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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ug 23. 2022

그러니까 또, 쓰겠지.

책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외 8, 유선사, 2022)]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혼, 2018)]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기분부전 장애(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와 불안장애를 겪으며 정신과를 전전했던 저자와 정신과 전문의와의 12주 대화를 엮은 책이다(네이버 도서 설명 인용).


 제목에 이끌려 책을  사람이 상당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시 그랬고,  친구도 그랬다. 미친 듯이 짜증이 나고 그래서  뒤집고 싶은, 아니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그런   떡볶이가 생각나는 한 사람으로서 비록 저자와 같은 장애를 겪고 있진 않으나 제목이 말하는 마음이 뭔지   같았다. 같은 맥락으로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책을 그냥 지나칠  없었다. 비록 나는 책의 저자들처럼 쓰는 일을 업으로 두고 있지는 않지만, 제목이 말하는 마음이 뭔지   같았으니까.


전고은

p39-40. 이런 나의 생각이 문제다. 쉬운 것은 인정하지 않는 생각. 어려운 것만 진짜라고 여기는 생각. 결핍과 고통에서 빚어진 게 아닌 글들은 가치 없다고 여기는 생각.

들여다보면 계란말이 하나 김치찌개 하나 어느 것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데, 그 너머를 보지 않고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해버리니 냉소적이게 된다. 냉소적인 태도는 모든 창작을 갉아먹는다.


이건 내게도 있는 문제고 글 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문제다. ‘냉소적인 태도가 모든 창작을 갉아먹는다’ 라니. '해서 뭐하나', '써서 뭐하나',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냉소적 생각이 멈춰버린 건 비단 쓰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p41. 그때까지는 가짜라도 쓰고 싶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써봐야 알 수 있다.


쓰다 보면 명확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뭐가 뭔지 모르지만 우선 쓴다. 대부분 그런 글은 임시저장 속에 들어가 그대로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남지만 적어도 내 안에선 무언가 정리된 기분이 든다. 감정을 털어냈던 건지도. 쓰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나 좌절이 아닌 ‘쓰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이라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석원 작가의 말처럼(p72).


이석원

p72. 이 원고를 마친 후 다시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로 돌아가더라도, 쓰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그 많던 시간들이 꼭 무의미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 조금은 하게 되었으니까.

인생은 늘 이렇게 오락가락이다. 어떤 날엔 그 어떤 난리를 쳐도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겠다가, 어느 날엔 책 한 권 분량을 뚝딱 써냈다가. 언제 가는 죽도록 쓰고 싶었다가 또 어떤 날엔 죽을 만큼 쓰기 싫었다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 피해 다니고 싶을 정도의 일이 돼버린다는 작가의 고백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석원 작가처럼 유명하지 않고, 그 정도로 써야 하는 글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나는 왜 저 아이러니함을 알 것 같고, 속상한 건지. 인생은 늘 이렇게 오락가락이라서 살 수 있는지도. 그동안 내 안의 소란스러움이 글을 쓰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너무 한결같아 고민이 없다면 글도 필요 없게 될 테니까.

이다혜

p78. 꼭 내가 써야 하는 글이 세상에 있을까?

그래서 세상 괴로운 것이 시키지도 않은 글을 쓰면서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의 호소를 듣는 일이다.

p82. 글 쓰는 사람들은 정답이 없는 상태에서 읽고 쓰고 안간힘을 쓰면서 원하는 무언가에 가까워지고자 한다.

p92. 쓰지 않은 글을 쓴 글보다 사랑하기는 쉽다. 쓰지 않은 글은 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쓰지 않은 글의 매력이란 숫자에 0을 곱하는 일과 같다. 아무리 큰 숫자를 가져다 대도 셈의 결과는 0 말고는 없다. 워든 써야 뭐든 된다.

p93. 어떤 글은 긍지를 깎아먹고 어떤 글은 자존감을 높인다. 결과가 어떻든 쓰기 만만했던 글은 단 한 편도 없었다.


가장 공감하며 읽은 작가의 글. 결국 뭐든 써야 한다는 것. 쓰기 만만한 글은 한 편도 없다니, 작가님들도 그렇구나. 그렇구나.

이랑

p113. 나는 내 글 최고의 독자를 나로 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 내가 내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114. 다만, 아는 것 빼고는 다 모르고 어리석은 존재인 나 자신을 얼마나 믿어도 되고 얼마나 응원해도 될지 끊임없이 의문이 생기는 것이 문제다.

p115. ‘그래, 까짓것. 이 세상에 쓸모 있는 것만 존재하는 것도 이상하’하고 좀 더 단순하고 용감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랑 작가가 말한 '내 작품에 대해 스스로 갖는 자세의 중요성'에 무릎을 탁 쳤다. 이상하지? 라고 물으면 이상한 글이 되고, 괜찮게 쓰지 않았어? 라고 물으면 괜찮다는 반응으로 돌아온 경험은 내게도 많았다. 첫 번째 독자는 그 글을 쓴 작가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매번 불안한 마음으로 글을 발행하느냐 글 쓰는 게 지쳤던 것도 있다. 마냥 응원해주기에는 이랑 작가가 가진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내게도 있었다. 전고은 작가의 글로 돌아가 ‘냉소적인 태도’가 창작뿐만 아니라 평가도 갉아먹게 했던 건 아닌지. 그래도 엉망진창으로 무성의하게 쓰는 사람은 아니니, 좀 더 단순하고 용감하게 생각해도 좋겠다. 소심한 내게 이 생각은 글뿐만 아니라 삶의 확장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네.


백세희

p183. 내 안에 좋은 글의 기준이 너무나 많아져 있었다. … 너 이야기 그만하고 타인으로 좀 확장해봐.

p190. 사장님은 창작이 전무와 전부라고 했고 내게 창작은 무리하기와 마무리하기다. 잘 쓰지 못할까 봐,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쓰기를 미루는 나를 채찍질하며 에너지를 무리하게 소진하고 거기서 오는 불안을 에너지 삼아 결국 마무리해 내는 것. 지금처럼 말이다. 사실 앞에 쓴 무수히 많은 ‘쓰고 싶지 않다’ 사이에는 ‘엄청 잘 쓰고 싶다’도 숨어있다.


두려움이나 강박을 땔감으로 삼아 앞으로 달려왔다던 드라마 <런 온>의 오미주(신세경 분)가 생각났다. 사실 백세희 작가의 생각은 내가 밥 먹듯이 하고 있는데,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진심이다. 인정받고 싶음과 욕먹기 싫음 사이의 줄다리기가 쓰고 싶다와 쓰고 싶지 않다로 이어진다. 하지만 수많은 쓰고 싶지 않다 사이에 엄청 잘 쓰고 싶다도 숨어있다는 건 결국 쓰고 싶지 않다와 쓰고 싶다는 같은 마음이며, 그건 쓰게 하는 일로 이끈다는 결론에 닿았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하게 글이 쓰기 싫단 마음을 털어놓지만 전혀 없어 보이지 않는 작가들의 표현에 감탄하며 부러워하며 또 쓰기 싫어졌지만, 이렇게 또 뭔가를 적고 있다. 뒤엉켜버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는 쓰기에 대한 마음을. 끝을 어떻게 내야 할지 모르겠는 글을. 그러는 사이에 쓰고 싶지 않다와 쓰고 싶다 마음의 발란스가 또 무너져, 쓰고 싶다로 무게가 실린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또 쓰겠지. 역시 써봐야 안다. 그러니 또 쓰겠고, 쓰겠지. 엉망일지라도 그 마음이 혼란하다 할지라도. 혼란할수록 (끝은 계속 쓰겠지, 가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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