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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Jun 06. 2023

성실한 시간에 대한 보상

tvN 월화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 2022

희선(황세온 분)은 메쏘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는 인포데스크 직원이다. 배우가 되고 싶어 메쏘드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메쏘드의 실세, 마 이사(이서진 분)에게 스카우트를 받는다. 하지만 희선이 제안받은 자리는 배우가 아닌 인포데스크 직원이었다. 기대했던 자리가 아니었고,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희선은 그곳을 데뷔의 기회로 생각하기로 한다. 매일 출근해서 전화를 받고 우편물을 나눠주면서도 희선은 시시때때로 연필을 입에 물고 발음 연습을 했고, 오디션을 보러 다녔으며 작은 역할도 성실히 임한 끝에 소극장 연극에 주인공으로 서게 된다.


희선의 걸음을 상상해 보면 폭이 좁은 치마를 입고 걷는 걸음걸이가 그려진다. 마음은 이미 결승점을 통과하고도 남았을 속도로 성큼성큼 달려가는데, 실제 걷는 걸음은 폭이 좁은 치마를 입고 걷는 듯 종종걸음이다. 이름도 없는 신인 아니 무명에 가까운 배우에게 기회는 더욱 쉽게 주어지지 않았고, 카메라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역할을 촬영하기 위해서도 하루종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가끔 꿈에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래서 배우라는 꿈을 포기하지도 못했다. 제자리걸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달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닌, 종종 거리며 걷는 초조한 걸음은 자주 마음을 지치게 하고 현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희선은 중돈(서현우 분) 매니저가 오디션 관계자에게 보내는 배우 프로필 리스트에 자신의 프로필을 몰래 넣어 함께 보낸다. 그리고 며칠 뒤 희선은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메쏘드 소속 배우가 아니었던 희선이 메쏘드 이름으로 오디션 제안을 받았으니, 중돈은 엄연히 사기라고 했다. 희선은 오디션에 붙으면 메쏘드와 계약하려 했다고 말했지만, 중돈은 그랬다 해도 당신과 계약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어떻게 연기하는지 모르는 사람과 계약할 수 없지 않냐면서 말이다.


“그러니까요. 제가 연기하는 거 보신 적도 없잖아요. 나 연극하니까 시간 나면 한 번만 보러 오라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희선의 방법은 잘못된 거였지만, 여러 배우를 케어해 온 중돈은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희선의 간절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면서도 한 번도 희선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게 미안해서 마지막 회차 무대를 보러 간다. 예의 상 온 자리였기에 진지하게 감상할 생각이 없던 중돈은 극 초반 졸기도 한다. 하지만 희선은 그런 관객을 눈앞에 두고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연기를 이어간다.


희선은 그런 시선이 익숙했다. 배우가 꿈이라고 하면 ‘허망한 꿈이다’, ‘네가? 특별하게 예쁘지도 않은데?’, ‘아무나 배우 하는 거 아니다’ 식의 좌절시키는 말을 들었다. 인포데스크에 있던 그녀가 배우를 꿈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뒤에서 비웃기도 했을 테다. 물론 그중에선 그녀의 꿈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 없이 시간만 길어지면서 ‘언제 배우가 되는데?’, “텔레비전에는 언제나와?’, ‘조금 더 화려하게 생겨야 하지 않아?’라는 걱정의 반응으로 응원은 사늘하게 식어갔다. 하지만 그런 반응보다 스스로가 갖는 의심 ‘나는 정말 할 수 있을까?’, ‘재능이 있긴 한 건가?’ 이런 생각이 그녀를 더 힘들게 했다.


“내가 가진 건 바로 그런 것들이에요.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는. 날더러 초라한 여자라고 말하는 게 정말 이상해. 내 안에 이런 보물들이 가득 차 있는데. 나는 내가 아주 풍요로운 여자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내게 말했었죠. 더 빛 나야 한다고. 웃으며 내게 말했죠. 긴 밤이 끝나는 새벽에 뜨는 별처럼 희미하게 보일지라도. 모두 다 알게 되겠죠. 시간이 흘러가면. 빛나지 않은 건 그대의 마음이란 걸”



무대 위 희선은 연극의 주인공, 블랑쉬(욕망이라 불리는 전차)가 되어 연기하고 있었지만, 이 대사는 블랑쉬의 고백이자 희선, 그녀의 고백처럼 들렸다. 숱한 좌절에 마음을 내어주는 대신, 새벽에 뜨는 별을 기다리고 있다는 고백. 희선은 선택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감독에게서, 작가에게서, 대중들에게. 그때까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과 노력하는 것뿐. 눈에 보이는 기회는 가뭄에 콩 나듯 자주 있지 않았지만, 결정적 순간이 아닌 매 순간을 성실히 살아온 희선의 연기에서는 빛이 났다. 그녀가 쌓은 성실은 그 안에서 단단함을 만들었고 관객들의 서늘한 시선에도 기죽지 않고 극 중 배우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강인함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노련한 매니저였던 희중은 희선이 착실히 쌓아온 시간이 만들어낼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마침내 희선은 메쏘드와 계약하게 된다.  드라마 스토리 상 일어났어야 할 자연스러운 전개였다 할지라도, 메쏘드 영입 제안을 받고 잠 못 들었을 그녀의 밤을 상상하며 함께 행복했다.


하지만 메쏘드와 계약 후에도 그녀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인포데스크에서 일하면서 단역을 맡고 어렵게 촬영한 분량마저 편집당하거나, 갑자기 작품에서 잘리는 일도 겪는다. 그러나 그녀의 꿈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좋은 결과를 보고 응원해 주는 건 쉽다. 하지만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게 없음에도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그녀가 성실히 살아온 시간이 만든 찬사다. 물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기울인 시간은 아니지만,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당당한 걸음걸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을 훔쳤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이들만이 갖게 되는 ‘강인함‘이 가진 모습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러한 시간이 쌓여있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벅차오른다. 쉬이 뺏기지도, 사라지지 않을 힘을 가진 사람이 마침내 맺을 열매는 남다를 것이기에 설레는 기대감이 생긴다. 배우로서 도약하는 기회를 만난 것도, 그 노력을 알아준 사람을 만났다는 것도 모두 희선이 기울인 성실에 대한 보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그거 일일이 설명하려 애쓸 필요 없어.

우리는 우리가 그냥 해 온대로, 살아온 대로 누가 뭐 라건 묵묵히 쭉 가. 묵묵히 산다고 그거 절대로 사라지는 거 아니거든. 진짜 의미 있는 거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3(SBS,2023)> 10회에 나온 김사부(한석규 분)의 대사다. 이번 시즌3에서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무너트리려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묵묵히 걸어온 걸음이 갖는 힘이 가진 낭만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이의 걸음에만, 특정 직업에만 이런 낭만이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tvN,2022)>의 주인공은 연예인이 아닌 이들을 뒤에서 서포트하는 매니저들에 관한 이야기다. 밤낮없이 수고하는 이들의 노력은 화려한 빛 뒤에 있어 자주 간과되지만, 연예인이 자신만의 빛을 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매니저의 수고가 얼마나 많은지 보여준다.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의 마지막 회에서 특별 출연한 김아중 배우는 영화제 때 입을 자신의 드레스를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던 스텝들을 떠올리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묵묵히 저를 지지해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땀과 수고가 모여 영화가 만들어집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눈에 띄지 않지만, 굳이 일일이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면 결국 드러난다. 모두에게, 세상 앞에. 진심은 언제나 통하며 나는 이것 또한 ‘성실한 시간에 대한 보상’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무엇과 비교할 때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인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쌓는 성실의 시간은 그대로 중요하다. 치열함에 지치고, 초조함에 불안해지더라도 그런 시간마저 묵묵히 보내는 성실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강인함의 낭만을 지닌 미래의 나를 만들 것이다. 성실한 시간이 가져다 줄 보상을 기대하며,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씩씩하게 걸어 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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