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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pr 01. 2023

복수 끝, 원점에 있어야 할 이야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2023)>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 배우가 만난다는 소식만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는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드라마 <더 글로리>는 ‘유년 시절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동은(송혜교 분)이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극’이다. 드라마를 시청하기 전, 주인공이 당한 학교 폭력 장면의 수위가 이제까지 드라마에 나왔던 장면들에 비해 훨씬 높다고 들었다. 실제로 연진(임지연 분)과 친구들이 동은에게 한 짓은 정말로 잔인했다. 난폭했고 잔혹했다. 한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트리고 무너지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지고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을지. 어느 쪽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지독했다.


동은이 당한 학교 폭력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고데기 장면은 2006년 청주에서 실제로 벌어진 학교 폭력과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드라마 <더 글로리>가 화제를 얻으며 해당 사건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이 사건은 드라마와 달리 재판까지 갔지만 법원에선 가해 학생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 관찰하게 하는 낮은 수준의 보호 처분을 내려졌다. 처벌의 수위를 높이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피해자가 입은 피해가 무엇 하나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솜방망이 처벌이 가해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게 하는 역할을 제대로 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대중의 관심을 드라마 <더 글로리>의 결말로 향하게 했다. 동은이 생을 걸어 준비한 복수가 가해자들에게 어떤 지옥을 선사할지, 현실에서 보고 싶었던 결말을 드라마에 기대하게 만들었다.


동은의 복수는 성공한다.

드라마를 보며 동은의 복수가 실패할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다. 주인공의 복수는 언제나 성공한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적 공식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이야기에 다른 엔딩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렇기에 ‘어떻게’ 성공하는지는 복수극에 있어 중요한 부분으로 섬세하고, 균형감 있게 다뤄져야 한다.


동은은 복수는 하지만,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한국 드라마 정서상 주인공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해선 안된다. 그 선은 넘을 수 없다. 작가님이 이러한 사정을 염두하고 복수를 설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은의 복수는 가해자들의 삶에 아주 작은 균열을 낼 뿐이었다. 무려 18년을 공들인 균열이다. 작은 틈을 무시한 결과 저들은 이 균열이 가져올 파괴력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연진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동은을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와 함께 비웃는다.


동은은 연진이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를 명오(김건우 분)에게 넘기겠다고 했다. 명오는 동은이 자신에게 왜 접근했는지 깊게 생각하지 못한다. 그건 과거, 자신이 동은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후 명오는 동은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나, 동은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탐욕스러웠던 명오의 욕심은 동은이 만든 아주 작은 균열을 증폭시키며, 이들은 서서히 혼돈에 빠진다.


그들의 악행에 따른 결과였으나,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던 연진과 재준, 사라, 혜정은 책임을 서로에게 떠밀며 탓하기만 했다. 한 번도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신뢰라는 걸 해 본 적 없던 이들에게 ‘희생’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야 한다는 악의 연대는 마치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만다. 많이도 아니고 딱 하나만, 있는 힘 껏도 아닌 스치듯 건드리기만 했을 뿐인데 알아서 쓰러진다. 물론 연진과 친구들의 관계를 ‘함께 책임을 진다’는 의미를 지닌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모님의 복수도 악의 자멸이었다. 이모님의 남편 안에 있던 탐욕이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여 덥석 '미끼'를 물게 했다. 물론 ‘미끼’를 던진 건 동은과 이모님이다. 그리고 연진과 다른 네 사람이 서로의 잘못을 공격하며 무너지게 만든 것 또한 동은이 만든 판이었지만, 저들의 무지와 외면, 탐욕은 꼭 동은이 아니었어도,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진과 친구들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스스로 무너지게 한 동은의 복수가 훨씬 더 강렬한 통쾌함을 느끼게 한 것 같다.


하지만 사적 복수에서 가해자의 결말에 집중하느냐 놓쳐선 안 되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악의 응징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동안 사적복수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복수의 대상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복수와 용서 사이에 갈등하는 대목이 한 번쯤은 등장한다. 그리고 상당수는 용서를 택한다. 나는 이러한 용기 있는 선택을 응원한다. 다만 진정한 반성이 용서의 결정을 돕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드라마 <더 글로리> 속 가해자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을 수 있다는 가정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끝까지 오만했다.


그런 저들의 생태를 너무 잘 알고 있던 동은은 복수와 용서 사이에 갈등하지 않는다. 동은은 단호히 복수를 택한다. 다만 자신이 한 선택에 따르는 책임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래서 동은은 복수를 준비하면서 웃지도,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살지도 않는다. 아무리 복수의 대상이 세상이 인정하는 나쁜 사람이라 해도 동은은 자신이 계획한 복수가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복수를 합리화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행동이나 생각,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가해자들과 달리 동은은 자신의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드라마는 복수를 낭만적이거나 감성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자신의 생을 갉아먹는 일임을 명확하게 전한다. 쉽게, 함부로 복수의 마음을 품지 않도록, 어떤 일인지 정확히 전해주는 노력이 좋았다. 그렇기에 나는 동은이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는 다름 아닌 ‘동은의 행복’이었다. 


도영(정성일 분)은 동은에게 이 복수가 끝나면 행복해지는 건지 물었고, 동은은 행복해 죽을 만큼 딱 그만큼만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대답한다. 비장했던 동은의 표정을 생각해 볼 때, 이 대답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요’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하지만 동은의 삶에 뜻하지 않았던 행복이 순간, 순간 피어올랐다. 이모님이 명랑해질 때마다 동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고, 연진이로부터 위협을 받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모님과 자신이 서로를 신뢰하고 있구나, 확인하게 된 순간 크게 웃었다. 자신은 복수를 하면서 행복해기를 포기했으면서 이모님의 행복은 지켜주기도 한다. 복수에 성공하는다는 의미가 딸 선아(최수인 분)와 따뜻한 저녁을 먹는 일상을 회복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으면서도, 두 사람의 도망을 희망이 되게 해 준 건 동은이었다.


복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연진의 딸, 예솔이(오지율 분)를 이용하게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었고, 그럴 계획도 있었지만 동은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피해자라고 해서 모든 걸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복수의 순간에도 자신의 복수에 어쩔 수 없이 휘둘려야 하는 도영이 받을 상처를 생각했다. 여정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가 그의 상처를 알게 된 순간 미련 없이 그를 떠난 것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동은은 복수를 위해 자신의 생을 모두 바치고 있기에, 누군가를 돕고 살리고 배려하는 그런 여유 같은 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시간, 죽으려고 한강 물에 뛰어들었던 그 순간에도 동은은 부동산 할머니를 살렸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남들이 보기에는 먼지만 한 가시 같아도 그게 내 상처일 때는 우주보다 더 아픈 거래요.”


연진과 친구들은 조금의 무시만 있어도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반면 누구보다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동은은 자신의 아픔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 다른 이의 삶에 흐르는 고통을 알아차리게 됐고,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생겼으며, 그들이 느꼈을 아픔을 헤아리게 됐다. 일부로, 애써 도우려 한건 아니었을지라도 그렇게 동은은 저도 모르게 살린 삶이 많았다.


그랬기에 복수가 끝난 후 동은이 행복해지길 누구보다 바랐다. 하지만 여기서 ‘행복’이라는 게 과거를 잊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사는 건 아니었다. 경란(안소요 분)에게 네가 한 행동의 무게만큼은 짊어지고 살라고 했던 건, 동은도 과거를 잊지 않고 살겠단 의미였다. 그렇다면 동은의 삶에 있어야 할 ‘행복’은 어떤 모양일까 생각할 무렵, 드라마는 엔딩에서 복수를 이룬 동은이 다시 대학생이 되어 건축학 강의를 듣는 장면을 보여줬다. 그는 흥미롭게 수업을 들었고, 강의가 마친 후 캠퍼스의 햇살에 외투를 벗어 소매를 걷어 올리며 씩씩하게 걸어간다. 화상자국 위로 멋진 타투가 보였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뭐가 됐든, 누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그리고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 걸요.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크진 못 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어느 봄에는 활짝 피어날게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


처음 체육관으로 불러간 그때부터 복수를 하던 시간 동안 동은의 삶은 온통 ‘박연진’이었다. 살아있으나 저들을 향한 복수심으로 살아갔으니, 온전히 ‘문동은’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런 동은에게 필요한 건 그리고 마침내 이뤄야 했을 복수의 끝은 ‘문동은’으로서 살아가는 일이었다. 


캠퍼스를 나오는 모습 뒤로 동은의 편지가 읽힌다. 언제가 너무도 추웠던 겨울, 한강에서 자신이 구한 부동산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제 편지의 주인공도 더 이상 연진이 아니다. 그렇게 원점에서 동은은 자신에게 좋은 어른이, 친구가, 날씨도, 신의 개입도 있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했던 고등학생 때도 동은을 지키려 했던 양호 선생님이 계셨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은의 편에 서주었던 공장 동생도 있었다. 신이 방해했다고 생각한 순간, 이모님을 만났고,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며 먼저 다가와준 여정이 지금도 곁에 있다. 늦었지만 들어야 할 말을 끝까지 들어준 형사님도 계셨다.


나는 이 모든 게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복수의 순간에도 유혹이 있었지만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았고, 타인의 아픔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런 동은의 곁엔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의 온기가 있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으며, 따듯한 온기 속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은이 복수 끝에 부디 있길 바랐던, 그를 위한 ‘행복’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마음이 자꾸 거친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때론 참지 못하고 흐트러지기도 한다. 그럴 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나의 권리를 내세워 보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불편해진다. 적당한 이유가 아닌 적당한 구실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악한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지키는 노력이 촌스럽고 낡아 보인다 하더라도, 저들처럼 될 바에 촌스러운 사람이 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마음을 나쁜 쪽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 있지 않는 것. 선한 마음의 유대는 동은이 마침내 찾은 행복이 내 행복이 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 곁에 외로운 사람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악이 아닌 선이 이기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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