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생여행자 정연 Oct 10. 2021

여보, 나 여행 다녀올께.

나홀로 여행, 셋째날의 기록

‘나 가을이야.’하고 손짓하는 것만 같은 바람이 나풀나풀 다가와 초록빛과 노란빛의 나뭇잎들을 살랑살랑 흔들어댄다. 짹짹이는 참새 소리, 그에 질세라 계속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 윈드차임 같은 청명한 소리를 간간히 전해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까지 마당에 여러 빛깔의 소리가 차곡차곡 쌓인다. 낭만을 가득 품은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곡, 감미로운 목소리의 재즈,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랑말랑한 발라드로 채워진 아늑한 공간에서 창가에 놓인 스탠드형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이 순간을 가만히 느껴본다.


깊은 바다 빛깔 표지의 안톤 체호프 단편선을 열어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이슬아 작가가 남궁인 작가에게 ‘21세기 안토 체호프’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그 이유가 내심 궁금했던 나는 그 이유를 찾아 떠나는 탐험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안톤 체호프 단편 한 편 한 편을 읽다가 생각은 흘러 흘러 여울지듯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멋진 작가, 잘 알려진 작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가 되진 못하더라도 한 명의 독자만 있다면 그 독자를 떠올리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같은 공간에서 사흘째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매일이 새롭다. 여행의 참맛을 모르던 시절에는 메뚜기처럼 참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새로운 걸 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시절이 있다. ‘어떻게 낸 시간인데 한 곳이라도 더 가봐야지.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진 않을 거야.’ 같은 아쉬움이 박제된 어떤 절박함 같은 것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런데 이제는 굳이 그러지 않는다. 긴 여행을 몇 차례 다녀오고 나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새로운 곳을 가더라도 마음이 조급해지면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같은 장소에 머물더라도 마음이 새로워지면 새로운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난 메뚜기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지금 여기에 머물길 더 좋아한다. 새로움이란 게 안 가본 곳을 가서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이제 더 깊이 알 게 되었다.


‘책도 그럴 텐데, 글도 그럴 텐데.’ 이런 생각이 문득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새롭게 나온 신간 소개를 보다 보면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많다. ‘궁금해. 재밌겠다.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다리던 작가의 신작이 나왔어. 이번에 첫책 낸 이 작가 글도 읽어보고 싶다.’ 등의 마음이 퐁퐁 샘솟는다. 거기에 읽어봐야 할 것 같은 묵직한 고전들까지 더해지다 보니, 그 결과로 우리 집 커다란 여덟 개의 책장은 인산인해, 아니 ‘책산책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모든 곳을 다 가볼 수 없는 여행의 한계처럼 책도 살아있는 동안 모든 책을 다 볼 수 없고, 꼭 새로운 곳을 가야지만 새로움을 맛보는 것이 아닌 것처럼 책 역시 꼭 새로운 책을 더 많이 읽어야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라는 어떤 깨달음에 이른다. 결국 내가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느냐는 지금의 나에게 달려있구나 싶다.


늘 떠나고 싶어 하는 방랑자의 마음을 살포시 내려놓고 내가 선택한 지금 여기에 고요히 머물길 연습해본다. 의식적으로 깊은 호흡을 해본다. 깊게 마시고 깊게 내쉰다. 더 적극적으로 숨을 쉬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귓가에 맴도는 소리에, 코끝에 감도는 내음에, 손 끝에 느껴지는 온기에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를 매만지듯 느껴본다. 살아있음을 새삼 느낀다. 들려오는 맛깔난 가을 소리에, 입 안에 감도는 뭉근한 라떼향에 몽글몽글해진 마음을 한 손에 쥐고, 은은한 조명 아래 펼쳐진 그림과 글자의 세계에서 거니는 나를 만난다.


_

나흘의 홀로 여행을 흔쾌히 배려해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시월 십일 숲휴게소에서 인생여행자 정연 쓰다.



오늘 나의 자리 @숲휴게소
매거진의 이전글 왼쪽 눈에서 피고름이 나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