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넌트 러셀 <행복의 정복>, 첫 번째 이야기
<행복의 정복>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꽤 오래 전부터 눈여겨 보던 책이었다. 몇 년 전, 서점에서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의 느낌은 '오래 전에 쓴 책이라 그런지 꼰대 냄새가 난다' 였고, 그래서 위시리스트에서도 지웠던 책이었다. 그러다가 작년 말, 간만에 혼자 보낼 시간이 나서 서점에 다시 들러 이 책을 또 발견하게 되었다. 쏟아져나오는 자기 계발서와 얕은 실용 기술이 점유해버린 서점 매대 한 켠에, 몇 년 전과 같이 이 책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다시 한 번 집어들게 되었고, 예전의 그 꼰대 느낌보다는 뭐랄까, 세상의 무수한 사람과 그 삶을 깊이 이해한 연장자의 냉정한 조언처럼 다가왔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85년 전, 1930년에 출판되었다. 이 즈음 해서 인간이 기술로 힘을 얻게 되고 기차나 전화 등을 이용하게 되면서, 일을 처리하는 시간은 단축되고 일과 일 사이의 간격은 더욱 좁혀졌다. 인간은 하루 하루 벌어 먹고 살 능력과 민첩함은 갖춰졌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길인가' 에 대한 지혜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어졌다. 그런 비인간적인 현대 사회의 특질들이 바로 이 책이 씌여진 시대적 배경이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이러한 현대 사회의 특질이 태어날 때부터 뇌 속까지 깊이 침투해 있으므로, 개인의 불행이 이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유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회와 인간이 급격히 변해가는 산업혁명기를 관통한 이 기민한 철학자의 경험담은, 행복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조차 마비되어버린 오늘날 우리에게 날카로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글에서는 문명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마다 겪고 있는 일상적인 불행에 대해 다룰 것이다. 즉 분명한 외적 원인이 없으니 달아날 길이 없는 것 같고, 달아날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참아내기 힘든 불행을 치유할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이런 불행은 대부분 세계에 대한 그릇된 견해, 잘못된 윤리와 생활습관에서 비롯되는데, 이런 요인들은 인간이나 짐승이 누리는 행복이 근본적으로 의존하기 마련인 자연스러운 열정과 욕구를 짓뭉갠다. 이런 불행은 개인의 힘으로 좌우할 수 있다. 나는 보통의 운으로도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변화의 방법을 제안할 작정이다.
그렇다. 요즘 우리가 겪는 불행은 몇 마디 말로 명확히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요즘 어떠냐?' 고 물었을 때, 냉큼 잘 지낸다고 웃어보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그리고서 자신이 왜 힘든지를 설명하는데 대부분의 대화를 소진한다. 듣는 사람도 힘든건 알겠는데, 도무지 무슨 조언을 해주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의 불행은 교묘하게, 지배적으로 우리의 삶을 장악하고는 당최 그 얼굴을 또렷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자기 사유를 하면 불행의 원인을 알고 이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전부터 심리학 관련 도서가 많이 출판되고 유명 종교인의 통찰에 마음을 기대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그러나 '내가 왜 불행하게 생겨먹었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런 내 마음을 다르게 고쳐먹는다고 해서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러셀은 다소 충격적인 선언처럼 그 이유를 들려준다.
자신에 대한 관심은 어떤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기껏해야 일기 쓰기에 매달린다거나, 정신분석을 받으러 정신과에 다닌다거나, 승려가 되거나 할 뿐이다. 하지만 승려가 된 사람도 규칙적인 수도 생활에 쫓겨 자신의 영혼을 잊을 수 있어야 비로소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승려가 종교에 귀의한 덕분에 누리고 있다고 믿는 행복은, 그가 어쩔 수 없어서 도로 청소원이 되었다더라도 누릴 수 있었던 행복에 불과하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바람에 불행해진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적인 훈련 뿐이다
우리는 매 순간 숨 쉬듯 불행을 느끼고, 가끔 재채기 하듯 행복하다. 불행한 마음을 치유해 보고자 내 마음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불행에 더 큰 두려움을 느끼고,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 빠진다. 내가 왜 불행한지는 나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다. 이 세상과, 사회 제도와, 주변 사람들과, 아주 어린 시절 형성된 심리 기제가 행복의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면을 파고들어 행복의 단초를 발견하려는 것 만큼 승산이 없는 짓도 없다.
인생은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길지 않다. 하지만 죽는 그날까지 인생을 채워줄 수 있을 만큼 많은 여러가지 대상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내향성의 병에 걸리기 쉽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신 앞에 펼쳐진 세계의 여러 가지 볼거리에서 눈을 돌려, 공허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내향적인 사람이 겪는 불행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러셀은 친절하게도 이 말의 뜻을 소시지 기계에 비유했다. 옛날에 소시지 기계가 두 대 있었는데, 한 대는 돼지에 관심이 많은 기계라 일생동안 엄청난 양의 소시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 대는 '돼지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람?' '내 고민은 돼지를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값어치있어' 라면서 소시지 만들기를 중단하고 자신의 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연구를 하면 할 수록, 이 기계에게는 자신의 내부가 공허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다. 이제껏 맛있는 소시지를 만들어오던 정교한 장치들은 모두 녹이 슬어버렸으며, 이 기계는 결국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다. 순간 순간 내 기분과 행동을 지배하는 숨은 동기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화두 - 인생의 의미와, 행복으로 가는 길 - 은 사유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통찰이다. 사유만으로 이런 화두에 다가서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생각은 파고 드는 힘이 강하고, 하면 할 수록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기분 전환 방법은 사고 작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거나 적어도 현재의 불행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제까지 극히 적은 관심사에만 생활이 집중되어 있고, 그 얼마 안되는 관심사마저 슬픔에 압도되어 버린 경우에는 이런 긍정적인 기분 전환 방법을 사용하기 어렵다. 불행이 닥쳤을 때, 불행을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행복할 때, 폭 넓은 관심사를 기르는 것이 현명하다. 그럼으로써 현재 상황을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다른 생각과 감정을 제공할 수 있는 평온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러셀이 책 후반부에서 말하고자 하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압축되어 있다. 내면으로 향하는 생각의 방향을 '다른 행복한 거리들'로 잡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은 건강과 가정의 안녕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는, 유익하든 무익하든, 목적이 있든 없든 어느 정도 유효하다. 부인과 사별한 영국 남성이 어느 날 차를 마시며 상자에 적힌 중국어에 관심을 갖고 한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치자. 부인을 평생 기리며 슬픔에 잠겨있는 것 보다 이 행동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적어도 한자를 공부하는 시간에는 슬픔이 가라앉고, 이 남자의 지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한층 깊어질 것이다. 행복은 불행을 해결하려는 시도보다, 불행과는 거리가 먼 행동, 혹은 바깥 세상으로 관심을 돌릴 때에 보다 쉽게 찾아온다.
나는 작년 이맘때에 내 나름대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나 스스로가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은 직업적인 성취였는데, 그 성취를 단기간에 이루기 힘든 업무를 맡았던 시기였다. 그 때는 일에 대한 의미를 잃고 싶지 않아 더욱 파고들어 고민했다.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직업, 아니 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까지 낮아졌다. 그걸 극복하기 위한 행동들은 뭐가 있을지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이게 내 목적과 연결이 되는걸까'라는 회의적인 잣대에 부딪혀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세 달을 허비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스스로 갖힌 덫은 이런 거였다. 첫째로, 일에서 성과를 거두어야 내 삶이 의미있다는, 지나치게 한 가지 관심사에 치중된 내 생활 방식이었다. 둘째로는, 바로 풀릴 리 없는 문제에 대해 너무 오랜 시간 깊이 생각했다. 셋째로는, 덫에서 풀려나기 위한 행동 하나 하나에 '목적지향적'인 잣대를 들이대다 결국 하나도 실천하지 못했다. 우습게도 그 업무를 손에서 놓고, 여행을 다녀오고, 다른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면서 영원히 떨치지 못할 것 같던 회의감과 불행은 사라져 버렸다.
생활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한 가지 관심 분야에서 좌절을 겪더라도, 인생과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사 하나하나를 협소하지 않게 유지할 수 있다면 위기 상황이 닥쳐도 그 불행을 극복해낼 수 있다. 한 가지 또는 몇 가지 관심 분야에서 실패를 했다고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단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찬양할 것이 아니라 생활력이 부족하다고 탄식해야 할 것이다. 인생의 폭이 협소할수록, 우연한 사건이 우리 인생의 모든 의미와 목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된다.
러셀은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나'는 자유롭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속박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세상이야말로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기회이자 삶의 토대라고. 외부 세계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세상과 공존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가라고 설득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행복이 우리 곁을 떠난 이유를 직시하고, 불행이 손을 뻗지 못하는 다른 곳으로 나의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