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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Dec 29. 2022

끝까지 본다는 것, 꾸준히 본다는 것

2022년 드라마 결산

연말이 되면 한 해동안 시청한 드라마를 정리해 본다. 차곡차곡 쌓인 인스타그램 피드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올 한 해 있었던 개인적인 일들이 작품들과 함께 떠오른다. 이제는 드라마와 나의 시간을 따로 떨어져 놓고 생각하기 어려워진 듯하다.


어떤 드라마를 보았나 리스트를 꾸려가면서 올 한 해 시청 포인트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되었다.
하나, 영화를 8편이나 보았다는 점(!) 집순이라 영화관 문턱을 넘기 어려워하는데, 영화칼럼을 쓰는 동진 님의 초대로 두 번의 영화 시사회를 다녀온 뒤로부터 영화 개봉 소식에도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OTT 자체 제작 영화도 늘고, 개봉 후 관심이 사그라들기 전 OTT 이용권으로 볼 수 있는 영화가 늘어나면서 방구석 1열을 즐겼던 것 같다. 극장에서 보는 행위가 생략된 영화의 시청은 반쪽의 감상일 수도 있지만, 드덕 집순이의 시청 생활에선 의미 있는 변화였다.


긴 호흡의 드라마와 달리 2시간 남짓의 러닝 타임에 메시지를 녹여야 하는 영화는 함축적인 표현이 높았고, 생략을 통해 메시지를 전했기에 그 의미를 헤아리느냐 여운이 길게 남았다. 드라마만을 고집했던 건 아니었지만, 쏟아지는 드라마를 감당하기 버거워 영화까지 시선을 돌리기 어려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넓어진 '보는 삶'의 지평이 드라마 감상과 또 다른 감각들로 다가왔다. 내년엔 조금 더 넓은, 다양한 시선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엔딩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점. 드라마의 마지막 회는 평균, 일주일에 두 시간 그렇게 두 달여의 여정을 함께 하며 등장인물들과 나눈 유대 때문에 시청자들에게는 마지막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슬프고 아쉽다. 게다가 드라마를 보며 마음이 쏟은 인물이나 사건이 저마다 다르니 모두를 만족시키는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올 해는 마지막 회 공포증이 생길 정도로 황망한 결말들이 쏟아졌다.

헤어질 거였으면 그렇게 행복하지나 말던지, 이상적인 사랑을 보여주고선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진 <스물다섯스물하나(tvN)>는 해피엔딩 재질의 드라마였기에 꽤나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즌 2가 방송 중에 있지만, <환혼(tvN)>의 1부 또한 파국의 엔딩을 맞았다. 마지막 회 직전 두 주인공이 보여준 희생은 진정한 힘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하였는데, 그 희생이 의미 없게 파괴된 엔딩은 시즌 2에서도 별다른 진전을 보여주고 있지 못해 아쉬운 상황이다.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해보나 열과성을 다한 시청자들의 애정은 너무 나몰라라 하는것 같아, 외면당한 마음에 속이 좀 아펐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빅마우스>나 <재벌집 막내아들>의 엔딩은 충격보다 마음이 아펐다. 엔딩을 곱씹다 보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작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드라마 상에서라도 사람들이 희망하는 세상이 구현되길 원했다. 점점 더 차가워지고 딱딱하게 굳어가는 현실을 도전하는, 이야기가 가진 힘을 경험하길 원했기에 지독하게도 현실을 그대로 담은 엔딩은 착착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년엔 경기가 더 안 좋아질 거라는 전망이다. 위로를 얻으며 이 터널을 통과할 수 있도록, 부디 웃음을 주고 마음을 녹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는 중도하차한 드라마가 많았다. 드라마 시청도 의리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작가와 배우들에 대한 예의로 보기로 시작한 드라마는 이야기가 산을 타고, 늘어져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것 같아도 끝까지 봤었다. 하지만 올 해는 작년에 비해 열 편이나 더 보아 40편의 드라마를 시청했지만(와우-), 끝까지 본 작품 수로만 따지면 작년과 비슷하다.

드라마만 끝까지 보지 못 한건 아니었다. 읽다 멈춘 책이 태반이었고, 새로 흥미를 붙인 등산을 할 때도 언제든 힘들면 내려오자고 생각했다. 지구력만은 자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기에 끝까지 가지 못 하는 자신을 '게으르다', '의지가 약하다' 책망하며 억지도 부리면서 애를 써보기도 했다.


올해 산을 꾸준히 올랐는데, 등산을 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 끝까지 다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와도 산은 어디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언제든 다시 오를 수 있으니 "지금, 당장"이라는 시간적 압박을 갖지 말고 초조함과 불안감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런 덕분인지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좌절보단 아쉬움으로 남았고 '다음'이라는 기회를 만들게 했다. 시도해 보고, 다시 해보며 마침내 정상에 도달한 경험은 끝까지 가기 위해 꾸준히 가는 걸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행히 꾸준히 하는 건 아직 자신 있다(물론 자만할 일은 아니지만). 드라마도 어디 가는 건 아니고.


생각해보면 산을 오를 때 나의 목표는 정상이 아니었다. 겨울에 한라산 설산을 오를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것이었기에 한 번에 정상에 오르지 못해도 괜찮았다. 한라산을 오를 때에도 힘들면 언제든 내려오자고 다짐했던 건, 무리해서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여러 번의 산행 중 '활기찬 기운, 즐거운 텐션' 그것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렇다면 내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는 드라마를 보는 게 익숙하다 못해 일로 느껴진다. 드라마를 보며 즐겁고 재미있던 감정을 누린 지 조금 되었다. 피드에 지친 내가 보였다. 드라마를 보다 중도하차한 작품이 많은 걸 자존심 상해할게 아니라 무리하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생긴 피로감을 모두에게 들켰(!) 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
사랑하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 속 대사로 나는 멈춰 서기로 했다. 사실 많은 작품을 보려 했던 건 그만큼 많이, 공감을 바탕으로 소통하고 싶어서였다. 좋은 마음과 의도였지만 욕심으로 변했음을. 드라마를 중도하차하게 된 배경을 짚어가다 어느새 나의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꾸준히 하는 것. 그래서 끝가지도 가보는 것. 내년 끝엔 어떤 이야기들이 남을까.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모쪼록 집중해보려 한다. 대중성과 개인의 취향 사이 적절한 균형을 잡으면서. 보는 일을 따로 떼어놓기에 너무 친밀해져 버린 나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올 한 해, 여러분에게 남은 드라마는 무엇인가요?




<2022년 시청 드라마, 영화 목록>

: 별표는 추천하는 작품, 세모는 중도하차한 작품, ing는 회차가 진행되고 있는 드라마의 표시입니다.


드라마 

★소방서옆경찰서(ing)/금혼령(ing)/환혼1, 2(ing)/재벌집막내아들/팬레터를보내주세요/연예인매니저로살아남기(▲)/PICU 소아집중치료실(ing)/★약한영웅/커튼콜(▲)/변론을시작하겠습니다/천원짜리변호사/★작은아씨들/법대로사랑하라(▲)/뇌멋대로한다/★위기의X/빅마우스/꿈꾸는 사랑에는 이유가 있어/★언내츄럴/당신이 소원을 말하면/조선정신과의사 유세풍 시즌1/★이상한변호사 우영우/징크스의연인(▲)/왜오수재인가(▲)/별똥별/★우리들의블루스/★★★나의 해방일지/★★스물다섯스물하나/내일/사운드트렉/어게인마이라이프(▲)/서른,아홉/사내맛집/트랜스 플랜트 시즌1/★소년심판/악의마음을읽는자들/기상청사람들(▲)/트레이서 시즌 1,2/★그해,우리는(2021~)/딱밤한대가이별에미치는영향 (40편)


영화

레이니데이인뉴욕/헤어질결심/20세기소녀/마녀2/범죄도시1/외계+인 1부

이상한나라의수학자/나일강의죽음 (8편)


올 한 해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왔네요.내년에도 동행해주셔서 부족한 시선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시길. 함께 쌓을 시간을 기대합니다.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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