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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Jan 24. 2023

사랑의 이해는 결국 사람을 향한 이해

드라마 <사랑의 이해(jtbc, 2023)>

“사랑은 상수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변수가 아닌

어떤 조건에도 일정한 값을 유지해야 하는 상수“

드라마 <사랑의 이해> 상수 인물 소개 중


“왜? 내가 너무 속물이었었어? 사랑이 뭐, 그게 뭔데 그게 그렇게 대단해? 사람들 진짜 이상해. 물건 하나를 사도 재고 따지고 후기까지 샅샅이 따져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무진장 결벽을 떨어요. 속으로는 온갖 계산 다하면서 아닌 척, 다른 게 섞이면 천하의 나쁜 놈 속물 취급.. “

드라마 <사랑의 이해> 6화 경필 대사


상수(유연석 분)와 수영(문가영 분)은 창립 62주년을 맞이한 KCU 은행 영포점에서 근무한다. 매일 300여 명 이상의 고객이 방문하는 지점에서 이들은 “고객님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이들은 모든 고객을 똑같은 크기로 사랑하지 않는다. 고객의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 얼마를 쓰는지. 돈을 빌리러 온 고객인지, 투자를 하러 온 고객인지에 따라 사랑의 크기가 달라진다. 물론 이들이 원해서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은행에서 일하는 은행원이니까, 직장이고 직장인으로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이런 사랑의 모양으로 가득 차 있다.  


드라마 <사랑의 이해(JTBC, 2023)> 는 은행을 배경으로 하는 사내연애 이야기다. 하지만 이들의 연애는 달콤한 사탕보단 쓴 맛이 더 긴, 다크 초콜릿을 닮았다. “은행을 찾는 사람에게도 은행에서 일하는 우리들에게도 계급이 있다 “는 상수의 내레이션은 ”그리고 나와 그녀 사이에도 “라고 끝을 내면서, 이들의 사랑에도 계급이 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드라마의 원작이 되는 소설 [사랑의 이해(믿음사, 2019)]를 쓴 이혁진 작가는 몰락한 조선업을 배경으로 회사라는 조직의 모순과 부조리를 핀집하게 묘사한 [누운 배(한겨레출판사, 2016)]라는 장편소설로 2016년 21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데뷔를 했다. 그래서 의아했을 이번 책이었다는데 드라마 1화를 보는 순간 득과 실에 민감한 은행을 배경으로 한 이유를 알았다.


드라마는 노골적이지 않게 오프닝에서 상수가 말한 계급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네 남녀주인공이 아침을 시작하며 마시는 커피 한잔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종현은 은행에서 일하지만 용역 업체 소속의 청경이다. 그의 아침은 뜨거운 믹스 커피로 시작한다. 옥탑 문을 열고 나가면 작렬하는 태양이 쏟아지는, 한 여름 속이다. 실력이 좋지만 정규직은 될 수 없는, 고졸의 텔러 수영은 그녀의 취향이 묻어있는 오래된 빌라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고, 강남 8 학군 출신의 명문대를 나온 정규직 상수는 냉동고에서 꺼낸 얼음판을 좌우로 비틀며 캡슐 머신에서 나오는 커피를 기다린다. 부유한 미정의 집엔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다. 따듯하게 추출된 에스프레소는 곧 정수기에서 담은 얼음으로 하얀 김이 서린 컵으로 들어가 무더위를 가시게 할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될 것이다. 알듯 말 듯 모르게, 너무도 익숙하고 때론 평범한 일상이라 그저 누군가의 아침이라 느껴지게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이들의 상황이 흘러간다.

연출은 이렇게나 섬세하다. 내레이션을 통해 간접적으로 주인공들이 지나온 시간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흐르는 일상 풍경 속에 메시지를 담는데도 능숙하다. 극 초반 직접적으로 던져야 하는 대사는 주인공보다 주변 인물의 상황으로, 그들의 입을 빌러 말함으로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지키면서 동시에 주인공들이 하게 될 사랑을 넌지시 보여준다.


가령 상수의 동기인 석현(오동민 분)의 연애는 사랑의 ‘이해(利害)‘ 측면을 보여준다. 석현이 4년을 만난 좋아 죽는다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건 심하게 기울어지는 여자친구의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안돼서 소개로 만난 비슷한 수준의 여자와 석현은 곧 결혼을 한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조건만 보고 결혼했는데 그때는 출산율도 좋았고, 이혼율도 적었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을 했다.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비겁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향한 변명처럼 들렸다. 상수의 눈에 석현이 불안했다.


상수는 그의 이름처럼 사랑을 여겼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 사랑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지녀야 하는 것. 그런 상수의 고지식함을 모르지 않은 또 다른 동기인 경필(문태유 분)은 어째서 사랑에 다른 것이 섞이면 천하의 나쁜 놈, 속물 취급을 받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유독 유난하게 요구되는 순수성은 경필 눈에 결벽증이나 다름없었다. 석현의 상황과 경필의 대사는 서로를 좋아하지만 어긋, 어긋 비켜 걷는 상수와 수영이 왜 그러한 걸음을 걷게 되는지 이유를 짐작하게 돕는다. 그러니까 드라마는 사랑이 사랑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걸 매회차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지나치는 풍경까지 동원해서 말하고 있다.



실제로 상수와 수영은 사랑 속에 헤맨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걸 알고 조금씩 가까워졌지만 일식집에서 만나기로 한 날, 상수가 늦으면서 두 사람의 사이에 급격한 거리가 생긴다. 마감 시제가 맞지 않아 상수는 한 시간 반가량 약속에 늦었고 서둘러 달려갔지만 수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같은 은행원으로 사정을 말하면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수영은 상수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약속 장소로 뛰어오던 상수를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던 수영이 무언가 보고 표정이 굳어졌던 장면이 있었다. 드라마는 수영이 왜 화가 났는지 바로 보여주지 않고 심지어 상수가 오해할 상황까지 만들어 보인다. 답답한 마음, 상수가 느꼈을 감정을 같이 느끼며 수영이 왜 화가 났는지 말해주기만을 기다렸다. 그 일이 있은 후 한참 뒤 수영은 상수에게 물었다. 사람 마음 갖고 놀면 재미있냐고.


수영은 그날 상수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설렜다. 하지만 그가 음식점을 지척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머뭇거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러더니 힘겹게 달려온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순간 수영은 생각했을 테다. 그가 머뭇거린 이유에 대해서. 그 생각 끝엔 고졸인, 텔러인, 사정이 좋지 못한 집안을 가진 안수영이 남았다. 이 길을 건너 음식점으로 들어오면, 애매한 관계가 싫다던 자신과 진지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그럼 그는 그가 바라던 ‘평범’과 멀어지게 될 것이다. 득 보다 실이 더 큰 선택이란 생각에 그는 자신에게로 오지 않은 것이라. 그렇게 정리했다.


상수는 왜 머뭇거렸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수영에게 갔다. 왜 진작 묻지 않았냐고, 왜 그랬는지 따지고 물었다면 풀 수 있는 문제였다고 말했지만 수영은 자신을 선택한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에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넘어가지 못하는 선은 실력이 있음에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업무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그녀가 살아온 삶이 말해주었다.


하지만 수영이 느낀 선을 상수라고 모를까. 강남 8 학군의 명문대 출신으로 금수저란 소문이 있지만 모두 빛 좋은 개살구다. 본투비 강남이 아닌 그는 교묘하게 그려진 선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살았다. 홀어머니 밑에서 상수는 원하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이 많았다. 그렇기에 후회가 덜 할 선택을 내려야 했던 그는 매사 신중했고, 책임의 무게를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래서 머뭇거렸던 것이다. ”안수영은 쉽게 만나고 헤어질 상대가 아니니까. 끝까지 상상했으니까. “ 그리고 수영도 이내 깨닫는다. 자신이 상수에게 괜한 오기를 부리고, 흔들렸으면서 끝까지 솔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 남자의 머뭇거림을 나조차 이해해 버렸으니까 “.


멜로드라마에 이런 현실감을 기대하는 시청자는 드물 것이다. 대게 드라마에 원하는 엔딩은 좋아하는 두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서 연인이 된다거나 결혼을 하는 등 확실한 인연으로 이어지는 꽉 막힌 헤피엔딩 일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 <사랑의 이해>를 보며 고구마 먹은 듯 답답하다는 시청자 반응이 2% 시청률로 나타나는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2% 시청률은 재미가 없어서라기보단, 사랑만큼은 이런저런 것에 휘둘리지 않고,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하는 바람에 그렇지 못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외면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그랬다. 막상 보면 잘 보는데 잠시 시청을 멈추면 다음 화를 보기까지 마음이 쉬이 내키지 않았다. 나는 저들의 머뭇거림이 답답하기보단 안타까웠다. 상수를, 수영을 그리고 종현과 미정의 마음을 알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뿐 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시작은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 하나였을지 몰라도 이후 여러 갈래로 흩어지고 나뉜 사랑의 파편에 상처받은 적이 한 번쯤 있다면 네 사람의 어긋 걷는 걸음을 이해하고 말 것이다.  


나는 이 드라마가 앞에서 말한, 모두가 기대하는 그런 류의 엔딩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서 말하는 사랑은 정해진 결과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닌 이해를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6화를 지나며 상수와 수영은 각자의 사랑을 찾은 듯, 안정된 궤도에서 행복을 느끼는 듯했으나 8화를 넘어선 지금은 카오스, 혼돈 속이다. 사랑이 만든 태풍 속에 네 사람은 이리저리 떠돈다. 상처받고 상처 내고, 그렇게 찢기고 발가 벗겨지면서 사랑에 각기 다른 이해(利害)가 붙은 건 현실의 벽이 아닌 자기 자신이 만든 것임을 발견해 간다.


사랑은 사람을 날 것으로 만든다. 나도 모르는 나를 보이고 만다. 그렇게 만드는 사랑이 무서워서 자꾸만 무언가로 덮고 칠하여 나를 감춘다. 괜찮은 사람인 척한다. 그 척함이, 우리가 부딪힌 사랑의 벽일지도. 그렇기에 조건을 맞추고 형편에 맞춰 사랑하게 된다 해도 멈춰 서게 하는 이 벽을 피할 수 없다. 날것의 나를, 뒤틀린 당신을 지금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서도 계속 사랑을 원하고,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이 조금 더 진실되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 [사랑의 이해] 속 문장

처음 드라마 제목을 보았을 때 이해(理解)는 나와 너, 두 사람의 사이의 것이라 생각했지만, 중반에 이해는 득과 실의 이해(利害)였고, 소설로 본 마지막에 다시 생각해 본 이해는 나란 사람에 대한 이해(理解)였다. 상수와 수영은 마침내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을까. 이해(理解)에 닿았을까. 소설은 드라마와 다른 분위기를 낸다(개인적으로는 드라마가 조금 더 취향에 맞다). 원작대로 끝날지 모르지겠만 소설로 이야기의 끝을 보았고, 드라마로는 7화를 지나는 지금 나는 이들이 그렇게 원해하던 사랑에 닿았던 것 같다. 수영이 있는 약속장소 앞에서 걸음을 머뭇거렸으나 마침내 약속 장소로 갔을 때, 종현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말이다.


지금 시대의 안타까운 사랑의 상황을 감성적으로 담아내면서, 이 드라마가 말하고 싶었던 건 사랑을 이해하는 과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사랑이 오직 한 가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는 이모티콘이 아니니, 책임과 헌신, 희생과 배려, 인내 그리고 행복과 웃음, 기쁨과 슬픔, 눈물처럼 살아가며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의 집약체인 사랑에 대해, 당신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이해를 멈추지 말라고. 사랑의 이해는 결국 사람을 향한 이해니까.


몹시도 씁쓸한 엔딩을 어렴풋이 그리면서도, 설사 진짜 그런 엔딩일지라도 드라마는 사랑이 하고 싶게 만들었다. 나답지 않은 모습과 무너져버릴 나를 보는 게 두려워 사랑을 겁내고 있지만, 그래도 나를 향한 이해가 사랑 안에서 있으면 싶다. 내가 하는 사랑이 매 순간 무첨가 오렌지 주스 같은 사랑은 아닐지라도, 그런 사랑을 향해 걷는 걸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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