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설산을 오르고 왔습니다.
자라면서 안 된다는 말이나 불가능할 거란 반대의 말을 들어본 기억이 크게 없다. 그보다는 ‘잘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라는 말들로 자랐다. 그건 내가 가진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가능한 선에서 목표를 잡고, 이룰 수 없어 보이는 일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지나친-안전지향적 성향 탓이 컸다. 그래서 올 겨울에 한라산으로 설산 등반을 가겠다고 했을 때 부딪힌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뭘 그렇게까지 반대를 하며 염려할 일인가 싶긴 하지만, 아빠, 엄마를 비롯해서 언니와 가까운 친구들 모두 나의 설산 등반을 우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물, 혈기왕성하다는 그 시절에도 밤새서 놀지 못했다. 이제까지 대상포진도 두 번이나 앓았고, 간 수치가 급격히 올라 일주일 가량 입원한 전력도 있다. 체력 증징을 위해 크로스핏에 도전했다 간에 무리가 와 병이 난 적도 있어서 나 역시 내 체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겨울마다 감기를 달고 살고, 조금만 피곤해져도 입 안이 다 터지는.. 그래서 더더욱 안전히, 가능한 선에서, 무리하지 않게 내 몸을 운용해 왔다.
산은 집순이의 생활 반경에서도 아주 가까이 있었다. 걸어서 15분만 가면 산에 올라갈 입구에 닿았다. 하지만 처음엔 290 높이의 우면산도 한 번에 오르지 못할 정도의 체력이었다. 그날 만약 억지로 산에 올랐다면 한라산을 갈 생각은 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분명 근육통을 앓았을 것이고, 산은 내게 무리한 곳으로 남았을 테니까. 결국 중반부에서 산을 내려왔다. 그게 미련으로 남아 그다음 주에도 산에 올라갔다. 지난번에 내려온 곳은 정상과 불과 10분 남짓의 지점이었다. 그렇게 매주 한 번 우면산을 올랐다. 그러면서 겨울 눈이 쌓인 한라산을 오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올해 우면산에 오르기 시작한 건 2월이다. 메마른 나무 가지들로 휑한 겨울 산. 이 계절의 산은 다른 계절들에 비해 볼 게 없다. 하지만 사계절의 우면산을 경험하면서 내가 겨울 산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빽빽하게 울창한 산은 몸이 큰 곰 같았다. 나뭇가지마다 가득 피어낸 잎사귀들이 만들어내는 어둠은 시원함보다 공포로 다가왔다. 더운 날씨에 산을 오르면서 오르는 열기는 더 빨리 지치게 했고 불쾌감도 높였다. 그에 반해 겨울의 차가움은 산을 오르면서 만들어지는 몸속의 뜨거운 열기를 따스히 누릴 수 있게 해 줘서 좋았다. 가지에서 나뭇잎들이 떨어지면서 확보된 시야 속에 함께 등반하는 사람들을 보는 안정감이 좋았고, 메말라서 앙상한 이 가지 위에 눈송이가 핀다면 얼마나 예쁠까. 그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눈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꾸준히 일 년간 우면산과 청계산, 남한산 등을 오르며 체력을 길렀다.
그리고 12월 15일 드디어 한라산 설산을 올랐다. 나는 어리목-윗세오름-남벽분기점-영실코스를 선택했다.
처음 12월에 한라산 설산을 보러 갈 거라고 말했을 때 주변 반응은 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로 여겼다. 하지만 계속해서 우면산을 오르고, 멀리 떨어진 산에도 가고, 운동복을 하나씩 사더니 급기야 등산화까지 구매하는 걸 보면서 진지하게 말리기 시작했다. 예삿일 아니라고, 갔다가 감기 걸린다, 병 난다, 대상포진이 또 오면 어쩌려고 그러냐. … 물 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하는 말들이 쌓이자 오기라는 게 생겼다. 절대 아프지도, 다치지도 않고 다녀오리라! 이런 오기를 처음 느껴본 것 같다. 반대에 부딪힐 때 생기는 에너지 중 이렇게 강한 자극체가 있다니. 거스르며 살아보지 않아 이런 반응을 느낀 게 지금의 나이라는 게 조금 쑥스럽기도 했지만, 미련도 땔감이 된다던 드라마 <런 온> 속 대사가 떠올랐다. 나와 다른 입장 속에도 나를 자극하고 뜨겁게 만드는 땔감이 있었다. 그들의 염려를 통해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던 나의 연약함이었으나, 그래서 포기하는 게 아닌 백록담 코스보단 조금 수월하면서도 한라산의 설산을 즐길 수 있는 어리목-영실 코스를 택했다. 이번 산행의 목표는 “정상”이 아니라 “설산”을 즐기는 것이라니까!
과거의 나였다면 무리를 하더라도 정상을 가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언제부턴가 내 삶에 무리하지 말라는 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 그 말은 분명 위로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말이 반복되자 꽤나 큰 부담이 됐다. 무엇을 하려 해도 무리하는 건 아닌지, 무리하는 걸로 비치는 건 아닐지. 그래서 걱정을 끼치면 어쩌나. 무리하지 말라는 말은 넘쳤지만 그래서 어떻게 무리하지 않을지에 대한 고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런 고민을 이어가던 어느 날, 우면산을 오르다 멈췄던 그날이 생각났다. 산을 오르면서 나는 언제라도 버겁다 싶으면 내려오자고 다짐했다. 산은 어디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니 다음에 또 오르면 된다고. 꼭 오늘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며 내 안에 여유를 만들었다. 그리고 산을 오르는 이유가 정상에 가기 위함이 아닌 체력을 올리는 것이었기에 정상에 집착하지 않았다. 목표를 달성함으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모두 일등, 정상,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 ‘목표’라는 표현으로 불리면 그런 의미들로 변질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백록담이 아닌 어리목-영실코스로 간다고 하면 모두가 짠 것처럼 “그래도 정상에 가봐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해도 괜한 시험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한라산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백록담은 푸르른 계절에 다녀오려고요. 그때까지 체력을 좀 더 기르려고요.” 목표가 레벨업 했다!
산을 오르면서 배운 게 많다. 이전에 나는 자신을 평가절하하며 가능한 일들만 안정적 시도하여 성공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시도해보고, 다시 해보며 끝까지 가는 경험이 생겼다. 목표가 성공과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니, 세분화된 나만의 목표를 세우며 정상이 아닌 나를 이뤄가는 새 해로 채워가고자 한다. 걱정과 염려를 갖고 불안해하는 걱정인형의 재질은 버릴 수 없겠지만 그것을 계획에 대한 집착으로 해결하지 않는 방법에 대한 고민도 시작된 듯하다.
우리가 도착한 날만 해도 제주는 눈과 비와 우박이 오락가락하며 강풍이 거셌다. 어리목 방면의 통제가 떴고, 택시 기사님은 요즘 제주 날씨가 하도 변덕스러워 기상청도 제대로 예측을 못 한다면서 내일 산행은 불가능할 거라고 하셨는데 걱정과 달리 다음 날 제주의 날씨는 영상 10도까지 올랐다. 전 날 내린 눈으로 완벽한 설산을 만끽하면서도 춥지 않은 온화한 날씨의 도움을 받아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사실 숙소에서 어리목 탐방로 입구까지 택시를 타고 가려했지만 택시 아저씨의 거절로 급 버스를 타고 가야 했고, 등산 1시간 사이 세 번의 고비가 찾아오는 등 예기치 못한 상황들에 당황했지만 모든 건 순탄히 풀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기에 가는 동안 경로가 바뀌어도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유연함은 앞으로 내 시간에 아주 중요한 이슈가 될 거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많이 기도했고 기도를 부탁했고, 날씨부터 하산에서 돌아오는 순간이나, 숱한 결항과 연착 속에도 지체함 없이 비행기가 이륙해 안전히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던 여행의 모든 순간에 예비하심을 가득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앞으로 텔레비전이나 어디서든 설산을 볼 때면 나는 이번 산행을 떠올릴 것이다. 목표를 잡고 이루며 때로는 도중에 내려오게 되는 절망의 순간에도 이번 산행이 떠오를 것 같다. 그때마다 예비하심으로 함께 하신 이번 동행도 기억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번 한 주간 경험한 감사와 깨닫게 하신 배움들이 삶에서 흩어져 추억으로만 남지 않고, 매일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새로 산 다이어리를 펴서 다음 해에 나만의 목표를 세워 가봐야지.
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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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지 않은, 한라산 어리목-영실코스 정리 :)
설산은 일기예보 눈치싸움이란 소리도 있더라고요. 제가 올라간 날에도 아침 7시 비행기로 내려서 바로 한라산으로 오신 분도 계셨어요. 전 직장인이라 미리 휴가신청서를 내야 해서 이번 날씨는 온전히 예비하심으로 만끽할 수 있었지만, 떠나는 게 자유롭다면 한라산에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가 있음 참고하셔서 비행기 티켓 끊고 날아오시면 됩니다! 다음 날 기온이 영상으로 치솟는, 저와 같은 날씨가 아니라면 눈은 2-3일 안 녹고 있지만 풍성한 눈송이를 보고 싶다면 빠른 움직임이 좋을 듯싶어요!
교통편 : 저는 뚜벅이라 택시로 이동하려 했는데 전 날 내린 눈으로 길이 얼어서 운행을 거절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래서 시내버스터미널에서 240번 버스를 탑승했습니다. 1시간 정도(50분) 배차 간격이 있으니 사전에 시간표 확인하시고 탑승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가능하시다면 시내버스터미널에서의 탑승을 추천드립니다. 시내버스터미널 정거장에서도 이미 버스가 꽉 차서 다른 곳에서 타시면 분명 서서 가실 거예요ㅠ 올라가기 전부터 체력 소진 노노. 택시를 이용하실 수 있으시다면 어리목 탐방안내소까지 가 달라고 하시면 버스 정거장부터 약 15분 정도는 덜 걸으실 수 있어요. 전 영실코스 방향으로 하산했는데, 영실코스는 입구에서 버스정류장, 주차장까지 2킬로가 넘어요. 저희처럼 타임이 좋게 입구에서 택시를 만나거나 택시를 부르실게 아니라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 긴장을 푸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옷 : 전 따로 구매하지 않아 (엄마 표현으로) 거지꼴로 다녀왔습니다.. 추위를 많이 타서 뭘 입고 갈지 엄청 고민했는데 여러 조언 중 공통점은 많이 껴입으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위에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굴러가기 직전까지 입었습니다. 도움이 되실까 싶어 적어봅니다.
히트텍(보온성)-요가 상의(땀 흡수, 열 배출 최소화 기능성)-핫팩 한 개 붙임(가방 닿는 부분)-후드 티(기능성 후드 집업+경량 패딩을 많이 추천받았으나 둘 다 없어서 후드티로 갈음)-고어텍스 잠바(등산인 친구 협찬, 매서운 바람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후리스 잠바(는 추위를 많이 타는 제게 추가된 거고, 등산인 친구의 조언은 경량 패딩을 입었으면 코어텍스 기능성 외투까지만 입어도 된다고 했어요. 아무래도 기능성 옷 하나 정도는 챙겨야 하나봅니다. ) *등산인 친구의 인스타와 블로그 주소를 공유해봅니다. [블로그, 인스타그램]
하의는 요가 바지-기모 운동복을 입었는데 춥지는 않았습니다(추울 수 없겠죠). 등산인 친구는 기모 레깅스-요가 바지를 권했지만 전 더 두꺼운 기모 운동복을 택했습니다. 산행 초반에 후리스 잠바를 벗었다 전 곧 다시 입었어요. 땀이 식는 속도가 꽤나 빨라 겉 상의를 벗었다면 잠깐 쉬는 5분이라도 다시 입고 체온을 지키면서 쉬시는 걸 추천드려요.
신발은 유일하게 구매한 품목인데요. 등산화는 다소 부담스럽고, 평소에도 신고 다닐 수 있는 디자인이면 좋겠다는 욕심이 담겨 뉴발란스 프레쉬폼x 이에로 v7을 구매했습니다. 트레일러닝화라 발은 편했는데 네.. 메쉬 소재라 눈에 양말이 젖었… 습니다. 양말을 하나 더 챙겨가 내려갈 땐 갈아 신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스틱은 사용해본 경험이 없다면 오히려 불편할 거라고 해서 전 따로 챙기지 않았고 대신 아이젠은 필수입니다. 눈 쌓인 산을 아이젠 없이 걸으면 위험할 뿐 아니라 체력소모다 2-3배 되니 꼭 가져가세요. 이런 장비들을 구매하시기에 부담된다면 제주시내에 대여해주는 곳이 많으니 대여점을 이용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제가 추천받은 곳은 코오롱 매장인데요. 시내에 있으니까 그냥 들려보셔도 재미있을 듯(코오롱 몰을 검색하시면 됩니다).
코스 : 백록담이 부담스럽다면 어리목-영실코스 혹은 영실-영실코스도 많이 오르시는 것 같아요. 전 같은 코스로 오르내리기 싫어서 어리목으로 올라 영실코스로 내려왔습니다. 어리목은 산속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저는 초반 1시간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산속으로 걸으니 저는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아 덜 춥게, 눈이 가득 쌓인 풍경을 누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윗세오름에서 라면을 먹고(음식물 버리는 곳이 있습니다. 보온병에 물은 뜨겁게!!) 남벽분기점을 갔습니다. 끝까지 가지 않으신다 해도 한번 가보시길 추천해요. 코스 중 가장 아름다웠던 코스고, 백록담의 한쪽 면을 꽤나 가까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려오면서는 병풍바위를 등지고 내려왔는데 옆이 절벽이라 (쫄보는 겁이 났..) 바람이 굉장하게 불더라고요. 병풍바위를 보며 올라오는 것도 꽤 멋질 것 같았어요. 다만… 영실코스는 정상에 가까울수록 코스가 더 빡.. 세단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코스가 고민이시라면 유튜브에 영상이 많더라고요. 참고하시면 좋으실 듯!
기타 : 간식 먹으면서 올라가라고 해서 엄청 많이 챙겨갔는데 전 간식을 잘 챙겨 먹는 타입이 아니고, 걷는데 집중하는 편이라 초콜릿 두 조각과 스키틀즈 작은 봉투 하나 정도 먹었던 것 같아요. 개인 차가 있는 부분이라 다른 등산객분들은 중간에 멈춰서 과일도 드시고 믹스커피도 드시더라고요. 전 물을 많이 마셔서 500미리 생수 두 통을 올라가고 내려올 때 한 통씩 조절해가며 마셨습니다. 보온병의 물까지 가방 무게를 더 늘릴 수 없었거든요. 얼마나 마실지 감이 잘 안 오실 수 있는데, 등산하는 친구가 평소 산을 오른다면 얼마나 마시고 있는지 체크해보라고 해서 여러모로 전 생수 2병을 준비해서 올라갔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라산 입산 통제 여부는 [한라산 국립공원] 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분들은 실시간 CCTV 화면을 통해 어디에 눈이 쌓여있는지 보고 눈 구경을 가기도 하신다고 하네요. CCTV 화면은 어리목 방면 통제나 교통사항을 보는 정보로도 사용하실 수 있어서 함께 공유드려봅니다 [교통정보센터].
이상, 간략하지 않은 설산 등반 정리와 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