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보 Jul 22. 2023

서로를 보듬는 손길을 놓지 않길

금토 tvN 드라마 <이로운 사기(2023)>

상실은 어떤 모양이라도 반갑지 않다. 살면서 겪고 싶지 않은 일 중 하나지만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상하고 준비할 수도 없다. 올해 초 나는 굳게 믿어 온 믿음을 잃었다.  


그날 있었던 일은 그저 어느 날의 일처럼 흘러갈 수도 있었다. 가까운 이가 사랑하는 이로 인해 마음이 상했고, 안타깝지만 그런 일은 한 주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일상이었다. 가까울수록 우린 서로에게 쉽게 상처를 주니까. 하지만 그날은 “마음이 상했구나, 속상하겠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아니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통증과 함께 온몸에 한기가 돌면서 절망을 느꼈다. 이런 상황이 신물 났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다 망한 것 같아. “라고. ”나는 그동안 우리가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어. 계속 그렇게 생각해 왔어.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다고. 그런데 아니야. 뒤로 만보, 아니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아.”


내가 잃은 것은 더딘 걸음이지만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삶에 가진 신념 같은 거였다. 이 믿음은 눈에 보이게 나아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덕분에 삶에 성실한 노력을 쌓을 수 있었고 그 노력들이 또, 나를 앞을 향해 걸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는, 또 다른 모양의 믿음으로 쌓였다. 하나 불행히도 그날, 그 믿음이 무너졌다. 앞서 말한 상처받은 가까운 이는 가족 중 한 명이었고, 그가 받은 상처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나도 주고 또 받았었던 것이었기에 모를 리 없는 내 삶에 오래된 고질적인 아픔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럼에도’라고 말하며 미래를 희망으로 그렸을 나였다. 상처투성이의 그는 그런 나를 기대하고 찾아왔을 테다. 하지만 나는 그 믿음에 부응하지 못했고 엉망이 돼버린 채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나와 그가 가진 믿음이 각자의 모양대로 꺾이면서 한동안 우린 공허함에, 속상함에 시름시름 앓았다.


다정(이연 분)이 쏟아내는 눈물에서 그날 내가 느낀 절망이 보였다. 다정과 동료 로움(천우희 분), 나사(유희제 분), 링고(홍승범 분)는 적목재단의 장학생이었다. 하지만 적목재단의 실상은 불우한 가정 형편의 아이들 중 천재성 있는 아이들만 골라 적목을 비호하는 청부살인용병을 만드는 범죄조직이었다. 폭력 속에 자라면서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범죄에 동원되던 유년 시절을 보내온 다정이 이제와 새삼스레 느낄 더 이상의 상실이 있었을까.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애석하게도 상처는 같은 일로 여러 번 입을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면역이 생기지도 않는다. 같은 자리에 난 상처는 더 크고 아픈 흉을 남긴다. 다정은 10년 만에 다시 만난 서로가 반가웠고, 잘 지내길 바랐다. 아픈 과거에 묶여 아직 온전히 자유롭지 않지만, 그 과거를 풀기 위해 뭉쳤으니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무엇보다 서로 가진 상처를 잘 아는 사이가 아닌가.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너무도 잘 알아서 기가 막히게 그 부분을 찾아 공격했다. 다정은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적목보다, 이들이 입은 상처가 곪아 터지며 티를 내 순간이 훨씬 더 지옥처럼 느껴졌다.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빼앗기자 다정은 급속도로 무력해져 버렸다.


좌절감, 엄청 약해진 기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절망감. 이런 감정은 희망을 품고 있기에 겪는 절망이 아닐까. 그러니까 희망 같은 거, 나아지길 기대하는 마음이나 다짐 같은 걸 그만둔다면 이런 아픔을 갖지 않을 테니 나는 이번 기회에 아무런 마음도 품지 않고 살아가보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도 상처투성이라 또다시 소망했다. 나아지고 싶다고, 달라지고 싶다고.


다행히도 나와 가족은 서로를 보듬었다. 성실히 기울였던 지난 노력이 고맙게도 몸에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 달리 어디로 갈 수 있는 곳도 없다. 절망스럽다고 해서 서로를 버릴 수 없으니까. 일부로 작정하고 다치게 하려 한 게 아니라, 상처 입은 곳이 벌어져 아프다는 비명이었다는 것도 안다. 조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엿보일 때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서로를 보듬으려 애쓰는 것이 아닌, 같은 미래를 소망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런 소망과 이런 소망을 향한 좌절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믿어왔던 마음이 다시 두둥실 떠올랐다. 그날 절망 속에 울부짖던 다정에게도 로움과 수호, 나사 말고도 상처를 알고서 다가와 준 무영(김동욱 분)과 요한(윤박 분), 재인(박소진 분) 등 많은 ‘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상처 입지 않았던 순간보다 더 나은 결말을 만들었다. 서로를 위해서.


상처의 유무보다 중요한 건 서로를 보듬는 손길을 놓지 않는 것이다. 서로 맞잡은 손은 강한 물결에 맞서는 힘을 더 한다. 그러한 손길 속에 함께 앞을 향해 걸어가려는 가족을 보며, 나는 잃었던 믿음을 돼 찾아가는 중이다. 믿음은 언제고 흔들릴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조금 더 깊게 뿌리내리고 싶다. 소망함으로 서로를 보듬길. 아플수록 더더욱 단단하게, 서로를 위해서 마주 잡은 손길을 놓지 않으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릴러는 일종의 경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