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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Oct 23. 2022

언제나 미소 짓게 할, 아련히 아름다운 시절의 이야기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2022)>

매일 늦잠을 자던 보라(김유정 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어나 밥도 거르고 뛰어간 곳은 다름 아닌 ‘럭키 아파트’ 정류장이다. 그곳에서 보라는 심장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절친 연두(노윤서 분)가 짝사랑하는 백현진(박정우 분)을 기다린다. 보라에게 '럭키 아파트'가 있었다면 내게는 ‘유원 아파트’가 있다. 그 아이가 버스를 타던 정류장 이름. 내가 타던 정류장에서 여섯 정거장을 지나면 나오는 정류장. 오늘은 볼 수 있을까 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숨을 고르던 기억이, 버스에서 현진을 만나게 된 보라를 보며 떠올랐다.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2022)>는 미국으로 떠나는 연두에게 친구가 좋아하는 현진에 관한 모든 걸 알아내서 말해주기로 한 보라가 버스정류장부터 공략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예고편을 보는 순간  199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tvN, 2022)>가 떠올랐다. 영화는 조금 평이한, 어디서 본 듯한 스토리로 전개된다. 클라이맥스나 반전이라고 생각되는 지점도 큰 임팩트를 주진 못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든 생각은 이 영화는 특별하려고 하지 않아, 특별해졌다는 것이다.


친구가 좋아한 사람이었지만, 보라가 설레는 마음으로 현진을 보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달리던 발걸음에서 나는 이미 20세기의 나를 봐 버렸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인데도 그때 기억은 여전히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20세기 소녀(소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에서 꺼내올 추억 속 이야기 꾸러미가 예상한 가능한 스토리도 만 가지 색을 갖게 했다.


보라는 백현진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공중전화로 향한다. 그때는 ’ 전화번호부‘라고 해서 전국에 있는 가정집은 물론 가게 전화번호들이 이름순으로 정리된 책이 공중전화마다 매달려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 ‘전화번호부’를 통해 좋아하는 사람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려는 시도를 했었고, 보라 또한 공중전화에서 ‘백’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 전화를 차례차례로 걸어간다. 보라가 펼친 전화번호부를 유심히 보면, 옆 페이지 ‘주명학’이란 이름 앞에 누군가 쳐 놓은 별표가 보인다. 그는 어떤 이의 짝사랑이었을까?


몇 번의 전화 끝에 보라는 백현진 집 전화번호를 찾게 되지만, 전화를 받은 건 백현진이 아닌 그의 절친 풍운호(변우석 분)였다. 전화 연결에 성공한 보라는 앙케트 조사 기관으로 위장해 백현진의 삐삐번호를 알아내려 했지만, 눈치 빠른 운호에게 거리고 약점이 되어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비디오가게에서 19금 비디오 하나를 몰래 빌려주게 된다. 대신 운호는 현진을 보라네 비디오 가게로 데려가 신규 회원가입을 시키면서 보라가 원하던 현진의 삐삐번호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비디오가게에 자주 오고 가게 되면서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


짝사랑하는 애를 보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하던 발걸음, 만화책을 너무 좋아해 만화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 그곳에서 친해진 친구들, 작은 삐삐의 창에 숫자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고민하던 노력과 누군지 모르는 이가 음성메시지로 남긴 노래에서 그 마음을 헤아리던 영화 속 장면에는 그 시절 우리 모두의 낭만이 담겨 있다.



넷플리스 영화 <20세기 소녀>를 보고 나서 “나이를 먹을수록 무언가 좋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라고 시작하던 책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정지혜, 휴머니스트, 2020)]가 떠올랐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거라곤 교복에 붙은 명찰 속 이름뿐인데도 심장을 도둑맞은 듯, 파르르 떨리던 그 감정은 20세기 소녀였던 그 시절의 축복이었을지도.


그래서 이들은 어떤 21세기를 맞았을까. 지구 종말의 위기를 넘어선 20세기 소녀, 소년들. 메시지를 듣기 위해 전화부스를 찾아다니고, 연락할 방법이 없어 하염없이 기다리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그런 시절을 살아봤다는 게, 그립게 좋았다. 아련히 아름다운 시절. 지금까지 성장드라마가 내게 백전백승의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드나 보다. 20세기의 소녀로 그때, 그 감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이런 이야기엔 언제나 미소를 머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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