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여름이 온다
2001년 개봉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영화 소개를 다시 봤다. 정말 딱 이십 년 전 영화구나, 새삼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과 그만큼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감회가 빠르게 스쳐간다. 우연히 영화 소개 채널에서 <봄날은 간다> 얘기가 나왔는데 그 애잔한 감성을 맛보고 싶어 비 내리는 봄날, 영화 시작 버튼을 눌렀다. 리즈 시절의 두 주인공 이영애와 유지태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 반가웠다.
20년 전 나는 영화 속 상우(유지태 분) 보다 어린 나이었고 사랑의 경험도 미천했기에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기란 사실상 무리였다. 20대 상우와 30대 은수(이영애 분)의 사랑에 대한 온도차도 당시엔 당연히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랬던 내가 시간과 경험과 감정이 지층처럼 쌓여서인지 이제는 상우는 상우대로, 은수는 은수대로 각자의 입장이, 그 감정이 많은 부분 이해도 가고 공감도 갔다.
‘라면 먹고 갈래요?’가 ‘내가 라면으로 보이니?’로 바뀌어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연인의 사랑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셀렘으로 시작해서 열정적인 연애의 구간을 지나 시들해지는 권태를 거쳐 이내 끝나버리는 ‘관계의 생로병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구나 싶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맺음도 잘 해내야 하는구나, 격언 같은 문장 한 줄을 뽑아내기 쉬운 영화였다.
이 작품을 본 오늘 저녁, 공교롭게 지난 두 달간 해온 글쓰기 모임 뒤풀이가 있었다. 사실상 글쓰기 수업은 지난주 화요일에 모두 마쳤지만 온라인으로만 만났던 터라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며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에 함께 한 분들 마음이 모여 성사된 자리였다. 뭔가 인생의 한 중요한 페이지를 채우고 마무리하는 느낌도 들고 이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도 지닌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비 내리는 휴일 전날 저녁시간이라 길이 꽤 밀렸고 평소 지각을 과민할 정도로 싫어하는 나라서 혹여 늦을까 재촉하며 차를 몰았다.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아한 느낌의 인테리어 속에 폭 안겨있듯이 글쓰기 모임 멤버들 얼굴이 보였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데도 영상회의로 매주 만나와서 어색한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게다가 내밀한 이야기들을 글로 나눈 사이어서인지 우리는 서로를 꽤 친근하게 느꼈고 바로 지난주에 만난 친한 지인처럼 여러 이야기들을 쏟아낼 수 있었다.
‘직접 만난 건 처음인데 이별을 이야기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두 달 동안 글쓰기를 배우고자 함께 한 모임이고 약속한 기간을 채웠으니 이제 모임 해산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글쓰기 모임의 구심점이었던 작가님과 정기적으로 모이는 건 지난주로 종료되었고 각자 이 모임에 참여한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으니 이젠 안녕을 고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이성적인 판단도 슬며시 들어왔다. 그럼에도 남는 이 아쉬움이란 녀석은 대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먼저, 2주에 한 편 나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서로 나눈 사이어서 감정적 유대가 생겼을 수 있겠다 싶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에게도 쉽게 하지 못했던 나만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글로 담아 함께 나누는 일련의 과정에서 위로와 응원의 연대를 경험하며 동료애, 동기애를 느낀 것도 같다. 글쓰기를 주도해온 작가님이 첫 시간에 얘기한 것처럼, 아니 ‘예언’한 것처럼 우리의 글쓰기도 늘었고 우리의 관계도 참 가까워졌다. 어쩌면 글쓰기, 특히 에세이를 쓰고 함께 글을 나누는 행위가 갖는 엄청난 힘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론, 다른 글쓰기 모임이나 글 나눔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무엇이 이 글쓰기 모임에는 있었다. 가까운 친구나 글쓰기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글을 보여줬을 때 보통 듣게 되는 피드백이란 ‘글 잘 썼다. 좋다. 감동적이야. 작가 해도 되겠어.’ 정도다. 물론 이렇게 감사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겁고 행복할 때가 많다. 하지만 늘 뭔가 부족한 느낌에 목말라하곤 했는데 이번 글쓰기 모임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내 글을 꼼꼼하게 읽어주고 글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개선점을 알려주고 응원해주는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서로의 글을 위한 목소리들이 참 귀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주제와 형태로 쓰이는 에세이를 같은 기준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시선이 이 모임에 있었다. 흔히 타인의 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과연 그 방향이 맞는지 여부를 정확히 알기도 어렵고 그 피드백을 믿고 따라가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그 의견이 실제 내 글에 반영될 가능성이 매우 떨어진다. 다시 말해, 한번 듣고 흘려버리기 쉽다. 하지만 이번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우리들은 작가님이 제시해준 몇 가지 핵심 기준에 따라 글을 바라보는 훈련을 함께 해왔던 터라 같은 판단의 잣대로 글을 분석하고 느낀 바를 나눌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에세이 쓰기에 ‘신뢰할 수 있는 준거 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쓰기 모임을 더 이어나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 마음 한편에선 이런 시구가 떠오르기도 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쿨하게 작별 인사하고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낫겠다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되물으며 이 관계에 더 매달리지 말고 의연하게 자기 삶의 길을 가야겠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오늘 글쓰기 뒤풀이 모임은 영화 <봄날은 간다> 마지막에 주인공 상우와 은수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그 자리 같다고도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끝맺음하는 시간이라 여겼다.
그렇게 우리의 봄날은 갔다. 작가 선생님과 함께 했던 두 달의 시간이 흘러갔고 우리의 서른 편 글의 합평도 흘러갔다. 그런데 오늘 세 시간의 대화 속에서 그 봄날의 자리에 여름이 피어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비록 작가 선생님이 함께 하시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글쓰기를 꾸준히 해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응원과 의지가 되어주는 글동무가 돠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 달에 한번 글 한 편을 꼭 쓰고 함께 나누고 합평까지 하기로 의견을 모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얼굴에 피시식 웃음이 피어났다. 그렇게 우리의 여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