적이 없었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가난을 모르고 편하게 사셨음에도,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를 만났을 때, 아버지는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고, 자기 이야기, 엄마 흉만 보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손을 벌린 적 없었다. 어릴 적 품었던 원망과 미움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옅어졌고, 어느 순간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삶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남동생은 남자였고, 그 집안은 남자가 귀한 집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이 성인이 된 이후부터 연락을 하고 만났다고 한다. 한 번은 케냐에 있는 내게 동생이 연락해 아버지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나는 케냐 오지에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해외에 있을 예정이라며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그 말을 들었을 때, 언젠가 나이가 더 들면 한 번쯤은 찾아뵐까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사라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는 슬픔을 감내할 시간도 없이, 석사 논문 제출과 졸업을 위해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네덜란드


ㅣ 네덜란드 석사 생활 마무리


네덜란드에 돌아온 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논문을 제출했고, 졸업까지 약 한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기숙사 방 안에서 은둔하듯 지내며, 마음에 입은 화상을 잠재우기 위해 다시 요가를 하고 일기를 쓰며 버텨보려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원래는 졸업 후 바로 한국에서 취업할 계획이었지만, 나아갈 힘과 의지를 잃어버려 우선 네덜란드에 남기로 했다.


나는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바로 캄보디아로 해외봉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찍은 졸업 사진이 없다. 석사 졸업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족들이 오기 어려웠고, 아버지 부고로 모두 힘든 상황이었기에 초대하지도 않았다. 이탈리아에 사는 언니는 일로 인해 졸업식에는 오지 못했지만 졸업 전 나를 보러 헤이그까지 날아와주었다. 그때 언니와 시간을 보내며 서로 힘을 얻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졸업을 앞두고,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인턴십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네덜란드에서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ㅣ 국제기구 인턴 생활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C)는 전쟁범죄나 인권유린을 저지른 개인을 국제적으로 재판하는 법정이며, “국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세계 최초의 상설 국제 형사 법원이다. 2002년 로마 규정(Rome Statute)에 따라 설립되었고, 이곳을 통해 잡힌 범죄자는 네덜란드 헤이그 바닷가 스헤베닝언(Scheveningen) 형무소에 수감된다.


네덜란드를 포함한 해외에서는 LinkedIn이라는 잡 매칭 플랫폼을 통해 기업과 개인이 자유롭게 구직·구인을 한다. 석사 과정 중 LinkedIn 활용법을 소개받은 적이 있어 계정을 개설했는데, 그로부터 한두 달 뒤 ICC에서 인턴십 제안이 왔다.


ICC는 국제개발 보다는 국제관계 분야에 더 가까웠고 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제기구에서의 경험이 앞으로 도움이 될 것 같아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6개월간의 인턴십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부고 이후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바로 취업하기보다 인턴 일을 하며 회복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처음 ICC 건물에 들어섰을 때는 삼엄한 경비와 철저한 보안 검사를 거쳐야 했다. 중앙 건물은 호수로 둘러싸여 있었고, 높고 웅장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실내에는 파트너 국가들의 국기와 ICC 판사복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우리나라 전통 북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낯선 공간 속에서 익숙한 상징을 마주하니, 잠시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참고로 한국은 ICC의 회원국으로 ICC는 2003년 2월 1일부터 한국 영토에서 발생한 국제범죄나 한국 국적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ICC의 파트너 국가로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관련 법률을 제정해 ICC와의 협력을 제도화해왔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서 ICC의 활동 성과를 소셜 플랫폼에 게시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는 일을 맡았다. 근무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은, 무급 인턴들이 상당히 많고 그들이 꽤 많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인턴은 1년 넘게 일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너무 프로페셔널해서 직원인 줄 알았다. 대부분은 경력이 짧았고, 나처럼 5년 넘게 일한 후 온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곧, 왜 나에게 연락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ICC는 한국이 파트너 국가 중 하나인데, 한국인을 뽑기가 어려워 인턴을 받아 어떤 방식으로 더 유치할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한국은 유럽과 거리가 멀고, 이곳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직접 인턴과 직원을 ‘헌팅’하는 경우도 있다. (국제기구에 관심 있는 사람은 꼭 지원해보길)


물론 나는 법학적 배경이 없었고, 근무를 하며 국제기구 취업의 한계를 느껴 이곳에서의 일자리에 큰 관심은 없었다. 채용 절차는 매우 느리고 복잡했으며 (최소 1년 ~ 2년 소요), 정규직은 적고 무급 인턴을 많이 뽑아 그들을 통해 업무를 감당하는 구조였다. 들어가는 문턱은 좁고 요구는 많지만, 일자리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ICC에서의 짧았던 3개월 인턴 생활은 지금 돌아보면 참 감사한 시간이었다. 힘든 시기에 마음을 되돌아보며 회복할 여유를 얻었고, 본격적인 취업에 앞서 숨을 고를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이 경험은 네덜란드에서의 취업 기회를 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턴 생활 중 틈틈이 이력서를 제출했는데, 국제기구 인턴 경력이 이력서에서 눈에 띄는 강점이 되었던 것 같다.


네덜란드에서 인턴을 하며 자연스럽게 ‘한국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일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구직 활동의 범위를 네덜란드까지 넓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인턴 생활 3개월 만에 감사하게도 한국의 한 국제개발사업 전문 연구소와 네덜란드 소재 아프리카 대상 사회적 기업 두 곳에서 동시에 제안을 받았다.


급여, 환경, 성장 가능성 등 여러 면을 비교한 끝에, 결국 네덜란드 기업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나는 다시 네덜란드에 남기로 했다.


다음 편: 네덜란드 3편. 취업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