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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Oct 29. 2022

너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으면 좋겠어

언니의 친한 친구가 아이를 낳았다. 엄마와 이모로 불리는 언니의 등을 오가며 자던 아이는 이제 두 발로 ‘통통’ 걸으며, 들고 있는 물건을 봉투에 넣어달라는 말까지 할 수 있는 두 살이 되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언니의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은 우리 집에 들러 수다를 나누다 간다. 손주 구경은 꿈도 못 꾸고 있는 우리 아빠를 위해 들려주시는 듯하다. 아이가 ‘하라부지!’하며 아빠를 찾으면, 아빠는 가장 아끼는 간식거리를 나눠준다. 하루는 찐 밤을 하루 종일 까시길래 이따 먹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 밤 전부를 아이의 집으로 보냈다더라. 우리 집 현관문부터 하라부지! 를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공주 이모가 좋아? 팬더 이모가 좋아?


언니는 대답을 확신하고 물었던 것 같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예쁜 거 보면 사다 주고 토요일에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문화센터도 같이 가주는 자신의 위치를 확신했다. 공주 이모, 그러니까 자기랑 팬더 이모, 나 중에 누가 더 좋으냐고(‘판다’가 정확한 표기지만, 아이의 발음대로 불리는 ‘팬더’가 내 이름이다).


내가 팬더 이모가 된 계기를 짧게 이야기하면 아이에게 나의 애착 팬더 인형을 줬기 때문이다. 아이가 우리 집에 오던 초창기 땐 낯을 가렸다. 귀엽다며 달려드는 어른들이 무서웠을지도. 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내게 온 아이를 나는 무관심이라는 관심 속에 바라보다 작은 팬더인형의 손을 빌려 인사를 했다. 그렇게 몇 번 작은 팬더로 인형 놀이를 해주었는데 그 뒤로 아이는 집에 가서도 코끼리 인형을 데려와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더라. 아이 엄마인 언니 친구가 귀찮게 됐다며 내게 책임을 지라길래, 책임감을 갖고 나의 팬더 인형을 주었다. 이후로도 집에 오면 나는 무관심의 관심을 보이고 아이는 나를 찾아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의 유대는 이렇게 생겼다.


그러니 아이가 시종일관 붙어서 키운 공주 이모가 아닌 나를 선택한 건, 조금만 놀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운해한 언니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언니에게 ‘공주’를 포기하고 나처럼 ‘팬더’나 아님 아이가 좋아하는 ‘고래’로 이름을 바꿔보라고 했다. 괜히 네이밍이란 개념이 생긴 게 아니라고. 하지만 언니는 공주를 포기 못 했고 지금도 선택에서 나한테 패하고 있다.


나는 어디서 이름을 말하는 건 부끄러워하면서, 친해지고 싶으면, 거리가 좁혀질 것 같은 사이엔 상대를 부를 이름을 찾는다. 그 이름은 꼭 본명, 성과 이름의 구조가 아니어도 좋다. 나를 이름의 앞부분만 불러 ‘양보’라고 하는 것처럼, 그저 친숙히 부를, 좋은 어감이면 좀 더 좋겠다. ‘팬더’처럼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담겨도 좋고.


이름은 그 사람, 사물, 대상, 장소 등의 의미가 담긴다. 그렇게 불려지는 데는 이유가 있어 유례를 찾아도 본다. 그럼 그 대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니 내가 부를 당신과 당신이 부를 내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우리의 사이를 담아낼 형태의 단어로, 너와 나를 이해하는 의미가 담길 수 있게.


익명으로, 때론 무명(無名)으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사는 걸 선호하는 시대고 나 또한 그런 그림자에 나를 숨기며 이를 편하게 느끼기도 하지만, 무어라 부를지 몰라 그대 곁을 서성일지언정 피상적인 단어로 인사하고 그렇게 멀어지고 싶지 않아, 당신의 이름을 찾고 찾았다.


그러니 이제는 당신에게선 부를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걸맞은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그런 시대의 회복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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