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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Nov 20. 2022

나를 구하고 있는 좋아하는 것들을 향한 마음

책[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정지혜, 자기만의 방, 2020)]

친구 집에 초대를 받고 시간을 보내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며 집으로 나섰다. 이 날은 하루 종일 버스 운이 좋지 않았다. 십 여분을 기다려야 도착한다는 전광판 속 버스 대기정보를 확인하고 나는 앞 정거장으로 걸었다. 직진 코스로 한동안 달리는 버스 노선이라 서서 기다리는 대신 걸으며 앞 정거장으로 가 있을 생각이었다.


걷는 걸 좋아한다. 살짝 비가 오려하기도 했다. 이런 날씨도 좋아한다. 가로수의 낙엽이 너무 예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대의 버스를 보내며 한 시간 가량을 걸었다. 걷는 게 지칠 무렵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정거장에서 버스를 탔고 차장 넘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드비쉬 음악을 듣고 있었다. 클래식 같은 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리즘의 추천은 탁월했다. 차가 막혀 도로는 붉은빛을 내고 있었지만 비로 인해 조금은 눅눅해진 버스 안에서 노곤해지는 몸이 클래식과 만나 모처럼 편안했다. 분주한 마음을 정리해주는 이런 순간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사실 과거 나는 싫어하는 것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 쓴 글도 있지만, 그때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걸 말하는 게 나는 좀 부끄러웠고, 자랑하는 것 같았고, 떼쓰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싫어하는 건 명확했다. 가령 생선. 생선의 눈이 너무 무섭다. 구이를 먹을 거면 대가리는 식탁 위에 안 올라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싫어하는 걸 먼저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씩 삶의 반경이 넓어지고 경험이 쌓이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싫어하는 걸 이야기할 때는  ‘그렇구나’하고 끝나던 상대의 반응이, 좋아하는 걸 말하자 ‘나도 그런데!’ 라며 활기찬, 좋은 것들을 담은 대화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대화는 즐겁고 에너지가 넘쳤다. 인스타그램에 드라마 대사를 올리기 시작한 것도 지금 생각하니 이런 이유였던 것 같다. 가끔 좋아하는 배우, 작품, 대사로 서로의 삶과 생각이 담긴 피드를 천천히 다시 보다 보면 뭉클해지기도 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무적인 데다가 전염성까지 강해서 저마다의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도 금세 행복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라고 말하는 정지혜 작가의 책은 제목에서부터 강렬한 이끌림이 있었다.


대사를 손글씨로 옮겨 적으면서 자연스럽게 캘리그래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초창기에는 다른 분과 함께 원데이 클래스를 열기도 했었다. 대사만 올리다가 그 대사에서 파생된 생각들이 긴 글이 되면서 지금은 제안을 받아 드라마 리뷰 글을 쓰고 있기도 하다.


요즘은 세븐틴 덕질로 좋아하는 마음의 챕터가 하나 더 늘었는데, 이들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걸 경험하는 중이다(신나 신나!). 세븐틴 노래 가사로 배경화면을 만들어 공유하면서 알게 된 한 인친과 나는 스무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난다.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 할 어린 친구가 생겼다. 이런 모습의 나를 10년 전엔 상상이나 했을까. 이처럼 좋아하는 마음은 내게 예상치 못한 관계,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주었다.


뭐 가끔, 그 나이에 무슨 아이돌이냐며 좋아하는 마음을 비웃는 이들도 등장하지만, 과거와 달리 좋아하는 마음을 부끄럼 없이 표현하고 있다. 죄는 아니지 않나! 좋아하는 마음까지 누구와 비교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정지혜 작가의 말이 나로 하여금 좋아하는 여러 모양의 것들을 주저 없이 말하고, 더 많이 말해야 한다고 다짐하게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과 품을 쏟을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재고 따지느라 그렇지요. 요즘 저는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 행복이 날아갈세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해두곤 해요.”


내가 딱,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과 품을 쏟을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재고 따지느라’ 마음 한편을 생각보다 잘 내주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신 한번 마음에 들어온 건 꽤 오래간다. 오래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최근에 좀 지쳤었다. 한 이 년 정도 됐을까? 대사를 올려야 한다는 압박이 극에 달했다. 좋아해서 한 일인데 어느 순간 일이 되었다. 형식적으로 하다 보니 우리가 좋아하는 마음을 서로 나누고 있긴 한 걸까?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무렵 일과 관계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한 직장에서 4년을 넘어갈 무렵이었다. 장점으로 가득한 회사였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시들해지는 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과해서 크게 체하고 난 뒤부터는 삶이 전복되지 않도록 마음의 용량을 여러 갈래로 나누고 있습니다 … (중략) 일 때문에 힘들 땐 덕질을, 덕질 때문에 괴로울 땐 산책을, 덕질이나 산책에서 얻지 못하는 즐거움은 일이 채워줍니다. 장 자끄 상빼의 책 제목처럼 [인생은 단순한 균형의 문제] 일지도 모르겠어요.”


드라마, 세븐틴에 이어 새로운 좋아하는 것이 생겼다. 바로 등산. 저질체력의 상징인 내가 등산을 다닌다면 주변 사람들은 상상하지도 못 할 일이라며 놀란다. 산에 다니면서 체력이 좋아졌다는 게 생활에서 바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 겨울 설산을 보러 갈 계획이다. 매주 작은 산을 오르고, 매 달 한번 지역을 벗어나 산행을 하며 킬리만자로 등반을 준비하듯 한라산 등반을 준비 중이다.


전부다 처음과 같은 무게로, 영원히 좋아할 수 없다는 걸 느낀다. 대신 이처럼 여러 갈레로 나누어 균형을 맞추고 조금 더 오래, 다양한 좋아하는 모양들을 만드는 ‘좋아하는 마음의 순기능’에 집중하기로 했다.


“ ‘나는 이런 사람’ 일 거라는 예상을 깨부수는 일만큼 짜릿한 건 없습니다. 상대방에게도, 자신에게도 요.”


이 책은 내 안에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도 해주고,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도 생각하게 하면서 더불어 타인을 향한, 타인이 가진 좋아하는 취향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까지 여러 각도로 좋아하는 마음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책을 사서 바로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번 더 읽고, 지금은 적어둔 문장들을 보며 ‘좋아하는 마음의 에너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좋아하는 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그 행복이 날아갈세라 글로 기록’할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우리를 구할 수 있게, 당신이 좋아하는 마음도 자주 말해주길.


이 책을 향한 좋아하는 마음도 이 글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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