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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Sep 16. 2023

이런 세상에 믿음과 신뢰를 놓지 않는 일이란,

jtbc 금토 드라마 <힙하게(2023)>

예분(한지민 분)은 사람을 만날 때 100점을 주고 시작하는 사람이다. 경계심을 갖기보다 분명 좋은 사람일 거라고 믿는 그녀의 믿음은 옹기종기 모여 살며 누구 집에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씩 있는지 다 아는 살가운 분위기의 무진시에서 자란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 밭은 가진 사람이다. 그런 그녀의 믿음은 판초우의를 입은 살인마를 눈앞에서 목도한 순간 깨진다. 살인마에게 쫓기던 지숙 씨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사람을 데리고 오겠다던 예분은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고친다. “사람을 데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올게요.”라고.


도로로 나온 예분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달려오는 버스를 멈춰 세우지만, 막상 버스에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동네 사람들이 내리자 뒷걸음질 친다. “ 범인은 분명 무진 사람 중에 있어.” 그 순간 떠오른 문장열 형사(이민기 분)의 말이 예분 안에 있던 사람을 향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믿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예분은 선우(수호 분)가 좋은 사람이란 사실을 자신이 100% 보증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도움을 청하러 가던 중 만난 선우의 손길조차 거부한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예분이 떠올린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문 형사(이민기 분)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서 ‘오직, 당신뿐‘인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되면 로맨틱한 상상하게 만드는데, 사람을 믿는 편을 택하던 예분의 세상이 무너졌다는 걸 깨닫게 하는 지금은 이 표현이 그리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감석윤 감독의 전작인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나의 해방일지>를 패러디하며 코믹 노선으로 달리던 드라마 <힙하게>는 이야기가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모두를 의심하는 시선으로 보는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한다. 무진시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입고 있던 파초우의, 사용한 장미꽃 칼은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물건이다. 친절하게 웃는 이웃의 표정이 느리게 지나가는 화면 뒤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서늘한 음악이 흐른다. 그 순간 익숙한 동네와 친숙했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모두 의심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더욱이 예분은 살인범을 추적하던 중 엄마의 죽음에 그동안 믿고 따르던 차주만 의원(이승준 분)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믿음의 둑이 무너지자 예분이 마음을 다잡거나 돌이킬 틈도 주지 않고 불신의 물살이 거세게 몰아친다. 믿을 곳이 없게 된 상황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예분이 문 형사를 찾기 위해 익숙한 얼굴들을 수도 없이 밀쳐내고 헤매었던 것처럼.


사람을 향해 믿음을 갖고 살아가던 예분에게 찾아온 이러한 변화가 달갑지 않다던 기사를 봤다. 사람을 너무 믿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속임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들겠지만, 그런 성격을 흉보거나 나무라고 싶지 않다. 속이는 사람이 나쁘지, 선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이 나쁜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자주 ‘그럼에도 믿는 쪽에 서겠다고’ 말해왔고, 그런 생각을 담은 글을 찾는 게 어렵지 않을 정도로 브런치에는 믿음과 신뢰에 관한 글이 많다. 그런 생각을 하는 까닭에는 예분이 선우에게 말하던 이유도 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누구를 의심하며 사는 것보다 믿으면서 사는 게 더 편하거든요.”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만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면 어떡하나 하는 의심의 바람이 인다. 내 안에 있는 믿음의 둑은 언제, 어떻게 하다 무너진 것일까?


최근 삶에 몇 가지 큼직한 변화가 생겼다. 그 일들은 내 안에서 많은 믿음과 신뢰가 사라졌는지 보여줬다. 13년 만에 집주인이 우리 가족에게 계약 연장의 의사가 없음을 알려왔을 때 가장 먼저든 감정은 제 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염려였다. 애석하게도 그때 집주인으로부터 전세자금을 돌려받지 못해 임차등기를 해야 하는 사촌 동생을 돕고 있었다. 세간을 흔드는 전세 사기가 내 일이 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런 주변 상황은 13년간의 인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주인이 좋은 사람이란 믿음을 한 순간에 흔들고야 말았다. 새로운 집을 계약하는 과정에서는 집주인이 속이는 건 없는지, 등기부등본에서 놓친 건 없는지, 집주인에게 위임을 받은 사람과 계약을 진행하는 상황까지 의심이 꼬리를 물었다. 금방 쓱 보고 가지 말고 좀 앉아서 내 집이다 생각하며 찬찬히 둘러보라던 집주인의 할머니라던 그분의 사람 좋은 얼굴과 인자한 표정을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일까?


지난주는 신입 사원의 3개월 수습기간이 끝나는 날이었다. 축하 커피를 마시던 중 사원은 인사 담당자에게 급여명세서를 발급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잘 몰랐다. 금융거래가 적은 사람의 거래 한도가 30만 원 남짓이라는 사실을. 보이스 피싱과 대포통장 등 범죄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 고안해 낸 정책이라지만, 이러한 현실을 보며 믿는 마음에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이 가치의 상실은 내 안에서만 일어나는, 개인적인 영역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지숙 씨는 연쇄살인범에 의해 죽는다. 만약 예분이 버스에서 내린 마을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문 형사를 찾아다니느냐 시간을 쓰지 않았다면 지숙 씨는 살았을까? 그렇다면 왜 하필 그때였을까? 내내 사람을 향해 믿음을 갖고 있던 예분이 속에서 왜 하필 그때 의심의 싹이 피고 만 것인가. 내가 그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편에 서겠다고 말해온 건 이러한 상황에 놓인 적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정적인 순간 올바른 믿음의 방향을 갖고 그 마음을 뺏었기지 않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매 회 배를 잡고 웃게 만든 드라마 <힙하게>는 서서히 그 웃음 밑에 감춘 진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범죄 없는 평화로운 무진시,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살며 신뢰를 쌓아온 이웃들은 범인이 분명 외지 사람일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래서 범인은 무진시 사람일 것 같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심하게 때린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집필한 이남규 작가라는 점을 감안할 때, 예분이가 믿고 신뢰하는 유일한 한 사람, 문 형사가 범인일지도(그렇다면 영화 <식스센스>는 명함도 못 내밀 반전일 테지만). 범인 찾기 위한 추적 아니, 의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드라마는 모두를 의심하게 하는 이 상황을 통해 마을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고, 예분이도 말해오던 “그 사람이 그럴 리 없어, 그럴 사람 아니야”라는 믿음의 태도를 경계하게 한다.


믿음과 신뢰를 보인다는 게 사람에게 한번도 마음 다치는 일이 없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그럼에도 믿는 행동은 사실 예분이 말한 것처럼 편하게 사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찾아오는 의심과 경계하는 마음을 살피면서, 돌이키면서 단단한 태도를 갖추는 일은 고된 싸움이니까. 덮어 놓고 믿는 믿음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영악해지는 세상 속에서 바른 믿음을 주고받기 위한 분별의 지혜와 지키려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은 진짜를 발견하게 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예분이처럼.  그렇기에 살인범이 누군지 궁금한 만큼, 모든 사건이 끝난 후 예분의 마음이 어떤 모양일지도 궁금하다. 그 싸움에서 이긴 예분이를 보고 싶다. 그녀의 승전가가 같은 싸움을 싸우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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