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후 두 시 반

by 단소니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시간의 신이 바늘을 휘날리며 세상 곳곳의 태엽을 감다가 잠든 누군가의 시간만 깜빡하고 태엽을 감지 않아 몇 바퀴인가 흐르지 못하고 멈춘 듯하다. 어쩌면 너무 더워서 시간이 녹아버린 걸 수도 있다. 8월 말, 작열하는 태양은 자글자글 공기를 타고 내려와 우거진 수풀까지 집어삼켰고, 겁도 없이 수풀 사이로 몸을 던져 누웠을 때 푸릇한 풀 냄새와 까실한 촉감이 머리를 간지럽혔다. 끝없이 돌아가는 스프링클러에 불구하고 끓는 열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혀를 길게 빼 개처럼 헉헉거리며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지만 역시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았다. 기이하게 뻗은 잡초를 잡아 뜯으며 선명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울긋불긋한 깃털까지 몽땅 빠진 볼품없는 새가 떠난 속이 텅 빈 새장과 냄새나는 잔여물, 오래된 좁쌀에서 올라오는 눅진한 냄새와 말라붙은 물통까지 떠올렸을 때, 입안은 바싹 말랐고 갈증인지 원망인지 속이 울렁였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 나의 원죄까지 닿았을 때. 무언가 차가운 것이 머리를 스친다. 오후 두 시 반의 태양은 너무나 강해서 눈을 뜨기가 힘들어 가늘게 실눈을 밀어 올리고 본 눈앞의 광경은. 옅게 스친 베이비로션의 냄새.


“너는 여기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그녀는 항상 씁쓸한 베이비로션 냄새가 났다. 한없이 차갑고 보드라운 손가락으로 풀밭에 대자로 누운 사람의 이마를 톡톡 치며 앙칼진 목소리나 했다. 에메랄드 병실에서 언제 내려왔는지 소식도 없이 산책을 나왔다. 지난달 온 병동에 “김숙경 님 산책 중”이라는 경보 방송을 내렸던 장본인이 지금 멀쩡히 두 눈 뜨고 내 이마를 밀며 흰소리나 하고 있다.


“여기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요, 언니. 아 만지지 마세요.”

“그건 모르겠는데, 넌 여기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해. 난 눈을 보면 다 알아.”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 테지. 시간의 신이 외면한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뒤틀린 새장을 내다 버렸더라면, 그랬더라면으로 시작한 나비효과는 나의 원죄를 씻어줄 수 있을까.


“언니는 약이나 잘 챙겨 먹어요. 산책 좀 그만 다니고.”

번뜩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지 밑단에 붙은 물에 젖은 잡초를 떼어낸다. 진흙이 물들어 젖어든 옷이 피가 물든 것처럼 눅눅하다.

“흐림아. 너도 우리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니.”

우리는 잘못이 없다. 잘못이라면 이렇게 뒤틀리게 태어난 탓. 세상이 반쯤 기울어진 탓.

“나는 있지, 그냥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 너도 그렇겠지. 우리가 거창한 걸 바란 건 아니잖아. 근데 그게 그렇게 어렵더라고. 평생을 살아도 그게 그렇게나 어렵더라고.”


숙경 언니는 열흘에 한 번꼴로 정신이 맑게 돌아온다. 언니의 웅얼거림에 대답하지 않고 풀밭을 벗어난다. 짧은 잔디 같은 까슬까슬한 언니의 머리와 작은 어깨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진다. 다음 날 언니가 다시 에메랄드 병실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숙경 언니, 입에서 언니의 이름을 소리 없이 굴린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