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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Nov 02. 2022

뒤를 돌아봤을 때 내가 있었으면 하는 자리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디즈니 플러스, 2022)>

“아니요. 정말로 돌아갈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노착희 씨는 분명 다른 선택을 할 겁니다.”


인생에 변화의 기회는 다양한 얼굴로 나타나는 듯하다. 매번 바뀐 얼굴로 나타나니 이게 기회가 맞나 고민하는 사이 놓치기도 하고, 기회라고 생각해서 잡은 것이 눈에 보기에만 좋은 것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번 놓치다 보면 잡아야 할 타이밍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러니 놓쳐도 놓치는 게 아니다. 그 기회를 살피는 사람에겐.


열심의 방향

착희(정려원 분)는 대형 로펌 중 하나인 법무법인 장산에서 6분에 수임료 4만 5천 원을 받는 명실상부 에이스 변호사다. 6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가며 일을 하고, 승소를 위해서는 의뢰인의 약점도 법정에서 폭로할 정도라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개', '마녀'라고 불렸다. 지방대 출신, 여자라는 이유로 착희를 무시하는 세력들도 있었지만, 그녀보다 열심히 하고 높은 승률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파트너 변호사로의 승진은 그녀가 기울인 열심에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승진을 기념하는 날 그녀는 자살방조죄로 경찰에 긴급 체포된다.


그녀를 자살방조죄로 고발한 사람은 장산의 대표다. 대표의 명분은 이랬다. 대표는 착희에게  수정이의 변호를 맡겼다. 착희의 오랜 친구이자 남편을 칼로 찔러 살인죄로 구속된 피의자. 대표가 착희에게 수정이의 변호를 맡긴 건, 수정이가 당시 장산이 맡고 있던 강산 제약 피임약 부작용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부작용으로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다 남편을 귀신으로 보고 칼로 찔렀다. 장산의 대표는 착희를 통해 수정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착희는 대표의 뜻대로 변호하지 않았고, 친구를 지키기 위해 사건을 키워 언론이 주목하게 만들었다.


장산의 눈은 속였으나 대표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착희가 한 일을 알고 있던 대표는 이 일을 명분으로 착희를 정하시 국선전담 변호사로 보낸다. 국회의원의 뜻을 품었던 장산의 대표는 ESG 기업 이미지를 만드는데, 착희의 국선전담변호사 이력을 이용하려 했다(*ESG : 기업의 비재무적인 요소인 Environment-Social-Governance 환경-사회-지배구조를 고려해 만든 지표로 지속발전이 가능한 기업인지를 평가).


국선전담 변호사로 1년만 지내다 오면 파트너는 물론 ESG 센터 이사 자리가 약속돼있었다. 착희에겐 대표의 제안은 곧 기회였다. 대형 로펌에서 승률 탑 찍던 착희는 자신만만하게 국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며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그녀가 과거에 변호했던 의뢰인들이 하나둘씩 살해되는 일이 일어난다. 마치, 잠시 멈춰 서서 인생을 되돌아보라는 듯 술술 풀려가단 인생의 끈이 이상한 매듭의 모양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완악한 마음과 부드럽게 녹아진 마음

그러던 착희에게 창문으로 화분을 던져 주차된 자동차를 파손하고, 병원에서 행패를 부려 기소된 피고인 최윤정(소이 분) 씨의 사건이 배당된다. 그녀는 병원에서 자신의 팔을 치료할 때 칩을 심어놨다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연락이 잘 안 되던 최윤정 씨 대신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착희는 그녀가 자신이 장산 인턴 시절에 무고죄로 고소해 처벌을 받게 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윤정 씨의 망상, 정신착란이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였다고.


사건의 진실은 이랬다. 윤정 씨는 자신을 성추행 한 경찰서장을 고소했으나 서장은 장산의 인맥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경찰서장은 적반하장으로 그녀를 무고죄로 고소해 처벌까지 받게 했다. 피해자가 억울한 가해자가 된 일. 그런 일에 자신이 열심을 다했다는 걸 알게 된 착희는 좌시백(이규형 분)이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산에서 너무 열심히 살았던 죄’.


자신을 ‘장산의 개’라고 부르던 좌시백 변호사의 일침도 대수롭지 않게 ‘시츄’로 받아치던 착희였으나, 그 일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이 부리던 ‘열심’의 방향이 맞았던 건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보고 훌륭한 변호사라 생각한다며 롤모델이라고 말하던 인턴 변호사에게 착희는 “ ‘성공하는’이 아니라?”라고 자조적으로 받아치며 돌아서기 전 이렇게 말했다. “아, 인턴! 훌륭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지금까지 승소가 성공이라고 믿었고, 성공은 곧 훌륭한 거라고 생각해오던 착희는 훌륭한 것 말고 제대로 된 변호사, 제대로 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고민 끝에 최윤정 씨 사건의 재심 청구를 신청한다.


사실 착희의 고민은 수정이를 변호했던 때 이미 시작되었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 장산까지 속여가며 판을 키웠고, 그 일로 자살방조죄로 고발되어 국선전담 변호사가 되었지만, 착희는 친구를 도운 걸 후회하진 않는다. 그건 약속받은 이사 직분 때문이 아니었다. 과거 자신의 젊음을 희생해가며 착희의 첫 등록금을 대주었던 친구에게 진 빚을 갚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도리며 제대로 된 사람이 되는 일이라는 걸 착희는 모르지 않았다. 지금 친구를 돕지 않으면 제대로 살 기회는 또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수심 가득했던 표정은 국선 변호사가 되어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재판과 는 전혀 다른 온도의 재판 분위기와 피고인의 사정과 거리가 먼 법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지금, 더 자주 착희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고민의 고민이 그녀로 하여금 지난 자신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좌시백은 그래서 착희가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생기면 분명 다른 선택을 할 거라고 장담하듯 말할 수 있었다.


사람이 변하는 계기는 다양하지만 공통된 모습을 상상하자면, 부드럽게 녹아진 마음의 모양을 띌 것 같다. 무지해서,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제대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을 변호하며 저들의 사정을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착희의 마음은 녹아지고 부드러워졌다. 안타까운 감정, 긍휼 한 마음이 들어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착희가 변화되는 동안 같은 걸 보면서도, 숱한 변화의 기회 앞에도 완악하게 그 마음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다. 악한 그들은 더 이상 일이 자신의 생각처럼 풀리지 않고 꼬여가며 인생에 단단히 경고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말하던 이들을 짓밟아 무시했다.


뒤를 돌아보는 시선을 갖는 것.


드라마는 착희와 시백이 재심 재판의 변론을 시작하면서 끝난다. ‘재심’은 한번 심사하였던 것을 다시 심사한다는 뜻으로, 확정 판결로 사건이 종결되었으나 중대한 잘못이 발견되어 소송 당사자가 다시 청구하여 재판을 하는 재판을 뜻한다. 대부분은 죽으면 끝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에선 무슨 일만 생기면 사람을 죽여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최윤정 씨의 재심을 준비하는 사이 피습을 당해 생명이 위태로운 경찰서장을 동정하지 않는다. 죽을 때 죽더라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죽어야 한다고 말하며 재심을 청구하고 그를 다시 법정에 세운다. 착희 주변에서 일어나던 연쇄 살인도 은폐되어 묻힌 지난 사건들을 수면 위로 올린다.


스스로 돌아보아 삶을 바로잡을 기회를 고집스럽게 무시하는 이들에게 드라마는 이런 강제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들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처음 이 드라마를 볼 땐 올해 차고 넘치는 또 하나의 법정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명의 에세이에서 가져온 국선 사건은 이전 법정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다른 온도로 사회에 소외된 이면을 보게 했고, 착희의 국선변호와 별개로 벌어지던 드라마 내 살인사건이 '재심 청구'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선 ‘제대로 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세를 생각하게 했다. 뒤를 돌아보는 시선을 갖는 것.


세상에 완벽하고, 흠 없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더욱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열심의 방향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야 지만 조금은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뒤를 돌아봤을 때, 나만의 성에 갇혀, 나의 의로움을 스스로 자랑하고, 미련한 춤을 추며 이를 뽐내는 어리석은 자의 자리가 아닌,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에 함께 하며, 기쁨을 나눠 배가 되게 하여 감사가 흘러가던 자리에 더 많이, 오래, 내가 있었으면 좋겠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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