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절절한 사랑을 몰라서
흔상은 늘 사랑 때문에 힘들어했다.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와서는 앉자마자 하는 말 이라는 게, 헤어질 것 같다는 말들뿐이었다. 오늘은 비틀거릴 때까지 술을 마셔야겠다고 술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긴장하라고 엄포를 놓기도 다반사였다. 계절이 변해도 흔상의 술자리 패턴은 비슷했다. 공감을 해주려고 하면 부정적이라고 비난했고, 조언을 해주려고 하면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흔상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살았다. 과자 봉다리와 소주며 맥주를 털레털레 들고 세상 심각한 얼굴로 종종 나타나곤 했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까지 술을 마시다 보면 취하고 깨고를 반복하다가 제법 술이 깬 눈으로 반듯하게 걸어 돌아갔다. 흔한 연애담을 잔뜩 듣고 난 며칠 뒤에는 이야기를 잘했다고, 고맙고 미안하다는 문자가 꼬리처럼 딸려 왔다.
남의 연애담을 듣는 건 흔한 일이었다. 커피를 마시다가, 잠들기 전 오랜만에 걸려 온 친구의 전화, 맛없는 안주를 앞에 둔 술자리에서,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면. 실례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 또래의 대화라는 게 연애라는 MSG가 쳐지면 숨 막힌 침묵쯤은 이겨내기 수월했다.
어제는 잠들기 전에 베개를 반대쪽으로 옮겨 베다가 문득 첫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의 연애담은 잔뜩 듣는다. 가끔은 지겹다고도 생각할 만큼 풍요롭게 쌓아두는 것에 반해, 정작 내 연애에 대한 기록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로운 대로변에서 벼락을 맞는 듯한 짜릿함도 가슴 쥐어뜯을 만큼 아픈 이별의 경험도 없다. 호감이 생길 즈음에는 만나고 있었고 호기심이 사라질 즈음에는 헤어져 있었다.
빈곤한 내 연애의 기록에는 이렇다 할 역사가 없다. 그래서 흔상 같은 사람들을 보면 늘 신기했다. 오늘만 사는 것처럼 절절하게 또는 처절하게 연애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 빈곤한 연애의 자루가 부끄러워졌다. 열에 들뜨는 건 순간이었다. 더운 바람에 들떠서 설렌 짧은 계절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찬 바람 부는 계절이 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해마다 반을 옮길 때마다 같은 반 남자아이들을 쭉 둘러보고는 관심남을 지정하곤 했다. 관심남은 해마다 바뀌었고 예쁜 것을 오래오래 지켜보듯이 남몰래 지켜보며 만화 같은 소설을 몇 권은 썼다 지우곤 했다. 첫 호감으로 기억될 만한 소년은 10살 때 같은 반이었던 한 소년이다. 호리호리하게 마르고 키가 큰 소년은 공부를 잘했고 축구를 좋아했다. 학기 초에 소년은 청상이라는 소녀를 좋아해서 무척이나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화이트데이 때 ‘나도 우청상에게 초콜릿을 주고 싶어!’라고 외쳤던 대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가슴 아프게 남아있다. 누군가의 생일파티에서 그 당시 플레이타임이라는 놀이기구에서 즐겁게 놀았던 기억.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부추김으로 소년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시시한 편지를 썼던 기억. 이튿날 답장을 받았는데 애들이 하도 놀려서 부끄러운 마음에 찢어버렸고 조각난 편지들 사이로 보인 소년의 눈빛까지. 20년도 넘게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그 소년의 이름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고, 비슷한 이름을 들으면 아이돌 최애의 이름을 듣는 기분이 들다가 괜히 부끄러워져서 찢어버린 편지처럼 고개를 숙이게 된다.
무엇이 그렇게 미숙했기에 달음박 치듯이 마음을 뱉어 노을 지는 하늘처럼 붉어졌을까.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사랑에 얼마나 성숙해져 있을까. 흔상의 지루한 이야기를 밤새 들으며 함부로 사랑을 평가하고 때때로 한심해할 권리가 있을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때로는 굽 있는 구두로 어른인 척 복도를 걸어도, 복잡한 엑셀 화면을 들여다보며 일을 쳐내고 고개 숙인 친구의 등을 두드려 주며 성숙한 채 해도 결국은. 그 소중하고 흔한 사랑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흔상은 얼마 전 집으로 돌아오는 단 하나의 버스 정류장에서 현재 애인과 마주쳤다. 말이 많고 시끄러운 흔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몸을 작게 말았는데 들켰고 현재 애인과 반강제적으로 인사를 해야 했다. 먼저 하차해 애인과 조그만 점으로 멀어지는 흔상의 뒷모습을 보며 역시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 조금, 흔상이 오래도록 끝 사랑같은 현재 사랑을 지속했으면 하는 마음 조금. 그리고 신기루에서 마주친 유니콘 같은 사랑이 도대체 뭘까 하는 무거운 물음표도 떠올린 여름 날의 저녁, 바람은 선선히 불고 버스는 붉고 파란 빛을 깜빡이다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