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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여행자 정연 Oct 02. 2022

한가을 밤의 꿈

예술과 요가, ‘지금, 여기’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

::: 한가을 밤의 꿈


꿈에서 깨어났다. 늦어도 아침 예닐곱 시에는 일어나는 평소의 습관과는 달리, 일부러 더 뒹굴뒹굴하다가 열 시가 돼서야 일어났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걸터앉아서 어제저녁에 공간차츰에서 들었던 해금과 아쟁의 <영산회상 상령산>을 멜론에서 찾아들었다. 아직 꿈속인지 새로운 아침인지 구분이 안 되는 듯한 몽환에 빠져들었다. 그 몽롱함이 꽤 달콤했다.


:: 인상주의라는 호수로


사흘 전 퇴근길, 트렌디함이 가득한 청담 거리를 지나 조용한 곳에 자리 잡은 탈롱드청담 갤러리를 찾았다. 인상주의부터 시작해서 모더니즘을 거쳐 현대미술까지 4회에 걸쳐 미술과 관련한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서로 이야기 나누는 자리였다. ‘미술과 영화, 책, 그리고 대화의 조합이라니, 이 커뮤니티에는 꼭 참석해야 해!’라는 내면의 소리에 따라 참여 신청을 했던 터라 설렘을 가득 품고 그 자리를 찾았다. 퀀트 개발자, 회계사, 시나리오 작가, 미술경영 전공자, 연극영화과 전공자 등 다양한 백그라운드의 분들이 함께 참여해서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시작됐다. 짝꿍의 소개를 서로 대신하면서 친밀감도 높이고 참석한 분들을 함께 알아가면서 처음의 서먹서먹함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모임을 이끌어준 이윤서 님은 자신을 ABCD로 소개했다. 아티스트, 비즈니스, 큐레이터, 도슨트의 앞 글자를 따서 ABCD인데,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고 각 역할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나도 나만의 ABCD를 정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자기 일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노력하고 있구나, 구상만으로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구나, 멋져 보였고 내심 부러운 마음과 함께 그 자세와 노력을 배우고 싶었다. 글을 쓰며 도슨트와 예술 강사, 그림책 작가, 문화예술기획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동인 김상래 작가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두 분을 연결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링커(Linker)로서 역할도 내게는 참 뿌듯하고 기분 좋아지는 일이다.


<도슨트가 읽어주는 미술사> @탈롱 드 청담


:: 디지털 예술의 산으로


인상주의에서 시작된 변화의 흐름은 입체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로 계승, 발전되었고 오늘날 현대미술로 연결되었다는 윤서 님의 설명을 바로 다음 날 체험해볼 수 있었다. 우리 회사 제로원팀에서 준비한 <제로원데이> 행사장에서였는데,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현대 예술 작품을 눈과 귀 그리고 온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다.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로봇 강아지 스팟이 제일 처음 마중해주었는데, 로봇과 인간 둘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질 예술의 확장을 기대하는 작품들이 꽤 많아서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오랜 시간 전시장을 둘러봤다. 기억에 남는 작품 가운데 하나는, 그래픽 로직을 정의해주고 별도 발급한 카드를 바코드 리딩기로 읽어내면 로봇이 구상주의 회화 작품을 그려내고 작품 한편에 시리얼 넘버가 새겨지면서 NFT 민팅까지 이루어지는 것이었는데, 역사적 서사와 로봇 드로잉의 현장성, NFT로의 확장성까지 한꺼번에 느낄 수 있었다. 창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도끼 같은 질문도 드는 순간이었다. 색다른 디지털 현대 예술 작품들을 둘러보고 나서 루프탑에서 감자튀김을 곁들여 맥주 한잔하며 곱씹어보니, 전날 윤서 님에게 들었던 인상주의 작품의 특징과 변천사와도 묘하게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어서 새삼 반갑고 신기했다. 사실과 추상을 오고 가는 미술사의 흐름이 오늘날 현대 예술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되고 있었다.


제로원데이 @에스팩토리


:: 미술관 지붕 아래서, 요가와 글쓰기의 강으로


그날 저녁, 성수 디뮤지엄에서 요가와 글쓰기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미술관에서 요가도 하고 글도 쓴다니 정말 짜릿한 일 아닌가? 평소 애정하는 작가이자 요가 안내자로 활동하고 있는 최예슬 선생님의 가이드로 진행되는 시간이어서 망설임 없이 신청했었는데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싶어 설렘으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미술관 입구에서부터 에듀케이터분들의 따뜻하고 섬세한 환대를 받아서인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청량한 가을 저녁의 바람과 쪽빛 하늘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려고 작정한 듯한 계절의 감각이 미술관 루프탑에 오르자 절정에 달했다. 나의 이마로 불어와 머리칼을 스치고 귓불로 흘러가는 가을바람을 섬세하게 느끼고 싶었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된 요가 수련 장면을 예슬 선생님이 타임랩스로 담아주셨는데, 영상도 참 좋았지만 찍기 전에 했던 그녀의 이야기가 오래고 가슴에 남았다. 요가 수련하며 순간순간 실수하고 마음처럼 멋진 자세가 안 나와도 타임랩스로 찍으면 큰 흐름 속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처음에는 어떻게 해날까 싶은 일들도 지나고 보면 다 흘러가 있다고, 그 말이 요즘 나의 고민에 대한 해답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 동안 루프탑 잔디밭과 내 몸을 연결해줬던 룰루레몬 요가 매트를 둘둘 말아서 <어쨌든, 사랑> 전시가 열리고 있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라 전시장에는 아무도 없었고 바깥은 깜깜하고 은은한 조명만 가득한 미술관의 작품 사이를 거닐다 보니 무릉도원을 산책하는 신선이 된 것만 같았다. 요가복을 입고 있는 우리들만 오붓하게 둘러앉아 예슬 선생님이 던진 질문을 떠올리며 사각사각 글을 써 내려갔다. ‘어떤 감정에 물을 주는 오늘인가요? 내 삶은 지금, 어떤 계절에 도착했나요? 요즘 내 삶을 일으켜 세우는 언어는 무엇인가요?’ 이 질문들이 내 마음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한 바닥 가득 써 내려간 글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 느낀 평온함은 이 자리를 만들어준 예슬 선생님과 디뮤지엄 에듀케이터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이어졌다.


<몸과 마음을 유영하는 밤> @디뮤지엄
요가와 명상 @디뮤지엄 루프탑


:: 사운드 배스와 국악의 배를 타고, 이완의 바다로


여백이 좋다. 아니, 여백을 사랑한다. 가득 채워진 그림보다는 무언가 덜 채워진 듯한 빈 공간이 있는 작품이 좋다. 촘촘하게 깍두기처럼 짜인 일정의 여행보다는 무언가 느슨한 여행을 사랑한다. 공간도, 시간도, 소리도, 작품도, 프로그램도 쉼표와 여백이 있을 때 진정 충만함을 느낀다. 어제저녁 참여한 공간차츰의 <월간 이완의 밤>도 그런 쉼표와 여백의 시간이었다. 보경 선생님이 어제 슬그머니 건네주었던 단어 ‘균형’이 가능하려면 삶 속에서 나만의 여백, 나만의 쉼표, 나만의 깊은숨이 있어야 함을 믿는다. 코끝에서 목구멍을 넘어 허파 깊은 곳까지, 온몸으로 이어지는 호흡을 고요히 관찰해봤다.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몸 구석구석, 살갗에서부터 몸속 깊은 곳까지 의식을 가져가며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나의 몸을 고요히 느껴봤다. 그렇게 삼십 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사운드 볼과 자연의 소리를 내는 남미의 악기들 연주를 귀로, 온몸으로 들었다. 평소 잘 들을 기회가 없는 주파수 영역의 영롱한 소리와 빗소리, 시냇물 소리가 공간차츰을 가득 채웠고, 머리와 몸을 씻어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운드 배스(Sound Bath)’라고 이름 붙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어서 해금과 아쟁의 협연으로 진행된 <영산회상 상령산> 연주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보통은 커다란 공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무대의 연주를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해 듣게 되는데, 정말 바로 코앞에서 연주하는 두 국악기의 협주를 듣고 있자니 그 몰입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묵직한 베이스의 굵은 질감을 뿜어내는 아쟁은 공간차츰을 그윽하지만 강력하게 울려냈다. 차돌처럼, 바위처럼 단단한 아재의 선율 위에 난을 치듯이 울려 퍼지는 해금의 선율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너무도 배우고 싶어서 국악고등학교 앞에 있는 류충선 국악기 매장에서 십 년 전 당시 거금을 들여 전문 연주가용 해금까지 마련했지만, 지방으로 근무지를 이동하면서 해금 연주 배우기가 흐지부지 됐던 경험이 있던 터라 해금을 마주하고 해금 연주를 듣다 보니 옛 연인에 대한 아련함 같은 것이 묻어났다. 이십 분 가까이 이어지는 국악 연주를 듣고 있자니, 화창한 가을날 산과 계곡을 바라보며 정자에 앉아 난을 치고 글을 쓰는 조선시대 선비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전 궁궐 산책을 했던 덕수궁을 거니는 조선시대 왕이 된 것 같기도 했다. 궁궐 해설사 이시우 님이 알려주신 대로, 덕수궁 중화전을 등지고 중화문을 바라보는 시선, 바로 왕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같은 궁이라도 전혀 다르게 느껴졌던 것처럼, <영산회상 상령산>을 작곡하게 했던 세종의 시선으로, 그의 귀로 이 곡을 듣다 보니 마치 경복궁의 여백의 공간 안에서 온몸으로, 마음으로 곡을 느낄 수 있었다. 완벽한 연주를 못한 것 같다고 아쉬워했던 성은님의 말을 들었을 때 내 안에도 있는 완벽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슬며시 되돌아봤다. 설령 완벽하지는 않았더라도 내게 완전함을 선사해준 연주였다고 감히 전해주고 싶었다. 해금 연주자에서 요가 안내자로, 사운드 배스 안내자로 같은 맥락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소연 선생님을 보며 탈롱드청담에서 만난 모임장 이윤서 님을 떠올렸다.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 나가며 사부작사부작 확장해가는 이들의 삶의 모습은 늘 감동적이었다. 나 역시 그런 감동을 주는 사람이길 소망하며 소연 선생님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우 버튼을 눌렀다.


<월간 이완의 밤> @공간차츰
<영산회상 상령산> by 소연&성은 선생님
<월간 이완의 밤> @공간차츰

:: 지금, 여기로


마음속 풍요는 진정 결핍과 걱정에 한 발을 의지하고 있다. 모든 상황이 만족스럽고 모든 일이 흡족할 때는 오히려 풍요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 당연함에 올라서 있는 순간 감사는 사라진다. 어쩌면 지금 나는 당연함의 호수에서 몸을 건져내서 감사함의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분투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절을 기록하고 기념하려고 오늘도 적는다. ‘지금, 여기’를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축복이다. 이건 분명 정언명제다.





디뮤지엄 Class 7PM : 몸과 마음을 유영하는 밤

‘요가와 명상 그리고 글쓰기’ 시간에 쓴 글

* 질문 by 최예슬 선생님


Q. 어떤 감정에 물을 주는 오늘인가요?

점심에도 저녁에도 호지차로 만든 밀크티를 마셨어요. 점심에는 씁쓸한 대화를 나누며 마셨어요. 얼굴은 웃었지만, 마음은 슬펐어요. 뜨거운 햇살의 오후, 그동안 어디 있었냐며 반가운 인사를 건네받았어요. 마음이 한결 밝아졌어요. 저녁에 마신 호지 밀크티는 그야말로 꿀맛이었어요. 즐거운 대화 사이에서 웃음이 피어났어요.


Q. 내 삶은 지금, 어떤 계절(날씨)에 도착했나요?

갑자기 찾아온 겨울바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은 옷을 급히 여미며 몸을 감싸 안았어요. 눈도 펑펑 내린 들판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어요. 외롭고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저 멀리서 비춰온 한줄기 따스한 빛을 제 볼로, 제 코로, 제 입술로 느꼈어요. 봄이 올 날이 멀지 않겠구나! 엷은 미소를 띠었어요.


Q.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인데도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장면이 있나요?

차가운 회의실에 저를 불러서 몰아세웠던 예전 팀장님의 표정과 말투, 그 증오의 눈빛이 가끔 생각나요. 다행히 이제는 그 팀장님을 다시 만나면 웃으면서 농담을 건넬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요.


Q. 두려움이나 걱정, 화와 같은 어려운 감정 덕분에 오히려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있나요?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오면 이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돼요. 제가 할 수 있을 법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해보고 하나씩 시도해봐요. 미루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사부작사부작해봐요.


Q. 요즘 내 삶을 일으켜 세우는 언어는 무엇인가요?

위로와 공감, 연대의 힘을 믿어요. 감사함이 마음속에 가득해져요.




무색무취의 네 줄 요약 ^^

1. 탈롱드청담 갤러리 안에서 인상주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2. 에스팩토리에서 펼쳐진 제로원데이 행사장에서 디지털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눈과 귀 그리고 온몸으로 바라봤다.

3. 디뮤지엄 루프탑에서 요가를 하고 미술관 안에서 글쓰기를 했다.

4. 공간차츰에서 명상과 사운드 배스를 체험하고 해금과 아쟁의 협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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