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k Lessons by Han Kang
네덜란드에 살면서 영어책 서점에 가면 주로 관심 있는 해외책들을 골랐다. 그러다 작년,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영어책 서점이든 더치 서점이든 한강 작가의 책, 그리고 다른 한국 작가들의 책들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나는 한강 작가의 책이라고는 『채식주의자』만 읽었다. 사실 그 책은 너무 적나라하고 거북한 장면이 많아 즐겁게 읽지는 못했다. 그래서 한강 작가의 다른 책들을 선뜻 고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 집 근처 더치 책방에서 짧은 분량의 『Greek Lessons』(영어 번역본)을 보게 되었다. 몇 장 읽다 보니 영어로 적혀 있음에도 문체가 몹시 아름답고 내용이 짧아 보여 바로 구매했다. 그런데 웬걸, 다 읽는 데 3개월이나 걸렸다. 이유는 문장 하나하나의 깊이가 너무 깊어 생각으로 소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고대 희랍어 강의실에서 만나 교감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 없이 오로지 두 인간의 사랑과 상처에 관한 것이지만, 그 내면의 복잡함과 철학적 사유 때문에 읽기가 결코 쉽지 않다. 언어라는 것, 그리고 고요 속에서 더 깊이 교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주인공 여자는 열일곱 살 겨울, 이유 없이 말을 잃는다. 이후 결혼과 이혼, 양육권 상실이라는 개인적 상처를 겪으며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희랍어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잃어버린 말과 존재를 되찾는 길이 된다.
반면 남자는 독일에서 가족과 떨어져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친다. 그러나 그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며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언어를 가르치는 자가 빛을 잃어가고, 언어를 잃은 자가 죽은 언어를 배우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상실을 마주한다.
이들의 만남은 단순한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넘어선다. 서로의 결핍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고통을 드러내며, 동시에 언어와 침묵이 어떻게 삶을 지탱하는지 보여준다.
말을 잃은 여자
여자는 삶에서 두번이나 언어를 상실하는 비극을 겪는다. 네 살에 한글을 깨칠 만큼 언어 감각이 예민했지만, 그 예민함은 오히려 고통의 근원이 된다. 어느 날 언어와 관련된 악몽에 시달리며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들조차 혐오스럽다고 느낀다. 언어는 상처를 준다는 감정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자, 17세에 처음 말을 잃었다가 낯선 불어 단어 “비블리오테크(도서관)”를 접하며 겨우 언어를 되찾는다.
성인이 되어 어머니의 죽음, 이혼, 아이 양육권 소송 실패라는 참혹한 현실을 겪으며 다시 말을 잃는다. 그녀는 아이를 되찾고 싶은 절박한 마음으로, 낯선 언어, 곧 죽은 언어인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희랍어는 실용적 소통 기능을 잃었기에 그녀에게는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화석 같은 언어였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남자 강사는 유전 질환으로 인해 40세 전후에 실명할 운명을 지닌 채 고독하게 살아간다. 15세에 독일로 이주한 그는 한국어도 독일어도 불편한 경계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희랍어 만큼은 독일인 친구들 보다 뛰어났다. 그랬기에 희랍어를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업으로 삼았다.
그는 어렸을 적 청력을 잃은 여성과 사랑에 빠졌으나, 그 관계는 그가 그녀에게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요구하는 순간 파국을 맞는다. 그녀는 듣지 못했기에 당연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사건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고 남자를 떠난다. 그는 그녀를 줄곧 그리워한다. 그리고 점점 시력이 안 좋아지자 그는 가족과 독일을 떠나 한국으로 홀로 왔고, 대학에서 희랍어를 가르친다. 곧 완전히 멀어질 두 눈을 가지고.
희랍어 강의를 통한 만남
두 주인공은 희랍어 강의를 통해 만난다. 그는 희랍어 강사로, 그녀는 말 없는 학생으로. 처음에는 그 둘은 서로를 잘 인지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강의 중 그녀가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 그는 그녀에게 수화로 대화를 걸며 사과를 건넸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간다.
그 둘은 언어와 시각이 극단적으로 무너지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비로소 긴밀해진다. 희랍어 강의실 건물 지하 계단에 까치 한 마리가 날아들어 길을 잃고 숨어든다. 여자는 길 잃은 새가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지만, 새는 그녀의 행동을 공격으로 여기고 그녀를 피해 달아난다.
남자는 그녀가 무엇을 살피는지 보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다. 어둠 속에서 자신도 나가려 하지만, 갑자기 새소리가 들려 멈춰 선다. 그는 새를 내보내려다가, 갑자기 날아오른 새에 놀라 발을 헛디뎌 계단을 구르고, 자신의 안경을 밟아 깨뜨린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도와 달라고 소리치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자 두려운 마음에 빠진다.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부축해 주었다.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그를 데리고 약국에 들러 상처를 치료해 주었고, 집까지 데려다준다. 그날 밤, 남자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여자는 곁을 지키며 듣는다. 처음에는 조용히 듣기만 하던 그녀는, 그가 자신이 듣고 있는지 묻자 작은 소리를 내어 그를 안심시킨다. 대답이 필요할 때는 그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어둠, 그리고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촉감을 통해 소통하며 깊은 교감을 나눈다. 말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언어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라는 메시지였다. 우리는 종종 언어를 잃거나, 말하지 못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존재하며, 때로는 더 깊은 이해와 연결이 가능하다.
나 역시 때로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침묵 속에 홀로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말은 많고 만남은 잦아도, 진정한 교감과 소통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느낀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외롭고, 헛도는 이야기만 하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반면 해외에서는 언어가 달라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도,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하나로 몸짓만으로도 진실된 대화가 가능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언어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을 대해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며 소통하는 것 같다. 어느 곳에 있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또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