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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Feb 04. 2023

카타르시스를 넘어서 워너비, 꿈꾸게 하는 오피스 드라마

<대행사 (JTBC, 2023)>

오피스 물이라고 하면 아직까지 한국 드라마에서는 회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오피스’라는 장르적 장치가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 주인공의 직급을 설명하는 정도로 쓰이다 보니 현실에서는 마주치기 그토록 힘든 본부장이랑 사원이 사랑에 빠지는 일이 흔하고, 많은 직장인들이 손쉽게 상무, 이사가 될 수 있다는 듯 주인공의 직업은 대부분 임원이 관리자인 경우가 많다. 현실은 팀장 하나 다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드라마 <대행사(JTBC, 20023)>는 이보영 배우의 2년 만의 브라운관 복귀작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4%라는 낮지 않은 시청률로 시작했다. 아무리 브라운관에서 보고 싶던 배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해도 재미가 없다면 2회만이라도 뚝 떨어지는 게 요즘 시청률이다. 그에 반해 드라마 <대행사>는 스토리의 힘으로 지금까지 꾸준히 시청률이 상승해, 회차 절반에 닿은 8회에는 12%를 찍었으며 앞으로 더 올라갈 전망이다. 이 드라마의 매력을 꼽으라면 당연히 이보영 배우가 연기하는 고아인 상무겠지만, 캐릭터가 사랑받을 수 있는 건 고아인 상무가 치열하게 싸우는 현장은 현실에 가깝고, 그곳에서 고아인은 연애가 아닌 오로지 일만 하기 때문이다.



고아인은 19년간 광고 대행사 ‘VC기획’에서 일하고 있다. 카피라이더로 입사했을 당시 고아인은 사수 유정석(장현성 분)에게 “사람은 좋아하는 일이 아닌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며 딴 일을 찾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재능이 없다고. 화장실에서 왕창 울고 나온 고아인은 세면장에서 마주친 최정민(김수진 분) 선배 카피라이터에게 어떻게 해야 카피를 잘 쓸 수 있는지 묻는다(따지는 것에 더 가깝긴 했지만). 방법은 간단했다. 보는 사람이 읽다 질려서 카피 못 쓴다는 말 못 할 때까지 쓰는 것. 도망치지 않고 들이대보는 건 고아인의 특기였다. 그날 밤 아인은 밤을 새워서 새로운 카피를 쓴다. 그리고 다음날 사표가 아닌 수백 장에 이르는 새로운 카피문구를 사수에게 준다. 그렇게 (좋은 의미로) 미친년으로 등극한 아인은 이후 PT성공률, 연봉상승률, 성과급, TVCF평가점수, 판매상승률 등 모든 수치에서 업계 1등 자리를 놓치지 않는 독종으로, VC기획의 제작 2팀 팀장(CD, Creative director)이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실력으로는 임원이 되고도 남았을 고아인이지만 지방대 출신에 그것도 여자가 임원이 된 일은 회사 설립 이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상은 그런 적 없다지만, 그녀의 한계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고아인도 모르지 않았기에 광고주로 만난 정재훈(이기우 분) 대표가 게임회사 마케팅 임원을 제안했을 때 살짝, 솔깃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광고가 좋다, 치열해서. 그렇기에 재훈의 제안은 거절했지만, 이곳에서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닿았기에 계속 이뤄가는 성공이 오히려 그녀를 더 공허하게 만들었다. 집 냉장고에는 생수뿐. 그녀를 채우는 건 온갖 종류의 신경 안정제가 된 지 꽤 오래다.


그런데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고아인이 제작본부장이 된다. 재무 상무를 제외하고 모든 임원이 한국대 출신의 남성이었다. 고아인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은, 기대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입사 후 처음으로 고아인은 직원들과 회식을 했고, 기분 좋게 취해 집에 들어와 신경 안정제도 모두 버렸다. 그렇게 의사가 권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세상에 오래 살고 싶어졌다. 임원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진행 한 내부 PT에서 이긴 광고기획도 최창수(조성하 분) 기획본부장의 말대로 실력 없는 권우철(김대곤 분) CD에게 넘긴다. 임원이니까 임원답게 일해야 한다는 최 상무의 말대로 그녀는 바라던 임원이 되었으니 이제는 조금 여유 있게 승리를  누리려 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빼앗긴다. 그녀가 임원이 된 이유가 다름 아닌, 곧 있으면 한국에 들어오는 회장 딸의 낙하산 채용을 위한 작업이었으며 이를 위해 필요한 기업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1년짜리 얼굴용 임원이었다. 회사는 1년 임원 생활이 끝나면 대학교수나 작은 대행사 대표 자리 중 원하는 곳으로 거쳐를 마련해 주겠다고, 아량을 베풀듯 말했다. 분명한 한계를 뛰어넘어 1년이라도 임원이 될 수 있었으니 감사하게 생각하며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충분히 성공한 거라고 말하는 정석에게 아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 정도라? 지방대에 흙수저 출신이라서요?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하려고 내가 다 포기하고 산 줄 알아요? 내 한계를 왜 자기들이 결정하는데, 최 상무가 뭔데 내 미래를 결정하냐고요!”



고아인은 임원으로 승진된 것이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기회라고 생각한, 자신의 순진함에 헛웃음이 났다. 성공한다고 기뻐하면 나쁜 일에 슬퍼하게 되는 게 습관이 된다고 생각해 왔으면서 바보같이 성공의 기쁨을 드러내고 만끽했다. 고아인은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제멋대로 짓고, 미래까지 결정해 버린 세상에 상처받았다. 화가 났다. 사람들은 고아인을 ‘냉혈한, 완벽주의자, 워커홀릭’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것에 비해 고아인이 흥분하고, 좌절하고, 눈물 흘리며 상처받는 장면은 생각보다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불쌍하다거나 약해 보인다거나 하지 않는다. 동정심 같은 것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가슴속이 뜨거워진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화장실에서 고아인에게 신입카피는 무조건 많이 써야 한다고, 도망치지 말고 들이대라고 조언해 주었던 선배  최정민은 그 조언 앞에 이런 말을 했었다. “여자가 대행사에서 CD(creative director) 달려며 화장실에서 눈물 다섯 박스는 흘려야 해 “. 만약 고아인이 한 번도 울지 않고 독하게 이겨먹기만 했다면 드라마 <대행사>는 이처럼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이 드라마는 오피스물이 아닌 판타지 물이 되었어야 한다. 고아인의 눈물이 낯선 시청자는 없다. 그 눈물 속에 있는 오만가지 감정을 느껴본 적 있다. 말 못되게 하는 사수에 대한 미움, 해준 것도 없으면서 성과를 가져오라는 회사에 대한 불만. 사실 그런 원망보다, 부족한 실력에 대한 답답함과 속상함 그러니까 해내보겠다는 분함. 가슴속에 느껴진 뜨거움은 우리 안에 있는 열정일지 모른다.


“세상엔 패배했을 때 더 악랄해지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종자들이 역사를 만들어 냈고. 한번 만들어 보려고요. 그 역사라는 거.”


고아인은 다시 한번 뜨겁게 타오른다. 최 상무의 계략이 오히려 고아인을 자극하고, 그렇지 않아도 능력캐를 또 한 번 각성시킨다. 부스터까지 단 고아인은 거침없이 움직인다. 그녀가 원래 갖고 있던 탄탄한 실력에 이제는 기득권 층이 알려주고 쥐어진 것들까지 있다. 첫 반격으로 최 상무가 말한 대로 임원답게 제작본부장의 권한으로 인사권을 사용해 최 상무 라인 CD들을 팀원으로 강등시킨다. 이후엔 부장급 특별 인사 평가를 통해 절반의 사람을 강등시키고 빈자리에 최 상무 라인이 아닌 사람들을 채움으로 자신의 편을 만들려고 한다.


힘 겨루기, 또 다른 권력 남용. 평사원인 나는 고래싸움에 터지는 새우등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아인의 결정은 이기적이지만은 않다. 고아인의 인사 평가는 제작본부 내 고질적인 갑질, 접대 문화, 사내 정치질을 한 번에 뿌리 뽑았고, 그 반지리에 실력은 있으나 예쁘게 입고 다니지 않아서, 연줄이 없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직원들로 채웠다. 이를 위해 고아인은 자신의 자리까지 내 건다. 옳은 말과 옳은 결정을 하는 고아인을 막을 이유도 없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이 빼앗길까 고아인을 방해하면서 자기 자리 하나 걸지 않는 다른 임원들의 행동이 오히려 고아인을 빛나게 했다.


고아인이 선보이는 거침없는 행보는 광고대행사에 신으로 불리는 광고주들에게 금요일 업무 지시 후 월요일까지 제출 요구 거부, 광고주 개인적인 업무 지시 거부라는 폭탄 메일을 보낸 지점에서 대행사에 다녀 본 적도 없는 나까지도 ‘고아인 용비어천가’를 부르게 했다. 물론 이 또한 그녀에게 불리한 바람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업계의 잘못된 관행이 바뀌는 계기가 된다. 밑에서 차근히 올라왔기에 알 수 있던 불합리함 들이었고, 지금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리더의 모습이기도 하다.


드라마 <대행사>에는 매회 이러한 을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카타르시스가 활화산처럼 터진다. 고아인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오는 이들도 노련한 실력자들이고, 그녀 앞에 놓인 미션의 난이도도 꽤나 높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모을 때면 나도 고아인의 팀원이 된 것 마냥 몰입해 답을 찾게 된다. 더욱이 뭐만 하면 주주총회를 열고,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증인이 등장한다거나, 녹취 파일이 나타난다거나 우연히 비밀 장부를 발견하게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보지 않아서 좋다.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들어 이기는 것이 아닌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겨뤄 쟁취해 나가는 고아인의 모습은 ‘을의 반란’이라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워너비, 그 자체다. 


고아인이 첫 여성 임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직원들은 자신도 열심히 하면 임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는 말이 지나가듯 나온다. 1년짜리 임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럼 회사가 그렇지, 내심 좋다 말았다’ 말하지만, 회사에  밀리지 않는 고아인을 보며 조은정(전혜진 분), 배원희(정운선 분) 카피라이터도 욕심낸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보자, 마음을 새롭게 한다.


그렇다, 이 드라마는 사원으로 시작해서 업계 최고, 여성 임원이 되는 한 인물의 성공가도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기기 위해 모든지 다 하는, 배신과 음모, 계략이 가득한 사내 정치 드라마도 아니다. 분명 고아인은 성공에 집착하는 인물이지만 그건 과거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눈칫밥 먹으며 자란 시절의 상처 때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자신에게 선을 긋고 한계를 정하는 지긋지긋한 세상을 계속 깨부수고 올라가는 고아인의 성공에 한계는 없다. 설사 한계란게 있다 해도 그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자신이 결정할, 자신의 영역이라고 외친다. 그렇게 ‘그녀만의 커리어’를 쌓아올리는 이야기다.


그래서인가, 이 드라마를 보면 자극받는다는 반응들이 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고아인처럼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미친년처럼 행동해보고 싶어졌다. 고아인과 나는 분명 거리가 멀지만, 너무 잘난 고아인을 보며 상대적 박탈을 느끼는 것이 아닌 신기하게도 해내보자는 마음이 든다. 은정처럼, 원희처럼. 때론 좌절하고 넘어지고 상처받는다 해도, 눈물을 다섯 트럭 쏟아낼지언정, 누구의 정함도, 스스로도 한계를 짓지 말라고 외치는 드라마 <대행사>는 우리의 심장이 뜨겁게 만든다.


1년 뒤 고아인이 VC기획의 상무로 계속 남아 있을지 아닐지는 그래서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곳에 있다 해도 끝을 고아인, 스스로 정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녀에게 끝은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나의 끝도 나답기를. 스스로 그어놓은 한계를 깨고 올해는 조금 미친년이 되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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