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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Nov 06. 2022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책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정혜진, 미래의 창, 2022)]

일본 드라마 [PICU 소아 집중치료실]은 제목 그대로, 훗카이도에 소아 집중치료실이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화는 3년 전 한 아역배우가 소아전문의를 만나지 못해 병원을 돌아다니다 사망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 일이 있은지 3년이 지나 훗카이도에 소아 집중치료실이 생기지만 장비와 병실만 있을 뿐 필요 전문 인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해 PICU로 정식 승인을 받지 못했다. 열약한 상황에 첫 소아환자가 이송된다. 3년 전 아역배우와 비슷한 증상. 소아전문의를 찾아 돌아다니다 너무 늦게 이곳으로 온 그 소녀도 끝내 살지 못했다. 소아치료실로 배정된 네 명의 의료진이 처음 가진 회의와 이번에 소녀를 잃으면서 모인 회의에서, 이 팀을 이끄는 우에노 하지메(야스다 켄 분)선생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요?” 그는 이 질문을 아이의 첫 증상이 발견됐을 때, 상태가 나빠졌을 때, 이송하던 상황 등에 반복해 던지며, 보완할 점과 해야 할 일을 적어내려 간다. 이와 같은 슬픔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웨이브에 이제 1화만 올라온 드라마다. 한국 의료체계와 환경이 달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우에노 하지메(야스다 켄)선생이 던진 질문은 요즘 읽고 있는 책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정혜진, 미래의 창, 2022)]와 이어졌다.


책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는 디즈니 플러스에서 시작한 동명의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됐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올해 읽은 책들의 8할이 드라마와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동명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국선전담 변호사로 책의 저자가 국선전담 변호사로 일하며 맡은 사건들이 드라마 속 법정 에피소드로 사용되었다. 물론 각색되어서. 드라마는 주인공이 만난 의뢰인들이 주인공 주변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주인공을 각성시키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계기가 된다. 대형 로펌에서 높은 승소율로 의뢰인을 변호하던 주인공 노착희(정려원 분)은 국선전담 변호사가 되었을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지만, 그동안 그녀가 맡아왔던 사건들과 전혀 다른 케이스에, 관대하지 않은 법의 분위기까지 매 사건 고군분투한다.


특히 4화에 나온 특가 절도로 기소된 준우 어머니 사건은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말을 못 하는 장애가 있는 준우 어머니는 홀로 아들을 키우는 동안 생계가 너무 힘들어 기저귀와 분유를 훔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집에서 장롱에 숨겨져 있던 돈을 훔쳤다. 아이의 수술비가 필요해 밀린 월급을 달라고 했지만, 고용인은 장애가 있는 준우 어머니를 조롱하고 무시하기만 했기에, 돈을 훔치고야 말았다. 행위 자체는 잘못한 일이지만 참작되어야 할 사정이 있음에도 검사는 기존에 동종 범죄 이력이 있다는 점에서 ‘특가법(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적용, 높은 형량으로 기소한다.


착희는 갈등하지만, 상황을 살피지 않고 라면 하나를 훔쳐도 이전에 생계형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특가법을 적용해서 감옥에 일 년씩이나 보내버리는, 이런 결정이 더이상 내려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시백(이규형 분)의 설득에 착희는 법정에서 특가법이 아닌 단순 절도로 공소장 변경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기소의 권한은 검사에게만 있기에 공소장 변경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 에피소드는 실제 정혜진 변호사가 간접적으로 경험한 일로, 공소장 변경을 요청했던 동료 변호사였던 정정민 변호사의 배짱이 통한 건 그때 딱 한 번뿐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특가법’ 중 ‘특가 절도’에 관한 조항은 2015년 2월 26일 위헌 결정이 나면서 삭제됐다. 안된다고, 어쩔 수 없다며 해오던 대로 따르던 분위기 속에서도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올바른 방향으로 조금씩 변해 왔다.


“재판장님, 만약 검사의 기소대로 피고인에게 특가법이 적용되면 피고인은 최소 1년 6개월에 해당하는 징역살이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수술을 앞둔 중학생 아들을 돌봐줄 사람은 없어집니다. 국가가 홀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이 어머니를 가혹하게 벌해서 얻는 이득이 대체 무엇입니까?”

드라마 4화에서 준우 어머니를 변호하며 공소장 변경을 요청한 착희는 변론 마지막에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법정 에피소드가 담긴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면 사람들은 짐짓 기대하는 내용이 있을 것 같다. 변호사를 만난 의뢰인의 극적인 변화라던가, 억울한 피고인의 진심이 전해져서 기대하지 못했던 선고 결과를 받는다거나 등등. 하지만 이 책엔 그런 이야기보다 위와 같이 현장에서 법의 한계를 직면하는 변호사의 고민이 담겨있다.


국선 변호사는 ‘변호인이 있어야 방어권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사건에서 피고인이 변호인을 스스로 구하지 못하거나 않을 때 법원에서 붙여주는 변호인’이다. 변호사를 선임해 높은 수임료를 지불하여 재판을 받는 사람들보다 국선 변호사의 조력을 받는 피고인들의 삶이 훨씬 불안정하다. ‘마음에 큰 병이 있는데도 수십 년 방치되고 치료를 받지 못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들, 폭력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미워했으면서도 어느새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발견하는 한때 피해자였던 가해자들,, 돈이 너무 궁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못하고 대출이나 취업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가 부지불식간에 엄청난 범죄 조직의 하수인이 되고 만 이들, 절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이를 지지해줄 사회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 순간의 유혹 앞에 번번이 무너져버리는 무력한 이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죄는 죄고, 벌은 받아야 한다. 하지만 각 각의 사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핑계라고, 의지가 약한 거라고, 나는 절대 법정에 설 일이 없을 거라는 식의 자신하는 태도는 금물이다. 죄인 줄 모르고 죄를 지을 수 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갇히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엔 피고인들의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났고, 이후에 피고인들은 어떻게 되어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드물다. 국선 변호사와 피고인의 관계는 사건이 진행되는 그 순간에 집중되는 관계며 그 현실이 담긴 까닭도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처벌에 집중된 판결에 회의를 느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7살 정도 지능을 가진 정신장애 환자)에게 1년 6개월은 형사 재판이 의도한 정당한 처벌과 반성의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처벌도 중요하지만, 그 처벌로 인해 부모와 떨어져 양육자를 잃고 살아가게 될 자녀들이 겪게될 상황이나 재범을 막는 게 더 필요한 사건에도 처벌의 강도만 다툴 뿐, 치료의 병행은 이뤄지지 못하는 현행 법에 대한 아쉬움 그로 인해 생기는 고민들. ‘일개 국선 변호인에 불과한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너무 거대한 화두였다’라고 고백하지만, 특가 절도법이 삭제 되게 한 변호사들의 시작도 그 막연한, 막막한, 거대한 문 앞에서부터 였을 것이다. 좋은 환경을 갖춘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지만, 환경을 탓하고 책임을 누군가에 물어야 하나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 아닌, 자신들이 놓친 건 없는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 고민하며 앞을 준비하던 PICU 팀의 질문은 이 책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나는 이 질문이 비단 특정한 인물, 가령 이 책의 저자같이 공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나 드라마 속에서만 가질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우리 각 사람이 가져야 할 질문이 아닐까 싶다. 전부 다른 상황 그리고 전부 다 다른 자리지만 그래서 각 사람이 이 질문을 잡을 때 모든 곳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걷는 걸음들이 생길 테니까. 이야기의 힘은 그런 것이라고 믿으며 이 책을 써 내려간 저자의 마음처럼, 내 삶에도 이 생각이 여러 모양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책 속 인용 문장은 회색으로 표시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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