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로맨스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로맨스 소설이 아니다.
그 해 마지막 날 이후 너를 한순간도 떠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볕이 들지 않는 가난한 나의 방에 너를 들인 적이 없어서.
그해의 겨울은 유난히 이르게 찾아왔다. 12월 5일은 건조하고 추웠다. 연일 이어지는 한파에 곱아든 손을 펼 틈도 없이 주머니가 터지도록 양손을 집어넣었으며, 핸드크림을 아무리 발라도 발갛게 튼 손은 회복되는 날이 없었다. 건조한 공기에 터진 코피를 막느라 고개를 젖히면 하얗게 뜬 하늘에 현기증이 났다. 12월 4일 밤, 감청색 크로스백이 터지도록 익숙하게 짐을 꾸리면 병실 반입이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예를 들면 샤프와 날카로운 모서리가 있는 물건을 세심하게 살피며 가방을 채우면 방 건너의 엄마가 내뱉는 땅이 내려앉는 한숨 소리에 마음이 끝없이 추락한다.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는 입원 기간을 가늠하며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을 친구들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며 새하얀 밤을 백야처럼 샌다.
너는 새빨간 비니를 쓰고 공용 휴게실에 앉아 다리를 떨고 있다. 밤새 울다 발갛게 부르튼 눈을 비비며 휴게실로 나왔을 때 해는 이미 다 기울어져 좁다란 빛만 내어주고 두어 사람 정도는 축구 게임을 하거나 체스를 두던 공간 중앙에 딱 한 사람만 남아 부산스럽게 다리를 떤다. “눈 온다.” 구식 시디플레이어에 travis를 넣고 돌리던 중, 노래 사이 적막한 순간에 너는 대뜸 말한다. 눈은 한 톨도 내리고 있지 않았다. 뚫어져라 느껴지는 시선에 할 말을 고르다 말고 병실로 돌아온다. 선명하게 짙은 눈썹과 양옆으로 사납게 찢어진 눈, 달달 떠는 다리와 새빨간 비니의 너는 병원복이 예쁘지 않다고 멋대로 리폼해 간호사의 혈압을 올리곤 했다. 너는 낮에는 작은 짐승처럼 웅크려 내내 자다가 꼭 해가 질 즈음 복도와 휴게실을 어슬렁거리며 참견하거나 창밖을 지칠 때까지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큰 망아지 같은 너를 피해 다녀도 시선의 끝에 내가 걸리면 너는 창밖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듯 지칠 때까지 망연히 나를 눈에 담았다.
“흐림씨 첫눈이 와요” 혼곤한 약 기운에 눈을 떴을 때 투약 트레이를 밀고 나가던 간호사가 감탄사를 뱉는다. 겨울은 일러도 눈은 늦어 첫눈이 맞았다. 홀린 것처럼 휴게실로 나갔을 때 너는 정해진 것처럼 공간 중앙에 앉아 마치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매고 있던 목도리를 획 하니 내 쪽으로 던진 너는 앙상한 겨울 창밖을 가리킨다. 아무도 밟지 않아 새하얀 눈이 소복한 앞마당에 서서 엉망으로 발자국을 찍고 가로등 밑을 보더콜리처럼 뛰어다니다 눈 천사를 만든다고 대짜로 눕는다. 하얗게 번지는 숨이 까만 밤하늘에 물든다. 너는 눈 위에 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언 손을 호호 불며 말한다. 너와 나는 이 동그라미라고, 모양이 같고 형질이 비슷하다며 동그라미를 지웠다 그리며 가깝게 겹쳐 그리기도 멀리 떨어져 새기기도 했다. 관찰한 시간이 무색하게 그 밤, 눈밭 위에서야 서로의 이름 세글자와 나이를 겨우 물었다.
병원에서의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간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휴게실에서 만나면 어색하지 않은 긴 침묵으로 공간을 채우며 창밖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새우깡을 좋아한다는 지나가듯 한 말에 숨이 터지도록 달려 병원에서 탈출해 까만 봉지에 새우깡 세 봉지를 담아 나에게 던지던, 너. 울적해 웅크린 내 곁을 맴돌며 세상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던 너. 우리는 사실 아픈 게 아니라 세상이 절반쯤 기울어진 건데 내 방향으로 바로 서려고 해서 멀미가 나는 것뿐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망가진 불량품으로 살기를 권하던 불순한 너. 긴 투병 생활에 처음으로 어쩌면 내 병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로 세상이 반 쯤 비틀어진 건 아닐까 하는 미친 생각을 하며 그 겨울을 견뎠다. 때때로 혀 밑으로 숨겼던 약도 제대로 삼켜 간호사 선생님에게 확인을 받았고 깔아지는 몸을 일으켜 런닝머신 위를 달리면 넌 근처에서 알짱거리며 헛소리나 했다. 면회 금지가 풀리자마자 들이닥친 친구들은 연말에 나를 홀로 두지 않으려 네이버 예약처럼 줄지어 찾아와 데스크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63병동에 연예인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2월 31일, 퇴원하던 날 나보다 신난 엄마는 새벽부터 찾아와 짐을 꾸리라고 재촉한다. 들어올 때보다 단출한 짐을 둘러매고 병실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면, 웬만하면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는 너의 말이 귓가에 쟁쟁 울리며 목이 멘다. 눈이 녹아 길은 질척했고, 기온은 상온을 오랜만에 웃돌았다. 복잡한 병원 주차장을 벗어난 엄마는 한동안 말없이 운전에 집중한다.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미간에 주름이 가득하다. 잠시 멈췄던 삶이 굴러갈 시간인데 계절이 바뀌려 하는 거리가 아득하고 입퇴원을 반복하면 으레 그렇듯 풍경은 연극 세트장같이 이질적이고 연기를 지독하게 못 하는 하급 배우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공백을 메우고 궤도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잠들었던 모바일의 전원을 켜고 낯선 번호를 입력한다. 차는 커브를 돌아 아파트 단지에 진입해 대형 슈퍼마켓을 지난다.
[너 이름이 김흔상이었나]
아파트 주차장에는 늘 그렇듯 자리가 없었다. 빈자리를 찾아 헤매던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먼저 내리라 손짓한다.
[지흔상]
[그럼 너는 스물둘이었나]
[스물넷]
흔상은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오빠였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지 못하고 웅크린 나는 마른 장작처럼 물기 없는 울음을 쏟아낸다. 쏟아내는 것은 흔상을 향한 그리움도,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슬픔도 그 무엇도 아닌 무언가였다. 허리를 굽히고 한참 울던 나는 가만히 다가온 엄마의 옷깃을 쥐며 말한다. 내일 핸드폰 번호 바꿀게요. 엄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