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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Sep 15. 2022

단정한 반복을 사랑해

책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봉현,창비, 2022)]

토요일마다 재활병원을 다닌 지 벌써 2달째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나와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잠시 고민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강남역 교보문고가 있다. 서점에 안 간 지 너무 오래라 이번 주엔 가볼까, 간 김에 문구 쇼핑도 하고.... 그러자고 생각했는데... 그쪽 방면으로는 사람이 너무 많다. ISTJ는 익숙하게 발걸음을 돌려 왼쪽 방향으로 걸어 나와 초등학교 앞에 있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이제 이곳에서 3시간 정도 작업을 하고 집에 들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뒷 산에 오를 것이다. 재활병원을 다니면서 생긴 루틴이다.


한 두 번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루틴을 나는 꽤나 열심히 지키는 편이다. 새롭게 생긴 토요일 루틴 덕에 두 달 사이 브런치 발행 수가 평균에 비해 많았다. 루틴의 긍정적 효과다. 다만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익숙하게 자리 잡은 방향을 쉽사리 잘 틀지 못하고, 계획이 흐트러지면 예민해진다는 극명한 단점도 있다. 못한 일에 대해선 '오늘은 못 했네'보다, 못 한 자신을 드잡이 하느냐 정신이 쇠약해진다. 최근엔 밋밋한 일상으로 경험이 없어서 글이 써지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를 더 해야 하는 부담감도 커졌다. 이런 생각도 루틴처럼 반복된다.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창비, 2022)]을 쓴 봉현 작가는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같은 업무를 반복해서 하는 나는 출퇴근도 없고 작업 방식도 자유로운 프리랜서의 삶을 막연히 동경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봉현 작가를 통해 본 프리랜서의 삶은 자유롭지만 고독했고, 지켜야 할 룰이 없지만 그래서 지켜지지 못하는 생활 패턴은 낮과 밤을 자주 바꿨고, 불안정한 일의 패턴 속에선 밥이나 쉼 같이 자신을 위한 일은 뒤로 밀려나기 일수였다.


드라마 <런 온>에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는 오미주(신세경 분)가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업무를 감시하고 채찍질 해줄 사람이 없다며 스스로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작업 일지랑 계획표를 작성하며 일한다. 업무 일정으로 가득한 그녀의 스케줄표를 보던 선겸(임시완 분)은 저녁 7시 일정 밑에 선을 긋고 "밥"이라고 적었다. 제때 식사를 안 하고 일만 하는 게 문제라면서, 계획표 상에 있던 문제점을 발견해준다.


봉현 작가가 루틴을 만든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선겸을 만나고 미주는 낮밤이 바뀐 일하는 습관을 바꾸고 아침에 일어나 러닝을 하듯. 봉현 작가는 단정한 반복을 만들어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오래 할 수 있도록 지켜나갔다.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라는 제목은 봉현 작가의 고백처럼 들렸다.



매일 쌓는 하루, 하루의 루틴을 되짚어보니 나의 하루도 단정한 편에 속하는 것 같다. 화려하지 않고,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쌓이는 시간 속에 원고료를 받고 쓰는 글도 생기고, 가끔 제휴 제안도 들어오고 있다. 어영부영이지만 책도 한 권 냈고, 금년엔 그 책을 개정할 생각으로 분주하다. 물론 책을 봐주는 친구는 루틴적인 삶과 조금 거리가 있어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지체되고 있지만 요즘엔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 관리하고 있다. 루틴에 지배받은 내겐 이런 카테고리 정리는 멘탈 관리에 도움이 되었다. 과거라면 지체되는 시간이나, 예상대로 되지 않는 과정에 속이 타고 필요 이상의 죄책감을 갖기도 했는데,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는 결론을 얻으면서 가능해진 사고다. 봉현 작가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비슷한 성질의 사람으로 꽤나 위로와 위안을 얻었다. 이러한 단정한 반복은 결국 나의 일을, 시간을,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 거라는 용기를 준다.


꾸준히, 계속할 수 있는 단정한 반복으로 나는 어디까지 이끌까? 그곳은 아마도 어제와 같겠지만 5년 전, 10년 전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단조롭지 않구나, 지루한 일이 아니구나. 무겁게만 느껴졌던 최근 몇 개월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다. 단정한 나의 반복을 조금 더 어여쁘게 봐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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