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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Jun 10. 2023

공감을 잃고 외면만 남은 것 같은 지금, 필요한 치열함

tvN월화 드라마 <이로운 사기> 2023


드라마 #이로운사기 출연진을 보고 봐야 할 드라마 목록에 올려두었다. 이후 공개된 기획의도를 읽고 나서 이 드라마를 어떤 시선을 봐야 할지 방향이 생겼고 ‘봐야 할 드라마’는 ‘봐야 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드라마 기획의도는 “공감”이란 단어로 시작한다. 이 단어가 서점을 가득 채웠던 때를 기억한다. 그리고 이 단어가 인간과 괴물을 나누는 잣대의 이름이던 때를 기억한다. 온갖 희비극에 답을 대신하는 버튼 일 때도 있었다며 “공감”의 어느 시절을 회상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공감”은 그때와 다르다. 달라졌다.


기획의도를 통해 짐작해 본 “공감”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인간이 세상에 반응하는 방식이 공감하거나 외면뿐인지라, 공감만이 각자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 하지만 세상은 ’공감‘으로 연결되기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고통을 무시함으로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공감”이 가진 따스한 빛이 점차 퇴색되어 갔다. 하지만 여전히 남의 아픔에 자신의 살을 내어주고 추락하는 사람도 있다.


외면하는 인물은 이로움(천우희 역)이다.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졌지만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소시오패스 성향의 인물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얻는 과정에서 내가 모르거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다치거나 손해를 보는 것에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이로움에게 사람은 관계성보다 필요 유무, 쓸모라고 불리는 것이 우선이다.


남의 아픔에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은 한무영(김동욱 분)이다. 동조성과 공감경향이 높은 그는 타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는 것 넘어 자신의 것처럼 다가오는 인물이다. 과잉 공감은 변호사인 그의 작업에 이로울 게 없었다. 정신과 의사의 처방처럼 외면도 치료의 한 과정이라 생각해서 그 마음을 억지로 눌러도 봤다. 하지만 그럴 때 가장 먼저 외면해야 했던 건 타인이라 불리는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의 감정들이었다. 살려고 시작한 외면이었으나 결코 살아있다 말할 수 없는 무의미한 시간을 버티던 무영은 로움을 만나면서 외면 말고, “공감”하기로 한다. 부모를 죽인 살인범이 됐던 억울했던, 모두가 외면했던 과거가 외롭고 무서웠다는 이로움의 말을 믿기로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립 구조다.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두 인물의 대립은 그래서 이들이 적이 되거나 오히려 같은 편이 되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의 주제를 던진다. 이 드라마는 “공감”과 “외면”이라는 두 선택지를 놓는다. 그리고 시청자는 인물들이 펼치는 논리를 들으며 두 선택지 중 한쪽에 동의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면서 이야기 속 주제를 함께 고민하게 된다.


가령 양부모와 함께 떠난 휴가지에서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유명훈 군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일에서 무영과 로움이 접근 방식은 정반대다. 무영은 아들을 먼저 보낸 엄마, 세계숙(장영남 분)씨의 마음에 먼저 공감했다. 그래서 1인 시위를 펼치던 서계숙 씨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합의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합의할 바엔 감옥에 가겠다던 서계숙 씨의 말을 이해했다. 억지스러운 주장 같지만 서계숙 씨가 원하는 대로 하자고 한다. 그러면서도 사건을 뒤집을 증거를 찾았다.


하지만 로움의 눈에 무영의 행동은 영양가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명훈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질 리 없고, 서계숙 씨의 고소가 취하되지도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움은 명훈의 양부모를 찾아가 사기를 쳐서 명훈의 보험금 4억 원을 가져오고, 거기에 더해 명훈이 사고사가 아닌 타살이란 증거까지 확보해 온다. 아, 증거는 사기를 쳐서 가져오지 않았다. 훔쳤지.


법과 도덕, 윤리 안에서 해결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는 상황에서 원칙을 지키는 게 바보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그러면에선 로움의 방법을 취하고 싶은 충동도 든다. “공감”도 굳이 따지자면 손해 보는 쪽 같다. 동조성 높은 공감력을 가진 무영은, 감정이 판단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 로움의 입장에선 이용해 먹기 딱 좋은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매정한 것 같은 로움의 말에도 일리가 있게 느껴진다. 법과 도덕 다 지켜가며 언제 문제를 해결하나. 남이야 어떻든 내가 먼저 살아야 하지 않나. 실익이 없을 거라면 공감이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양심이 무영의 논리도 놓을 수 없게 한다.  



공감 또는 외면.

둘 중 하나로 귀결되기 쉬운 선택지에서 무영은 잡아 먹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도망치거나 외면하지도 않겠다는 제3의 선택을 내린다.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비꼬듯 묻는 로움에게 무영은 곁에 있어주는 것부터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서계숙 씨 곁을 지켜 스스로 생을 끝내려는 서계숙 씨를 붙잡았다.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않겠다는 말이 무력하지 않도록 무영은 행동으로 보여준다.


“세상에는 조건 없이 돕고 이유를 불문하고 지키려는 사람“이 바로 무영이다. 물론 로움에게 그런 무영은 “아주 대단한 호구”일 뿐이다. 무영은 로움이 말한 “호구”를 “친구”라고 정정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우리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라는 인물소개 칸이 있고, 그 아래에는 서계숙 씨와 그의 아들 유명훈이 올라와 있다. 공감을 통한 연결은 전혀 몰랐던 남을 친구로 잇는다.


다시 기획의도로 돌아가 보자.

“왜 공감이 연약하고 무력해야만 하는가. 우리 모두 공감받길 원하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든, 언제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삐뚠 입으로 삐뚠 말을 하고 삐뚠 행동을 해도, 그저 곱고 따뜻한 부분만을 찾아내 ‘알아주고’, 공감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


무영은 변호사의 커리어를 포기하면서 로움을 도왔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이 하려는 게 뭐든-그것이 복수든- 내가 돕겠다고. 로움의 호구가 되겠다는 게 아닌 로움의 친구가 되겠다는, 무영의 자발적인 선택이다. 그런 무영을 거절하는 로움에게 무영은 자신을 결코 버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로움 씨가 살의를 드러내는 걸 보고도 공감해 줄 사람. 내가 유일할 테니까.”


감정공감이 부재한 로움에게 무영의 공감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무영은 로움에게 당부한다. ”대신 로움 씨도 공감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적어도 타인에게 상처주기 전에 적어도 망설일 줄 알고 악을 악으로 갚는 것 말고 다른 방법도 고민할 줄 알아야 해. “ 정말로 무영이 호구였다면 로움에게 이용만 당했을 테다. 하지만 친구였기에 무영은 로움이 잘 지냈으면 한다. 공감하고 그래서 망설일 줄 아는 사람을. 그리고 이는 제3의 선택지를 찾는 무영의 노력이다. 앞서 불법 몰카범에게 당할 뻔했던 로움이 촬영물에 자신이 없음을 확인하자 역으로 몰카범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 한 일이 있다. 이때 로움은 핸드폰 속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몰카범을 신고하자니 몰카범에게서 핸드폰을 갈취한 뒤 불법 해킹 프로그램까지 심어 놓은 로움이 같이 잡혀 들어갈 수 있었기에 무영은 몰카범을 잡을 방법을 찾는 동안 로움의 동료 해커 다정(이연 분)에게 보수를 지급할 테니 다른 피해자들의 신상을 인터넷에서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외면하면 그만인, 외면하는 순간 모든 것이 편해지는 선택지를 눈앞에 두고도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않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시작된 무영만의 씨름이다. 이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자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치열함이 아닐까 싶다. 로움의 눈엔 의미 없는 무영의 이러한 노력은 무영에게 디지털 장례식 의뢰를 받았던 다정에겐 모르는 사람에게도 마음 쓴, 진심으로 다가왔다. 그런 착한 사람이라 다정은 무영이 자신도 도와줄 것을 기대하여 위험한 순간 그를 찾아갔다. 이렇게 곁에 있어주는 친구가 있었다면 아마 로움도 과거, 그때 외롭고 무섭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생긴 다정은 덜 무섭고 덜 외로운 인생이 될 것이고. 무영의 공감과 그로 인해 생긴 고민은 치열하지만 무의미하지 않고, 버겁지만 불필요한 노력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드라마 기획의도에도 나와 있지만 “공감”이 서점을 가득 채웠던 때가 있었다. 어디서나 쉽게 “공감”을 들을 수 있었고, 아직도 세상엔 이 단어가 넘쳐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여전히 공허하다. 어디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공감”이 부재해 “공감”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만 넘쳐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기에 나는 ‘윤리적 딜레마’와 ‘고민’ 거기에 ‘공감’과 ‘이해’를 얹은 이 드라마에 거는 기대가 생겼다.


각자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공감”이 무영과 로움을 연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획의도에서 힌트를 찾자면 “증오가 용서가 되고, 계산이 이해가 되며, 해로웠던 사기가 이로운 사기가 되는 정도의, 딱 그 정도의 온도로” 서로 물들어질 것 같다.  당신다움을 부정하지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경계가 흐려지고 닮아져 갈 그 정도의 온도는 “공감”으로 부터 시작 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설령 그게 감정결여의 로움일지라도- 공감해 줄 사람이 있길 바란다는 기획의도 속 문장을 다시금 떠올린다.


공감을 잃고 외면만 남은 것 같은 지금 우리에게 “결국 구원의 시작은 공감이라는 믿음”을 담은 이 이야기가 부디 이롭게 남을 수 있도록, 유종의 미를 거둬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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