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스승이다
왼쪽 눈에서 피고름이 나왔다. 좀 더 정확하게는 왼쪽 눈꺼풀 안쪽에서 뻘건 피와 누런 고름이 뒤섞여 나왔다. 사실 그 순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내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살갗을 절개하고 두 개의 엄지손가락으로 눈꺼풀을 짓누르는 순간, 무언가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고 십분 넘게 누르고 있던 거즈를 보고서야 그것의 정체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내 눈꺼풀에서 나온 무언가를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어렵다는 아이러니를 새삼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운이 안 좋아서 그런 거예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사실 김이 샜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의사 선생님 프로필을 담은 병원 패널에 쓰인 문구가 무색해진 순간이었다. “다래끼가 왜 생기는 건가요?”라는 나름 진지한 질문은 나중에 재발 방지, 질병 예방을 위한 방법을 물어보는 환자의 바람이 담겨있었는데, 운이 안 좋아서라니, 그 말이 한동안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럼 난 왜 또 ‘운이 안 좋아서 눈꺼풀이 팅팅 붓는 다래끼가 생긴 것일까?’ 우문에 우답이, 다시 우문으로 이어졌다.
“절개하는 게 좋겠어요.” 이 한마디에 긴장은 한껏 고조되었다. 시험 성적표를 받는 마음으로 마음의 각오를 하고 병원을 찾았지만, 막상 이 말을 직접 들으니 처음 롤러코스터 타기 전의 긴장감과 묘하게 비슷한 그 무엇이 양쪽 어깨 끝을 스쳐 지나갔다. 거의 열흘 가까이 항생제를 먹고 안연고를 바르고 안약을 눈에 넣었지만 눈꺼풀 안쪽에 작은 콩알만 한 염증 덩어리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녀석은 몸의 일부로 계속 가지고 다니기엔 부담스러웠기에 의사 선생님의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이 지긋한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 진료실 옆방 치료실에 놓은 싱글 베드에 몸을 뉘었다. 갓 입학한 초등학생처럼 연신 ‘네. 네.’를 읊조리며, 말 그대로 시키는 대로 했다. KF80 마스크 위에 덴탈 마스크를 한 겹 덧쓰고, 넣어준 안약으로 눈을 씻어내고, 양쪽 눈은 코끝을 계속 주시했다. 코끝을 계속 바라보라는 말을 간호사 선생님도, 의사 선생님도 계속 주문처럼 외쳤다. 아마도 눈꺼풀의 농을 제거하는 시술을 하다가 자칫 눈동자가 다칠까 봐 반복적으로 그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코끝을 응시하라는 말에 한 명상센터에서 한다는 수련법 얘기가 떠올랐다. 열흘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코끝만 바라보면서 명상을 한다는 곳인데, 잠시 동안만 코끝 바라보기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어떻게 열흘 동안 코끝만 바라보며 생활할까 문득 의아해졌다. 동시에 그 열흘을 성실하게 보냈을 요가 선생님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고난의 순간이 그렇듯, 그 순간은 꽤 깊고 길게 느껴진다. 예정된 고난을 기다리는 초조함도 만만치 않아서, 눈꺼풀을 마치하고 눈꺼풀 안쪽 연한 살을 절개하고 고름을 짜내는 그 시간보다도 병원 침대에 누워 의사 선생님을 기다리는 짧은 일이 분의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어쩌면 고통 그 자체보다도 고통을 마주할 두려움과 염려가 더 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곰곰이 떠올려보면 지금까지 겪어온 여러 어려움도 결국 다 지나가는 것인데 당시에 난 그 두려움에 압도되어 어쩌면 그 두려움에 더 쩔쩔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피고름을 짜낸 눈꺼풀에 두툼한 거즈를 덧대고 그 주변을 반창고로 붙여 만들어 주신 안대로 내 왼쪽 눈 앞을 가린 채 안과를 나섰다. 한쪽 눈으로만 주변을 살피다 보니 공간감과 거리감이 떨어졌다. 왼쪽 시야가 가려지니 왼쪽에서 오는 사람과 자동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불과 두 시간 뒤면 뗄 일회용 임시 안대였지만 이 순간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느끼기엔 충분한 매개물이 되어주었다. 그 순간,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일이 돌연 꽤 노력을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군시절 총검술을 하다가 눈을 다쳐 그 뒤로 한쪽 눈으로만 살아오셨다는 지인의 이야기가 내 몸을 타고 살아있는 경험으로 잠시지만 내게 머물고 있었다. 그간 힘드셨겠다 생각은 했지만, 누군가의 어려움을 진정 공감한다는 게 참말처럼 쉽지 않구나! 새삼 느꼈다. 하지만 지금의 이 느낌과 깨달음 역시 곧 휘발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경험을 깊이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퉁퉁 부은 눈을 껌뻑껌뻑하며 또각또각 이 글을 써내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