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생여행자 정연 Feb 11. 2023

영화 <400번의 구타>, 내 마음을 400번 내리치다

억압과 폭력, 부조리와 부정의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마음

영화 제목이 <400번의 구타>라니! ‘제작사나 배급사가 일하기 싫었나? 소수의 타깃만을 고려해서 막 던지는 이름인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질문이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멘티 Jin이 예술영화에 관심이 많아 예술영화 감상이 취미인 만큼 조회가 깊으리란 믿음에서였다. 그렇게 금요일 저녁, 덥석 이 영화를 내 시간 속으로 데리고 왔다.


하루에 한 번 예술 독립영화 전문상영관에서 상영되는 작품, 다음 주까지만 상영 예정된 영화, 1950년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정도만 알고 영화관을 찾았다. 프랑수와 트뤼포라는 누벨바그 영화감독이 12세 주인공의 이야기를 가져와서 어떤 이야기를 펼쳐갈지 궁금함만 가득 품고 상영관에 들어섰다.


영화를 전문적으로 파고든 적은 없지만, 영화감상이 내 인사기록카드 취미란에 쓰여있을 만큼 시간 나면 영화 보기를 즐겨온 내가 견지해 온 하나의 방식이 있다면 영화 보기 전에 사전 정보는 최소한으로만 취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영화의 재미를 헤치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언젠가부터는 나만의 오롯한 시선으로만 영화를 만나고 싶어서다. <400번의 구타>도 그렇게 나만의 눈으로, 호흡으로, 심장으로 만나고 싶었다.



1950년대 파리의 모습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초반의 필름은 서정적이기까지 했다. ‘12살 소년의 시선일까?’ 질문을 품고 그 뒤에 서서 나도 천천히 따라가 봤다. 그런데 웬걸 초반부터 불어닥치는 갑갑함에 어디든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문자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권위적인 선생님이 장악한 교실 안에서 12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소극적인 반항뿐이었다. 선생님 등 뒤에서 시시덕거리거나 장난을 치는 일 정도였다.

영화 <400번의 구타> 교실 풍경 @CGV아트하우스

공교롭게 그날 아침 딸의 졸업식에 참여하려고 정말 오랜만에 교실에 들어섰던 경험이 묘하게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떠올랐다. 삼십 년 전 교실과 오늘의 교실의 상황은 분명 달랐지만, 그 안에 흐르는 어떤 규율과 분위기, 풍경은 비슷했다. 교실의 물리적 구조, 중앙통제식의 지시, 국가주의적 의례와 같은 것들은 시간의 흐름을 무색하게 했다. (물론, 과거에 비해 정말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조직문화를 탐사하는 내 눈에 비친, 교실 안에 흐르는 어떤 정서와 암묵적 가정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범생이’의 삶을 꽤 오래 살아왔던 나로서는, 학교생활을 하며 상대적으로 눈과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이 없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돌아와서 보면 부당하고 부조리하며 정의롭지 않은 것이 많았던 공간이 아니었나 싶다. 산업화와 맞물리면서 근현대 교육방식이 세팅되고 그 안에서 성장하면서,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무언가 공감되는 정서와 고민, 감정을 <400번의 구타>의 학교 장면들에서 느꼈다.




그 ‘갑갑함’은 비단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어졌다. 아이를 계속 몰아세우는 엄마와 권위적인 아빠 슬하에서 무언가 계속 강요당하는 주인공 앙투안의 상황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상대적으로 나는 얼마나 행복한 상황에서 성장했나? 하는 감사와 성찰이 이어지기도 했다.) ‘경제적 고민과 환경적 열악함에서 시작된 것인가?’ 질문도 해봤지만, 앙투안의 가장 친한 친구 르네의 부유한 환경도 질적으로 다른 경험을 아이들에게 주진 못했다.


결국 앙투안과 르네는 억압적인 학교와 무관심한 부모에게서 벗어나고자 작은 일탈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 일탈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올지 예측하지 못한 채 둘은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앙투안은 학교와 부모뿐만 아니라, 더 큰 사회 안에서도 폭력과 억압을 경험한다. 같이 그 장면을 보며 몰입하다 보니 나 역시 마음이 답답해져서 가슴을 여러 차례 두들길 수밖에 없었다.


영화 <400번의 구타> 서로 다른 시선과 감정 @CGV아트하우스


작품 후반부에 나오는 롱테이크로 찍은 앙투안의 달리기 장면이 그렇게 시원하게 느껴졌던 건, 바로, 이 억압과 폭력, 부정의와 부조리에서의 탈출 행위로써 달리기가 선사한 해방감 때문이었다. 앙투안 옆에서 함께 신나게 달려 도망치는 마음이 좋았다. 그 어떤 상쾌함보다도 좋았다. ‘마침내‘ 만난, 처음 보는 바다에서 앙투안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얼굴에 FIN이란 글자가 새겨졌을 때 내 머릿속에서도 FIN이 찍혀버렸다. 자리를 쉬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영화 <400번의 구타> 주인공 앙투안과 바다 @CGV아트하우스


P.S. 나를 둘러싼 물리적, 심리적 억압과 폭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고요히 생각에 잠긴 밤이었다. 너무 익숙해져서 감각마저 무뎌진 것들에 대해 날을 세워봐야겠다. 멋진 작품을 추천해 준 멘티 Jin에게 고맙다. 후속 추천작 <자전거 도둑>도 꼭 한번 봐야겠다.



| 글쓴이 : 인생여행자 정연

이십 년 가까이 자동차회사에서 HR 매니저로 일해오면서 조직과 사람, 일과 문화, 성과와 성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몸으로 답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층처럼 쌓아두었던 고민의 시간을 글로 담아, H자동차그룹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칼럼을 쓰기도 했다. 9년 차 요가수련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을 인생여행자라고 부르며,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는다. 현재는 H자동차그룹 미래경영연구센터에서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최혜진과 원탁의 ‘기사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