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tvN, 20220)>
연출 라인업을 보고 단숨에 기대작이 됐다. 색감과 구도 거기에 맞는 웅장한 멜로디의 음악들이 배우들의 표정과 함께 하나의 작품처럼 기억에 남아 있는 드라마 <빈센조>의 김희원 연출과 2022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각본을 맡은 정서경 작가가 쓴 드라마 <작은 아씨들>. 그리고 이 기대를 부추긴 예고편의 대사.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 이 대사를 듣는데 저 깊은 어디선가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위 대사는 드라마 1회에 나온다. 아직 인물들의 캐릭터가 정확히 밝혀지고 굳어지기 전이었지만 이 대사를 한 장마리(공민정 분)가 교묘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장마리처럼 세 자매를 향해 유독 저런 대사를 던진 인물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진실을 거짓으로 왜곡하고, 거짓을 진실로 믿으며 참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해왔다는 걸 알게 되면서 울분은 슬픔이 되었다. 참는다는 게, 어째서 가난의 상징이 된 것인지. 참지 못하는 사회가 된 건 경제적으로 가난해져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가난해졌기 때문은 아닌지.
드라마 기획의도를 살펴보면 작가는 젊은이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사랑도, 복수도, 모험도 아닌 돈에 대해서. 우리 사회 곳곳에 돈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흐르니까. 그렇게 고전 소설인 [작은 아씨들]에 닿았다. 책 속의 자매들은 끊임없이 돈과 가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녀들에게 영혼의 책인 [작은 아씨들]을 보며 소녀들은 누구나 자신이 네 자매 중 누구인지 생각하며 성장한다고 했다(기획의도 인용). 나는 [작은 아씨들]을 구매했고, 느리게 읽어 가고 있다.
[작은 아씨들]을 읽자마자 드라마 속 인물들과 소설 속 인물들이 정확히 매칭 됨을 느낄 수 있었다. 회사 돈을 횡령하고 사라진, 아니 죽은 화영 언니가 자신 앞에 남긴 20억을 보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던 첫 째 인주(김고은 분)는 현실감과 허영심이 있는 인물로 소설 속 메그를 닮았다. 취재해도 보도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자의 사명으로 보배 저축은행 사건을 취재하며 태풍과 맞서고, 가난한 일가족의 죽음을 보도하며 눈물을 흘리던 인경(남지현 분)의 정의감과 공명심은 소설 속 조를 닮았다. 그래서 이 두 자매는 눈먼 돈 20억을 두고 써야 한다, 신고해야 한다 사사건건 부딪혔다. 이런 두 사람이 유일하게 같았던 건 막내 인혜(박지후 분)을 향한 마음이다. 이들은 가난했지만, 그래서 달걀 5개가 생일 케이크가 되었던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동생에게만은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하지만 인혜는 그런 언니의 사랑을 불편해한다. “사랑이라는 거 주면 다 받아야 되는 거야? 받기 싫으면 안 받아도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고,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말하는 인주에게 인혜는 자신이 유학 간다고 언니 등골을 빼면 나중에 어떻게 갚냐고 말한다. 이 대사에서 언니를 남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 내가 인주가 된 것처럼 가슴이 아펐다. 인혜의 예술성과 야망은 에이미를 닮았다.
세 자매다. 소설에는 분명 네 자매인데. 사실 이들에겐 어린 시절 태어나서 얼마 안 돼 죽은 동생이 있었다. 막내 인혜가 선천적 심장병으로 쓰러진 후 알았다. 넷째 동생이 죽은 이유를. 아마도 인혜와 같은 병이 있었으리라. 아주 어릴 때 발병됐으나 병원에 가지도 못 하고 죽었다. 검사를 받을 기회도 그래서 어디가 아픈지 알지도 못하고 죽은 어린 동생에 대한 기억이 인주에겐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도박 빚을 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부모님을 대신해 두 동생을 챙겼던 인주의 강한 책임감이 화영 언니가 그녀에게 준 20억의 유혹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게 했을 테다.
인경과 인혜는 너무 어린 때라 죽은 동생에 대한 기억은 없었으나. 그 무렵 고모할머니 집에서 자라게 된 인경은 좋은 교육을 받았을 수 있었지만 부자들 사이에서 가난하다는 이유로 쉽게 도둑으로 몰렸던 기억이 가난에 대한 상처가 되었다. 인경은 죽은 아이가 동생이 아닌 자신이었던 것 같다는 혼란 속에 언니들이 어렵게 모아다 준 자신의 수학여행비 250만 원을 갖고 도망친 엄마를 보면서, 이 집을 떠나야 자신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언니들의 반대를 무시한 채 친구 효린이(전채은 분)네 집으로 간다. 그러니 이 세 자매도 처음엔 네 자매였다. 소설처럼.
작가는 상상했다. 책 속 자매들을 현대 한국으로 데려오면 현실감과 허영심을 가진 인주와 정의감과 공명심을 가진 인경 그리고 예술 감각과 야심이 있던 인혜는 가난을 어떻게 뚫고 어떻게 성장해 나갈까? 같은 환경과 사건을 겪었지만 세 자매는 전혀 다른 성향의 인물로 자란다. 20억 횡령 사건이 700억 횡령 사건이 되면서 점점 드러나는 진실 속에 이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 이유다. 하지만 [작은 아씨들]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우애가 깊었고 그건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피로 얼룩진 기억의 방 문을 닫지 않고 끝까지 들여다보았다는 점에서 인주, 인경, 인혜 세 자매는 닮았다. 그리고 나는 이들의 강인함이 가난을 뚫고 성장한 발판이라 생각되었다고 생각한다.
사건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 동생 인혜가 짐을 싸서 효린이와 사라진다. 처음 효린이네 집으로 간다고 했을 때 반대하던 두 언니는 자리가 잡히면 연락 주겠다는 무성의하게 남긴 동생의 메모에 만족하며 동생을 찾지 않는다. 영락없는 동생바보들. 이제 언니들은 인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혜가 처음 효린이네 집으로 간다고 했던 건 가난을 피해 자신의 재능에 값을 매겨주는 효린이네 부모가 좋아서였다. 언니들에 눈에 그 집이 제공하는 모든 것들이 대가 없는 호의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인혜의 계산엔 주고받는 게 있는 거래였다. 이런 거래는 마음에 부채를 남기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언니들의 희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아는 인혜는 계속 이 집에 있으면 미안한 부채감 때문에 그림을 포기하는 순간이 올 것을 느꼈다. 그건 인혜에게 있어 죽은 삶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효린이네 집으로 온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설명하지 않은 건 (내 생각이지만) 언니들이 져줄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자기가 잘못했을 때 사과 안 하면서 남한테는 철저하게 복수하는 성질머리. 그런 것 때문에 너 사랑해, 다른 이유 없어”라고 하는 언니들의 사랑을 믿었으리라.
하지만 이젠 효린이 뿐 아니라 인혜도 인주, 인경도 안다. 효린이네 집에 어떤 괴물이 사는지. 옮긴 그 집에서 계속 지낸다면 죽진 않아도, 괴물이 될 것 같았다. 괴물이 되어 그림을 남기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또 한 번 떠나는 걸 선택한 어린 두 동생의 선택을 이해하며 떠나보내 준다. “아이는 가족의 가울이라고 하셨죠? 잠깐만이라도 놔 주면 어떨까요? 애들이 너무 숨 막혔던 거 같아요.” 그렇게 세 자매는 ‘이해’라는 과정으로 한번 더 끈끈하게 우애를 다진다.
기획의도에서 소설 [작은 아씨들]을 보며 나는 네 자매 중 누구인지 생각하며 자란다고 했는데, 책을 보지 않아서겠지만 나는 드라마를 보며 저들 중 내가 인경과 인혜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 살 터울이지만 어릴 때부터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챙겼던 언니는 인주를 닮았다. 우린 자라면서 여느 집 자매들처럼 니 옷, 내 옷 하며 열심히 싸웠다. 10대 때는 힘으로 싸웠고, 논리와 가치관이 형성되가는 20대에는 말로 싸웠다. 그리고 지금은 서로를 이해한다. 싸우는 일이 현격히 줄었다. 긴 세월 동안 열심히 싸운 덕에 언니의 성향이 어떤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누구보다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고, 이제는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걸 똑같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인주와 인혜는 효린이를 보내주면서 서로 다른 상대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설사 나를 두고 돈을 찾기 위해 외국으로 간다 해도 괜찮다고 말하던 인경의 말에서, 그러니까 자신이 저축은행 피해자들, 죽은 제보자들, 자신과 함께 이 길에 나서 준 사람들 그리고 고모할머니를 위해 걷는 이 길도 응원해주지 않겠냐고 말할 때 웃으며 괜한 소리를 했다는 인주의 말에서 이들이 서로에게 족쇄나 굴레로서의 가족이 아닌 서로를 보호하며 지지해주는 ‘울타리’가 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드라마에서 주요한 매개체로 사건과 사건을 잇던 ‘푸른 유령’ 난초가 사용된다. 이 난초는 ‘아버지 나무’에 접붙여서만 살 수 있었는데, ‘아버지 나무’에 비유하며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줄 테니 ‘정란회’에 들어오라는 선배 기자에게 인경은 그런 아버지가 필요 없다고 했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어느 나이 때까지 부모의 도움을 받지만 일정 나이가 지나면 부모 곁을 떠나 자신의 꽃을 피어야 한다. 인주, 인경, 인혜는 그렇게 자신의 꽃을 찾아 피어갔다. ‘아버지 나무’에서 떨어져 그러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주어진 시련에 치열하게 부딪히는 세 자매를 보며, 특히 인경에게 가난해서 잘 참거나, 힘들게 자라서 맷집이 세다는 말들을 했지만, 나는 이 세 자매의 성장을 보며 그건 가난해서가 아니라 홀로 서는 법을 익혀 스스로 꽃을 피워가는 어른에게서 나오는 자랑스러운 단단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돈 앞에 괴물이 되어 자멸해버린 원상아(엄지원 분)와 세 자매의 차이라고 느꼈다. 11화에 원상아는 자신을 대신해 횡령죄로 감옥에 갇힌 인주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왜 700억을 욕심냈어. 700억 원 치 행복만 생각했어? 고통이 얼마짜리인지 생각도 안 하고?” 과연 700억 앞에 700억 원치 행복만 생각한 건 누굴까? 인주는 20억이 생겼을 때도 두려워했다. 하지만 동생들과 샷시가 잘 된 따뜻한 집에서 추위 걱정 없이 살고 싶었던 인주는 그 돈 앞에 마음이 일렁였다. 잠깐 행복했다. 하지만 그런 인주가 20억으로 산건 고작 올리브영, 편의점 세일 품목이었다. 700억이 아닌 20억 일 때도 그녀는 두려웠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말하던 인주는 이 돈이 ‘유혹’ 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옳은 일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700억을 욕심낸 것도 20억을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 죽음에, 저들의 불의에 눈 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되갚아주기 위해 필요했을 뿐이다.
원상아는 화영이 엄마가 돌아가신 후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횡령이란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지만, 화영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원상아가 보인 태도 때문에 원상아를 향한 복수의 계획을 세웠다. 소중한 것이 없었던, 손에 잡히는 건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가 유년시절의 죄책감을 벗어나려던, 자신밖에 모르던 원상아는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700억을 모으면서 행복한 생각만 한 건 원상아 관장뿐이다.
그리고 우린 그 결과를 보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낸 자의 끝. 돈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생각한 사람의 마지막. 원상아가 ‘닫힌 방’을 마주할 용기를 내지 않은 건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삶만 생각했다. 그래서 참는 법을 몰랐던 나약한 한 사람의 최후가 어떤지 우린 보았다. 원상아는 인주에게 700억을 욕심냈다고 했지만, 그 돈 역시 원상아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정당하게, 땀 흘려 얻어낸 것이 아니었으니 그녀는 자신이 인주에게 말한 것처럼, 눈앞에서 하나씩 빼앗기는 슬픈 소식을 들으며 그 값만큼의 고통을 치렀다.
12부작의 짧은 이야기 속에 내가 느낀 건 커가면서 추구해야 할 자립과 이해가 필요한 가족이란 관계 그리고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는 ‘돈’에 대해 나는 어떠한 영혼의 모습을 가져아하는지 였다. 가난이 사람의 영혼을 집어삼키는 현실은 지금도 주위에 많다. 어쩌다 뉴스에 나오는 건 너무 많아 매일 보도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자, 뉴스를 보도하며 눈물을 삼키던 인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경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찾고 싶었다던 뉴스는 가난한 우리 가족의 얼굴이었다고 말했다. 가난하지 않아야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던 인주는 마지막 회에 고모할머니가 남겨주신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앉아 이렇게 말한다. “아마 이제부터 난, 조금 다른 사람이 될 것 같다.” 그건 인경이 말하던 삶 “어떤 가난은 사람을 쓰러트리고 어떤 가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우린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잖아.” 라고 말하는 자랑스러운 삶이 아니었을까. 돈이 제 삶의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까. 700억보다 내 자신이 소중하니까. 그러니까 세 자매를 지킨던 돈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을 삼키는 것도 당연히, 가난이 아니다. 마치 그것이 진실인 양 말하는 말들에, 시선에 속지 않는다면 우린 소중한 내 자신을 지키고, 세 자매처럼 멈추지 않는 성장을 할 수 있으리라.
소설 [작은 아씨들]을 다 읽고 나면 이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다. 둘 사이에 더 긴밀한 무언가가 있을진 모르지만, 반전과 반전에 쫓겨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이들의 대사 속에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다시 한번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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